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36화 (136/265)

낙원교(1)

* * *

성명서

* 낙원교는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레아교를 반대함.

* 낙원교는 신을 믿는 그 누구도 가입할 수 있으며, 신도 모두가 평등함.

* 낙원교는 이 이상의 피해를 원하지 않으며, 하루빨리 성국의 안정을 바람.

* 낙원교는 레아교가 원하면 얼마든지 이야기를 들어줄 용의가 있음.

성국과 신성 기관은 아카데미 교류전을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낙원교의 반란 때문이었다. 티폰교라는 뜬소문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되어 크레이타를 강타했다.

오랜 기간 유지된 평화는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처참히 부서졌다.

변해버린 평신도들이 이 모든 변화를 이끌었다.

“레아 님을 위하여!”

묘한 포션을 마시고 변해버린 성국 곳곳을 파괴했다. 마치, 그것만이 삶의 목적인 듯 과격하게 움직였다.

거리의 모든 게 짓밟혀진 상황 속에서도 레아 상은 무사했다.

평신도들은 타락한 신관들에게 분노할 뿐, 창조신에게 반기를 든 건 아니었다. 약은 그들의 모습을 바꿨지만, 신앙심을 꺾지는 못했다.

레아는 여전히 희망의 빛이었다.

“이게 낙원교, 아니 레아 님의 진정한 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들의 눈동자에는 이성의 빛이 돌아왔다. 주변에는 건물의 잔해들과 템플 기사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기사들을 힘으로 눌렀다.

그 사실에 평신도들은 전율했다. 멸시로 가득 찬 시선을 더는 참지 않아도 되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늘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던 삶은 끝이 났다.

그들이 새롭게 얻은 힘은 마족의 마나를 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그런 걸 깨달을 만큼 똑똑하지는 않았다. 마족이란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신성 마법을 특권처럼 이용한 인과응보였다.

* * *

낙원교가 빠른 속도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을 때, 델포이의 숙소에는 교수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도대체 어디 갔었나!”

제프리스는 책상을 강하게 치며 화를 냈다. 그 바람에 죄 없는 책상이 덜컹하고 흔들렸고, 위에 놓여 있던 펜과 종이들이 흩날렸다.

딱히, 유피테르를 힐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비상사태에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최악의 경우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유피테르 역시 부학장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델포이는 이미 그를 가족으로 여겼다. 유피테르가 명예 교수이자 일정 시간 동안만 근무한다는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로즈 학장. 아직도 성국에게서는 답이 없나?”

“맞습니다. 제프리스 학장 대리님. 교황이 살해당한 것까지 발견되어 그럴 정신이 없어 보였습니다.”

델포이의 선발대는 광장에서 벌어진 테러를 제일 먼저 목격했다. 그 덕에 재빨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교수들을 중심으로 단단한 결계를 치며 습격에 대비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낙원교의 신도들은 아카데미 숙소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나갔다. 덕분에 김이 팍 샜지만, 아직 안전한 건 아니었다.

운 좋게 태풍의 눈에 있었을 뿐, 언제 이 고요가 끝날지 아무도 몰랐다.

“게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무력해지는 건가.”

제프리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했다. 그 모습을 보고도 유피테르를 포함한 다섯 명의 교수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흔한 위로의 말조차 소용이 없을 게 뻔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아카데미생들조차 알 정도였으니.

낙원교로 개종한 자들의 습격이 없자, 섬에 있던 게이트를 사용하려고 했다. 타국에서 벌어진 일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아카데미생들의 안전이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게이트는 작동하지 않았다.

게이트가 왜 움직이지 않는지 신성 기관이나 성국에 문의했지만, 응답이 오지 않았다. 교황의 서거로 인해 혼잡해져서 그럴 여력이 없어 보였다.

“본국에서 구조대를 보낸다고 하니 조금 기다리심이….”

교수 대표였던 로즈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계속 이렇게 한숨만 쉬어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델포이의 정신에 맞게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딴 건 나도 아네!”

평소라면 여러 계략을 사용했겠지만, 제프리스는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다. 늘 학장의 자리를 대신하는 걸 꿈꿔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졌다.

델포이 내에서 파벌 싸움을 하는 것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실수해도 되갚아 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번의 실수도 돌이킬 수 없었다.

모두가 침묵에 빠진 그때, 유피테르가 나섰다.

“구조대에 조디악의 마법사가 속해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유피테르의 말에 제프리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델포이 아카데미는 이미 조디악의 마법 사중 한 명을 배출해낸 전력이 있었다. 충분히 믿을 만한 근거가 있었다.

“조디악의 마법사들은 평범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약해진 마음은 끊임없이 의심을 키웠다.

“믿을 만한 창구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아르테미스의 정보망을 이용했으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희 가문에서도 카테리나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입니다. 따로 인원을 꾸리고 있습니다.”

유피테르는 확신을 주기 위해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사용했다.

가주의 힘을 사용해 알아낸 사실이었으나, 그걸 아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애초에 가주라고 주장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유피테르처럼 어린 가주는 흔하지 않은 대사건이었다.

게다가 그가 어떻게 강해진 것인지 의심하는 적들도 많았다.

그들은 이단 심문관들처럼 유피테르의 뒤에 마족이 있다고 주장했다. 마나 자체를 느끼지 못했던 자가 남을 가르칠 정도로 강해졌다는 건 동화책 속에서가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여동생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직 정신도 차리지 못한 카테리나를 이용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한번 믿어보도록 하지.”

유피테르의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며칠 사이 두 배는 늙어 보였던 제프리스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소가 서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교수들의 눈에서도 어둠이 걷혔다.

조디악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절대적인 울림이었다.

* * *

주신 레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교황청.

사도는 교황청 대기도실의 의자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그건 원래 교황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사도와 같은 이교도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원래 교황의 의자는 다른 이들과 같은 높이였다.

다른 이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교황은 누구의 편도 아닌 신의 목소리를 잇는 자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도는 대기도실의 구성을 바꿔버렸다. 그가 앉아있는 의자는 다른 이들에 비해 몇 계단이나 높았다. 마치, 황제처럼 다른 이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고생했다. 사제들이여. 아니, 이제는 대사제들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

사도는 팔걸이를 오른손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모든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어 사도는 만족스러웠다. 이상한 세력이 낙원교를 조사하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한 건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이제 영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뚱뚱했던 사제가 희열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추기경이었기에 낙원교의 신이 레아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간파했다. 그럼에도 사도를 따랐다. 오랜 시간 동안 레아를 믿어왔지만, 얻은 건 병뿐이었다.

창조신 레아는 단 한 번도 웃어주지 않았다.

“사도님. 이제 당신의 얼굴을 보아도 도는 것이옵니까?”

4명의 사제 중 유일한 여성이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 무릎을 꿇은 사제들은 융단이 깔린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사도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사도는 교황청을 얻는 그 날, 사제들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좋다. 너희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사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적당히 굴곡진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억…?”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한 사제들은 숨을 삼켰다.

사도의 머리카락 색은 두말할 필요 없는 검은색이었다. 마치, 마족을 연상시키는 불길한 색이었다.

“왜, 마족 같아 놀랐는가? 대사제들이여.”

사제들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회의감을 사도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도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 어리석은 연극이 너무나 우스웠지만, 아직은 끝낼 수는 없었다.

‘사도는 마족이었던 건가?’

마른 사제는 급격히 표정을 숨겼다. 뚱뚱한 사제처럼 그 역시 추기경 중 하나였다. 당연히 마족의 마나와 생김새 정도는 알았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마왕부터 하급 마족까지 이 법칙을 벗어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세아니아 대륙의 사람들도 검은 머리나 붉은 눈을 가지고는 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특징이 동시에 발현된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사제들이여. 자네들이 뭘 걱정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 붉은색 눈을 의심하는 거겠지. 하지만, 내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도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위로 뻗었다.

우우우우우웅ㅡ.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내려왔다. 그건 단순한 마나의 흐름이 아니었다. 신이 내려주는 축복처럼 신성했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도는 빛을 피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정말로 마족이 아니라는 건가?’

마른 사제는 그 모습에 흔들렸다.

사도의 모습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교황의 모습과 비슷했다. 마족의 마법은 몰랐지만, 신성 마법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신관의 이름을 허투루 단 것은 아니었다.

저 빛은 마족보다는 오히려 신성 마나에 가까웠다.

“이게 무슨…?”

사제들은 사도의 말을 물론,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 밖의 현상이었다.

사도의 눈은 의심할 여지 없는 붉은색이었다.

시위대에게 약까지 먹인 마른 사제가 순간적으로 놀란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루비를 연상시키는 붉은 눈동자에 사제들의 얼굴이 그대로 비췄으니까.

“괜찮으십니까? 이스 님.”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4번째 사제가 사도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가장 늦게 합류한 사제였다. 신성 기관도 들어가지 못한 평신도의 대표였다.

“나는, 괜찮다. 내 눈을 보아라.”

그 말에 사제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분명, 붉은색이었던 그 눈은 이제는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눈동자에 비치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눈 색을 변하게 하는 게 신의 뜻이었단 말인가!’

4명 중에서 가장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마른 사제 역시 생각을 바꿨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지금껏 했던 애매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가 갔다.

“나, 이스캐리엇의 이름으로 명한다. 4명의 사제는 각각 이스트, 웨스트, 사우스, 노스의 이름을 지니고 신의 뜻을 이룰 것이니라.”

“사도 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낙원교를 지탱하는 네 명의 대사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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