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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34화 (134/265)
  • 흔들리는 성국(6)

    * * *

    평화 시위가 이루어졌던 곳은 이미 참혹한 학살의 현장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포션을 마시고 괴물로 변한 시위대는 먹잇감을 찾아 눈을 빛냈다. 온몸에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새롭게 얻은 힘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때마침 그곳에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사, 살려줘!”

    “우, 우리는 같은 사람이잖아. 그렇지? 그 발톱 좀 치워줄래?”

    시위대의 손아귀에 잡힌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신의 낫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퍼스트 서클도 넘어서지 못한 일반인들이었다. 자력으로 도망칠 방법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걱ㅡ.

    괴물이 되어버린 시위대에게 인간의 자비심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시위대는 아무 죄책감도 없이 생명의 불꽃을 빠르게 꺼트려 갔다.

    “크하하하하… 바로 이거야. 이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원교에 어둠을!”

    사제는 미친 듯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공포와 절망

    두 개의 감정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꿈꾸던 낙원이었다.

    올바른 세계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만 했다.

    자신이 패배자인 세상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불합리로 가득 찬 세계를 뒤엎어버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게 지금껏 믿어왔던 창조신 레아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인약? 아니 조금 다르네. 이성을 잃은 모습은 오히려 반마족에 가깝군.”

    유피테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위대의 상태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의 왼손에는 시위대가 마셨던 불길한 포션이 들어있었다. 몇백 명 사이를 누비며 얻어온 전리품이었다.

    델포이 아카데미의 걱정과는 달리 유피테르는 안전했다. 고작 이 정도 일로는 그를 위협할 수 없었다. 힘으로서 그를 겁먹게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피테르는 포션이 깨지지 않도록 마법을 사용했다. 마나 제어력이 완벽했기에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대로 마법이 걸렸는지 확인하고서 포션을 아공간에 넣었다.

    오흐트와 엑시에게 이 포션을 넘겨주면 샅샅이 분석해줄 거라 믿었다. 그 두 사람의 실력은 확실했다. 마족이라면 이를 가는 칼리스토들이었기에 동기 부여도 확실했다.

    그 순간.

    유피테르에게 예고도 없이 통신 마법이 걸려왔다. 통신 마법을 걸어온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놀라운 소식에 자리를 떠났다.

    이 뒤는 그가 아니라 템플 기사들이 활약할 차례였다.

    “교황님의 명령이 내려왔다. 이곳을 정화해!”

    그렇게 기다려왔던 허가가 드디어 떨어졌다.

    성국의 세 개의 기둥은 상호 불간섭이 원칙이었다. 사적으로는 얼마든지 친해도 되지만 공적으로는 서로를 견제해야만 했으니.

    당연히 성국의 기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템플 기사단이었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이야기가 조금 애매했다. 대규모의 시위 자체가 처음이었고, 그들이 주장하는 건 교황의 퇴임이었다.

    당연히 교황과 교황청의 의견까지 물을 수밖에 없어 명령이 늦어진 것이다.

    “빛이 있기를.”

    시위대를 막기 위해 자리에 소집된 기사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마법사들이 득세하는 세계에서 이들은 굳이 기사로 남기를 고집했다. 전투 방식이 아니라 기사의 뜻을 이어받고자 한 것이다. 기사들은 왕에게 충성하고 사람들을 구했다.

    창조신 레아의 뜻을 받들고, 마족에게서 사람들을 구한다.

    템플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그들의 유일무이한 기치였다.

    전투 시작의 신호 따위는 필요 없었다.

    템플 기사들은 빼든 검을 하늘로 높게 들고서 신성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흰색 빛의 신성한 마나가 거리를 덮었다.

    그 빛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창조신 레아에게 선택받았다는 증거였다.

    “캬오오오오!”

    “쿠오오오옹!”

    위협적인 마나에 시위대의 시선이 기사들에게 쏟아졌다. 무고한 자들의 생명을 빼앗는 게 지겨웠는지 마법을 피하며 템플 기사단에게 성큼 다가왔다.

    “태초에 창조신 레아가 있으셨고….”

    모의 전투에서 지겹게 보았던 마족의 마나를 실제로 느끼자 몸이 떨려왔다. 그래서 레아 교 경전을 첫 장부터 외웠다.

    하지만, 그건 공포가 아니었다.

    여신의 적에게 철퇴를 가할 수 있다는 기쁨의 떨림이었다. 수백도 수십의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죄 없는 평신도들에게 안식을!”

    “안식을!”

    “여신의 적에게 죽음을!”

    “죽음을!”

    템플 기사단은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에게 달려나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한 조각의 망설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 죽더라도 여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하하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망할 성국 놈들아. 악마가 만든 낙원교의 힘을 똑똑히 맛보아라.”

    혼란이 가득한 전장 속에서 마른 사제는 여유롭게 모습을 감췄다.

    * * *

    유피테르는 통신 마법을 날린 자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공간 이동을 쓰면 놈들에게 들킬 수도 있습니다. 또, 최대한 마나를 숨겨주세요. 교황청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 번에 이동할 수 없는 게 불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딱히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도 해서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유피테르를 부른 존재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나까지 숨기면서 이동하라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성국의 결계 헤카테를 무시하고 마족들이 날뛰는 상황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광장에서만 시위가 벌어진 게 아니라고?”

    성국의 거리를 빠르게 지나가던 유피테르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성국 여기저기서 괴물들이 날뛰고 있었다. 포션을 먹고 변한 평신도들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다. 템플 기사 몇 명이 대치하고 있었으나, 수에서 밀렸다. 몇십 명이 몇백 명을 상대하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유피테르는 템플 기사들을 도와줄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굳이 지금 그들을 도와줄 필요는 없었다. 마족을 주적으로 삼은 성국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성녀가 아직 전투에 나설 수는 없으나, 템플 기사들은 놀고먹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 타이밍에 괜히 나섰다가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마스터.”

    교황청 지하에서 유피테르를 기다리고 있던 건 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유피테르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렸다. 손을 흔들 때마다 포니 테일로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디오? 너는 그녀를 구할 열쇠를 찾던 것이 아니었나?”

    칼리스토의 두 번째 자매, 디오.

    그녀는 놀랍게도 마족과 같은 흑색의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마족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두 눈이었다.

    색이 다른 양쪽 눈동자는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트리아가 불러서 잠시 귀여운 여동생들을 도와주고 있었어. 귀여운 여동생들이 힘들어하는 건 도저히 봐줄 수 없었거든.”

    칼리스토 자매들 중 차녀인 디오는 지독하리만큼 동생들을 아꼈다. 피도 이어지지 않은 자매인데도 정말 가족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 덕에 칼리스토들은 오랜 기간 하나가 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할 이유가 뭐지?”

    “충격적인 사실이 두 가지 정도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들키지 않고 오라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장소가 이상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면 칼리스토의 저택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 몇 겹의 결계가 쳐져 있는 그곳이 훨씬 안전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이런 곳에서 이야기해도 괜찮아? 누가 들을 수도 있다.”

    “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내 결계로 막을게. 그러면 마스터도 안심하겠지?”

    디오는 유피테르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마스터가 오기 전에 한 번 확인하긴 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확인하고서 시동어도 없이 결계를 완성했다. 칼리스토의 2인자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 중 하나였다. 칼리스토 자매들의 이름은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럼. 한 번 들어보도록 하지.”

    디오가 만든 결계의 강도를 확인한 유피테르가 말했다.

    “첫 번째 놀라운 사실은 교황이 죽었다는 거야. 어때 놀랐어?”

    “뭐? 그럴 리가 없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스라엘은 멀쩡히 살아있었어. 쓰러진 건 성녀 프레이야지. 교황이 아니었단 말이다.”

    잡생각을 한 번에 날려버리는 폭탄이 터졌다.

    교황 아스라엘의 죽음.

    그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일행에게 알리지는 않았으나, 교황은 분명히 본인이었다. 피티아 사건에서 배운 게 있던 유피테르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녀’가 준 아티팩트도 있었고 거짓을 판명하는 신성 아티팩트도 있었다. 실체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떠한 아티팩트로 검증해도 교황은 본인이라는 결과만이 나왔다.

    “교황이 죽은 건 언제지?”

    유피테르는 눈을 마사지하면서 물었다.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성국이 멸망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세 개의 기둥은 단순히 권력 구조를 나눈 게 아니었다.

    교황·성녀·템플 기사단 모두가 특별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건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교황과 성녀 두 사람 모두에게 인정받은 유피테르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은 상태였다.

    “라플라스에 대해서는 에냐에게 들었지? 던전에서 나온 문서를 엑시가 해독하다가 알게 된 거야. 그들이 노리는 게 성국 그 자체라는 걸.”

    “그게 무슨 뜻이지?”

    유피테르는 디오의 말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마족에게 있어서 성국과 신성 마법사들이 거슬리는 건 맞았다. 그러나 그게 성국을 박살 낼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페르세포네가 뭐로 유지되지?”

    “당연히 그 속에 있는 마족들의 마나로 유지되지. 그게 지금 이것과 무슨 상관이라도 있나?”

    마족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신의 결계 페르세포네는 결계 속에 갇힌 마족들의 마나를 흡수해 유지되었으니까.

    창조신 레아는 자식들의 도전을 쉽게 용서해주지 않았다. 인간에게서는 고등 마법과 문명을 빼앗았고, 마족들에게서는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오늘 마스터는 조금 둔하네. 잘 생각해봐. 마왕이 죽었다고 마족들이 신에 대한 반란을 포기했을까? 그럴 리 없지. 분노로 가득한 마족들이 결계를 우회할 방법을 찾았다면 어떻게 될까?”

    반짝이는 디오의 눈동자가 유피테르를 향했다. 그녀는 유피테르가 답을 끌어내기를 원했다. 칼리스토의 주인이라면 이 정도는 해내야만 했다.

    이 뒤에 기다리고 있는 폭풍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었으니.

    “신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를 부순다.”

    유피테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디오가 던져준 단서들을 조합해 라플라스의 목적에 도달했다.

    “정답이야 마스터. 신의 목소리를 들은 자들을 죽이고 성국을 파괴하면….”

    “…당연히. 침묵하던 신도 모습을 나타내겠지. 신은 그 무엇보다 인간들을 사랑하니까.”

    지금까지 마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신에게 공격당했다.

    대륙 전쟁 시기에도 창조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 세계에 내려오지 않고 신벌을 내렸다. 가끔, 계시를 내리거나 사도를 보낼 뿐이었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적의 약점을 찾아낼 방법 따윈 없었다. 창조신과 창조물이라는 관계성을 떼어놔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를 빼앗겼던 마족들의 복수의 칼날은 인간에게로 향했다.

    대륙 전쟁과는 다르게 은밀했고, 신속했다. 굳이 거창한 방법을 택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일로 눈을 가린 후, 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을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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