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35화 (135/265)
  • 흔들리는 성국(7)

    * * *

    “…정말이네?”

    유피테르는 교황의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다.

    숨을 쉬지 않는 그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교황 아스라엘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교황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스라엘은 세 개의 기둥을 맡을 정도로 강한 신관이었다. 부임 이후에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정도로 신앙심도 높았다.

    그런 그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나의 손녀를 건들다니. 역시 여신의 적들과 한 세계에서 살 수가 없는가.”

    바로 얼마 전까지도 교황은 멀쩡했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교황을 모시던 자들은 아스라엘이 반신의 경지에 다다른 게 아니냐고 농담하곤 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녀를 혼수상태에 빠트린 범인들에게 분노를 터트렸다. 진범으로 의심되는 마족들을 토벌하겠다고 공표까지 했다.

    프레이야의 상처에 남아 있는 마족의 기운을 교황이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이제는 편히 쉬어. 나머지는 내가 처리해줄게.”

    시체를 지켜보던 유피테르는 다가가 교황의 눈을 감겨주었다. 원통함으로 가득한 눈동자에 은발의 대행자가 비칠 일은 없었다.

    “마스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디오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그를 불러줘. 디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마법을 당한 사자(死者)들은 모두 혼이 사라져 버립니다.”

    디오는 한 번 더 유피테르의 의사를 확인했다. 유피테르는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현이었다.

    “알겠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이 되길 빕니다.”

    디오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먼저 결계를 펼쳤다.

    테러 사건 때문에 교황청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어찌나 어지러운지 두 명이 교황의 방에 다가가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원래는 교황의 방 근처를 서성이는 것만으로도 제압당해야 했다.

    디오가 조심하는 건 인간들이 아닌 마족이었다.

    어디에 숨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유피테르와 칼리스토들은 분명히 마족보다 강했다.

    그러나 마족들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뒤를 노렸다. 유피테르의 ‘그녀’조차 마족의 꿍꿍이에 당할 정도였다.

    디오 식 특제 마법 ― 사자의 서 : 제 1 장

    사자의 서.

    그건 죽은 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사령술과 엇비슷하지만 디오의 마법이 몇 단계 위였다. 본인이 거절하더라도 강제로 명령을 듣게 할 수 있었다. 명령을 통해 그들이 생전 사용했던 마법을 뺏어올 수 있었다.

    우우우웅ㅡ.

    디오의 마나가 교황의 방을 가득 메웠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그러나 유피테르의 표정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고작 이 정도로 그를 꿈쩍하게 할 수 없었다.

    디오의 마나는 천천히 교황에게로 향했다. 형형색색의 마나는 교황 아스라엘의 몸에 다가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다름 아닌 교황의 영혼이었다.

    “누가 이 미천한 종의 잠을 깨우는가?”

    유령이 된 아스라엘이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희끄무레한 색으로 변한 교황은 심기가 불편했다. 드디어 신의 곁에서 안식을 꿈꿀 수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걸 방해했으니.

    늘 담담한 말투로 말하는 아스라엘이라도 그건 참을 수 없었다.

    “나야.”

    유피테르는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교황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아스라엘이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표정과 말투였다.

    교황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수행하려면 여러 가면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대행자인가. 생각해보니 그렇군.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사람은 당신밖에 없지. 미천한 종의 죽음에 자네가 슬퍼해 줄 줄이야.”

    유피테르를 확인하자마자 아스라엘의 태도가 바뀌었다. 대행자의 앞에서까지 굳이 무게를 잡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신의 뜻을 가져온 귀인이었으니.

    “그럼, 누가 당신을 죽였는지 말해줄래?”

    교황이 안정을 찾자마자 유피테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스라엘이 죽은 건 슬펐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선 진실이 필요했다.

    아직, 범인을 특정할 퍼즐 조각이 부족했다.

    “신의 종을 죽인 게 누구인지는 보지 못했네.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일세.”

    “얼굴은 보지 못했나….”

    유피테르는 아스라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교황은 거짓말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필요에 따라 가면을 바꿔썼지만, 되도록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했다.

    디오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생전의 기억과 성격을 그대로 가졌다. 교황이라고 하더라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죽은 거죠? 교황청에는 사람도 많고 결계가 한 번 더 둘러져 있던데요.”

    디오는 교황을 죽인 방법이 궁금했다.

    마스터에게 더 확실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조사했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이 방에 누군가가 들어온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설령, 고위 마족이 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교황의 방까지 몰래 들어온 간 큰 자들은 없었다. 만일의 경우에는 당신이 숨겨둔 힘을 사용하면 됐을 텐데?”

    디오의 말에 유피테르도 동의했다.

    레아교가 창립된 이후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교황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교황의 방에서 죽은 건 그가 처음이었다.

    “그건 어렵지 않지. 자네들도 이렇게 몰래 들어오지 않았는가?”

    교황이 대답하자 유피테르와 디오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그 모습에 교황은 작게 웃었다.

    두 명의 초월자들이 순순히 따르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그에게는 친자식이 없었기에 더욱 사랑스러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교황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범인은 마족이 아닐 테지. 나를 공격했던 자는 신성 마나를 가졌었다네. 마족이 제아무리 기교를 부린다고 해도 신의 권능을 따라 할 수는 없어.”

    교황 아스라엘의 말투에서는 레아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잠깐이나마 라엘이 흑막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미워지는군.’

    유피테르는 카테리나가 쓰러지자마자 라엘을 의심했었다. 유령이 된 지금도 아티팩트로 거짓인지 확인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그의 말은 전부 진실이었다.

    유피테르의 생각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아스라엘이 지하 감옥에 갇힌 자신을 구하러 온 타이밍이 절묘했다. 마치, 미리 모든 계산을 끝내놓은 것만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마디 한마디가 의심의 불꽃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달의 몰락 사건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성국 내부에 분명히 배신자가 있을 것만 같았다.

    성국의 결계는 페르세포네처럼 신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다만, 매개체가 되는 성배를 교황이 관리할 뿐이었다.

    만약, 마족이 정말로 결계를 돌파했다면 교황이 의심받는 건 당연했다.

    “의심되는 사람은 있겠지? 라엘. 당신이 그저 웃기만 하는 늙은이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

    “하하하하. 대행자에게는 숨길 수 있는 게 없군. 저쪽을 뒤져보게. 아마, 자네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그곳에 있을 걸세.”

    유피테르의 협박 같지 않은 협박에 교황은 손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교황이 아끼던 작은 레아 상이 보였다.

    “라엘. 너 무언가 알고 있지? 확실히 말해….”

    “이런, 시간이 다 된 것 같군. 먼저 가서 기다리겠네. 자네도 여자친구를 돌려받을 수 있으면 좋겠군.”

    교황 아스라엘은 그 말을 마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유피테르는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으로 디오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마법이 풀렸습니다. 영혼의 지배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디오는 억울함을 꾹꾹 눌러서 표정을 유지했다. 생명의 위기나 완전히 엇나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마스터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그건, 전대 마스터를 욕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신이 간섭한 건가. 네 잘못을 물으려는 게 아니야. 넌 충분히 잘해줬다. 디오.”

    유피테르는 오해가 생기기 전에 풀고서 교황이 가리킨 곳으로 이동했다. 디오는 안심하며 유피테르를 따라 움직였다.

    “이 레아 상이 우리가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응응, 맞아.”

    유피테르는 레아 상을 집어 들었다.

    작은 신상에서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라엘이 뭘 전해주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도 창조신에 대한 공경심이 남아 있긴 했다. 성국의 신관들은 물론, 평범한 제국민들과도 다른 느낌이었다.

    유피테르는 ‘그녀’와 함께 살면서 레아에 대한 환상을 지워버렸다.

    “마스터. 신성력을, 아니 신성 마나를 넣어보심이 어떠십니까.”

    “시작 지점으로는 나쁘지 않은 판단이네.”

    디오가 슬그머니 의견을 내밀었다. 유피테르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 대단한 아이디어는 아니었으나, 모양새가 좋았다.

    신성 마나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성국에서도 극히 일부에게만 가능했다. 당연히 리투아 제국의 귀족인 유피테르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그 사실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신성의 빛

    유피테르에게서 푸른 마나가 쏟아져 나왔다. 그건 평상시와 같은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인간이 사용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마나였다.

    푸른 마나는 유피테르의 지휘를 따라 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푸른색은 어느새 신성한 흰색 빛으로 변했다.

    성국의 신관들이 사용했던 바로 그 색이었다.

    지이이이이이이잉.

    무한한 양의 신성 마나를 불어넣자 레아 상이 서서히 반응을 보였다. 진동은 점점 커지면서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교황의 방이 여기저기가 도화지였고, 신성 마나가 물감이었다.

    유피테르는 레아의 상이 만든 기적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케팔로스가 성국 여기저기에 난리가 났다고 경보를 울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교황이 말하는 게 뭔지 확인해야만 했다. 템플 기사들이 이 정도 시간은 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빠지직ㅡ.

    레아 상이 제 역할을 다했는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자 신성 마나도 움직임을 멈췄다.

    “크레이타의 지도인가?”

    유피테르는 신성 마나가 완성한 작품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이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완성되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성국 크레이타의 지도였다.

    “그럼 이 점들은 뭘까요?”

    디오는 레아 상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흰색 점이 그려져 있었다.

    신성 마나가 하나로 뭉쳐져서 그렇게 보였다. 다른 곳에도 점들이 있었으나, 이게 제일 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교황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었다.

    “교황은 이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지?”

    유피테르 역시 디오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이 점들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단서라는 느낌은 받았으나 그게 다였다. 지도에 새겨진 점들은 유피테르의 지식과 맞는 것들이 없었다.

    추기경이나 성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성국에서 관리하는 던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교류전의 내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 비밀을 풀지 못하게 강제로 연결이 끊긴 느낌이었어요. 뭔가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요?”

    디오는 유피테르의 말에 상황을 되짚어보며 말했다.

    ‘말해서는 안 될 사실. 설마 이건…?’

    디오의 그 말은 힌트가 되어 주었다.

    교황만이 알고 있는 비밀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뿐이었다. 그 비밀은 유피테르 일행이 노리고 있는 마족과도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레아 상이 있던 이곳. 바로 이 지점이 성배가 숨겨져 있는 곳이야.”

    생각을 정리한 유피테르가 지도를 노려보며 단언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