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31화 (131/265)
  • 흔들리는 성국(3)

    * * *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유피테르였다.

    갑자기 쓰러진 여동생은 심장 쪽을 쥐며 고통스러워했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인지 이쪽저쪽으로 굴렀다.

    “오흐트!”

    유피테르는 그 모습을 보고 바로 오흐트를 불렀다. 마왕의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여동생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오흐트는 호출에 재빠르게 응했다.

    들고 있던 인형들은 아공간에 빠르게 집어넣고 한걸음에 다가왔다. 지체 없이 카테리나의 상태를 확인하던 그녀가 말했다.

    “마스터. 이곳에서 치료하면….”

    유피테르는 오흐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바로 알아챘다.

    이곳은 성국이었다.

    마족의 마나를 풀풀 풍기면 이단 심문관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마인의 등장과 성녀의 부상으로 성국은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였다.

    괜히 그들을 자극해, 환자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나비의 노래, 공간 이동

    유피테르는 두 가지 마법을 동시에 펼쳤다. 시동어 없이도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한 치의 오차도 내고 싶지는 않았다.

    우웅ㅡ.

    유피테르의 마나가 일행의 주변을 감쌌다. 마치, 겨울 아침의 포근한 이불 같았다. 유피테르의 푸른 마나는 어느새인가 은은한 노래로 바뀌었다.

    그 소리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았다.

    “어어…? 내가 왜 여기 있지?”

    “이, 이 교류전이 끝나면 그녀에게 고백할 거야.”

    유피테르 일행을 쳐다보던 자들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굳이 기억을 지워서 의심받을 필요는 없어.’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는 시선을 돌리는 게 나았다. 애초에 이들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저 운이 나쁠 뿐이었다.

    고작 이단 심문관들이 그의 마법을 알아차릴 리는 없었다. ‘그녀’에게 직접 전수받은 정신계 마법은 후유증이 없다시피 했으니. 그래도 마법은 신의 기적과는 다른 힘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파앗ㅡ.

    환한 빛과 함께 그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상태는?”

    카테리나는 침대 위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오흐트가 치유 마법을 사용하자 표정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럼에도 손이 심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심박수가 이상할 정도로 빨라. 치유 마법으로 간신히 숨은 돌렸지만, 아직 위험한걸”

    치유에 열중하던 오흐트가 중얼거렸다.

    “리나….”

    유피테르는 안절부절못하며 카테리나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더는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었으니까.

    번쩍ㅡ.

    그때 유피테르의 옆에서 빛이 쏟아졌다. 공간 이동의 전조였다.

    그곳에 나타난 건 에냐였다.

    “에냐. 무슨 일 있어?”

    “마스터, 바쁘신 걸 알지만 잠깐만 와주실 수 있어요?”

    에냐는 나타나자마자 유피테르에게로 다가왔다. 뜬금없는 에냐의 행동에 유피테르가 물었다.

    “칼리스토들이 트리아를 지원한다고는 들었는데.”

    이전 유피테르는 트리아에게 명령을 내렸었다. 페르세포네의 구멍과 사라진 마족들을 쫓으라고. 칼리스토 자매 몇 명을 데려와도 좋으니 끝까지 찾아내라고 했다.

    트리아는 에냐를 비롯한 비번인 자매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임무가 없던 이들은 유피테르의 이름을 걸자 빠르게 모였다.

    충성과 상관없이 마스터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마스터의 여동생 지금 아프지?”

    에냐의 말에 유피테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에냐의 가녀린 어깨를 세게 잡았다.

    “아파. 좀 놔줘야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하지.”

    “미안하다.”

    정신을 차린 유피테르가 손을 놓았다. 그러나 이미 에냐의 어깨는 붉어져 있었다. 고작, 몇 초 동안에 심한 멍이 들어버렸다.

    “마스터답지 않게 왜 그래?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이 매력이었는데 말이지.”

    에냐는 아공간에서 치유약을 꺼냈다.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치유약은 시중의 것과는 달랐다. 핑크색이 아닌 치유약 본연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선명한 붉은색은 마치 피처럼 보이기도 했다.

    뽁ㅡ.

    그리고서는 뚜껑을 따고 치유약을 시원하게 비웠다. 그러자 두 어깨에 난 손자국과 멍이 스르륵 사라졌다.

    유피테르가 에냐의 상처가 치료될 때까지 기다렸다. 칼리스토들은 아공간에 이것저것 넣고 다녔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늘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 정도의 멍에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유피테르가 에냐의 생각이 궁금했다.

    에냐는 예고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카테리나가 아프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트리아 언니가 내게 준 임무는 나태의 마족 공작 라플라스를 찾는 거야.”

    라플라스.

    카테리나가 말했던 이름이 이곳에서도 언급되었다.

    “라플라스…. 그래 그 이름이 요새 자주 들리는군. 하지만 카테리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마족들이 꿈꾸는 건 마왕의 부활이 아니야. 마왕을 마신으로 만드는 거야.”

    “뭐…?”

    에냐의 말을 들은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감히 신을 지칭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다는 게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족 중에서 가장 강한 마왕 티폰도 결국 신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던 게 현실이었다.

    신이란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세아니아 대륙의 역사에 신은 단 한 명뿐이었어.”

    “그건 나도 알아 마스터. 창조신 레아 님의 위명은 그 누구도 가릴 수 없었어. 하지만….”

    한때는 에냐 역시 유피테르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신은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칼리스토 자매들을 만든 ‘전대 마스터’조차 불가능했다.

    “이걸 봐. 마스터.”

    에냐는 다시 한번 아공간을 열었다.

    유피테르의 생각을 바꾸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만 했다. 이럴 줄 알고 그 물건을 챙긴 게 다행이었다. 이걸 가져가는 건 위험하다고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에냐는 자기 자신과 칼리스토들을 믿었다.

    “이게 뭐라고 생각해?”

    그녀는 아공간에 손을 넣어 포션 한 병을 꺼냈다. 그 포션은 방금 전과 다르게 봉인의 사슬로 치렁치렁 묶여 있었다.

    “아직 치료가 끝난 게 아닌가. 잠깐, 그건 설마…?”

    유피테르는 에냐가 왜 또 치유약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 포션은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마스터가 직접 확인해봐. 그럼 믿을 수 있겠지.”

    에냐는 유피테르에게 봉인된 포션을 건네주었다. 직접 손으로 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자랑하는 바람 마법으로 천천히 날렸다.

    될 수 있으면 저 포션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손이 아니라 바람 마법까지 쓸 일인가?’

    유피테르는 에냐가 보내준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봉인의 사슬은 틀림없는 에나스의 마법이었다. 사슬에서 느껴지는 마나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칼리스토의 마스터였으니.

    검붉은색의 포션은 보기만 했는데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봉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에도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왜 손으로 만지지 않으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틀림없었다.

    그건 알바레스가 마인으로 변하기 전에 마셨던 포션이었다.

    “마인으로 변하는 포션이군. 어디서 구한 거지?”

    “따라오면 알 수 있어.”

    유피테르는 에냐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서, 오흐트에게 부탁했다.

    “리나를 부탁하마. 오흐트.”

    “걱정 마. 마스터. 만일의 경우에는 그 힘을 사용해서라도 지킬 테니까.”

    오흐트의 확언에 유피테르는 마음을 놓았다. 항상 아이 같은 모습이었으나 환자 앞에서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과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슬픈 일이 떠오른다며 묻지 말아 달라고 했다. 유피테르는 굳이 상처를 후벼파는 취미는 없었기에,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녀의 생각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거의 힘을 사용해준다는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럼 가자. 에냐.”

    “놀라지 말라고. 마스터.”

    유피테르는 에냐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숙소에서 사라졌다.

    * * *

    “내게 보여주고 싶다는 게 이곳이야?”

    공간 이동이 끝나 눈을 뜬 유피테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인상적인 것들은 없었다.

    “이곳은 성국 본토에 있는 던전 중 하나에요. 마스터.”

    “성국의 던전은 모두 성기사들의 관리하에 있을 텐데? 던전 관리 하나만큼은 리투아 제국 이상이잖아.”

    유피테르는 에냐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의 말처럼 성국은 그 어떤 국가보다 던전을 확실히 관리했다. 신관들은 마족들이 던전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인간을 괴롭혀 부(不)의 감정을 얻기 위해서라면 앞뒤가 맞았으니까.

    놀랍게도, 그들의 맹신은 어느 정도 정답에 근접했다.

    “그럼, 저걸 보고도 같은 말을 하실 수 있을까?”

    에냐는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유피테르의 시선이 움직였다. 어차피 이곳으로 데려온 건 그녀였으니,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을 길잡이 삼는 게 좋았다.

    카테리나가 아픈 지금 한시가 급했다.

    “대체 저건…?”

    손가락 끝을 따라간 유피테르는 표정을 굳혔다.

    그곳에는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이 굴러다녔다. 물론, 멀쩡한 시체도 아니었다. 뼈가 조각조각 나서 원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뼈의 크기로 볼 때 인간뿐 아니라 몬스터들도 이곳에서 죽어간 것 같았다.

    던전에서 죽어간 마법사들은 늘 존재해왔다. 그러나 저런 식의 무덤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던전은 죽은 이들의 마나를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체와 피는 없어져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던전에서 실종되면 죽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에냐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람 마법이 풀리며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당장이라도 구토할 정도로 역했다. 물론, 유피테르는 아티팩트를 바로 사용해 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바람 마법은 단순히 냄새만을 막고 있던 게 아니었다. 마법을 해제하자 던전 벽 곳곳에 새겨진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려.줘.

    레아 님이시여 인간을 버리지 말아 주소서

    어째서 악마들이 이곳에 있는가. 신은 죽었는가.

    전능하신 레아 님시여 나에게 힘을….

    대부분이 살려달라는 내용들과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저주로 가득했다. 한 번쯤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가뿐히 넘겼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글귀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마법진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도 공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마법진을 사용했다. 아티팩트를 만들거나 할 때는 마법진이 꼭 필요했다. 단순히 마나만 가지고서는 마법을 새겨넣을 수 없었다.

    저건 분명히 고대의 마법진이었다.

    유피테르와 칼리스토를 제외한다면 고대 마법진을 저렇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들은 극히 소수였다.

    대륙 전쟁은 인간들에게 가장 소중한 고대 마법을 빼앗아갔다.

    “단순한 던전이 아니군. 무언가를 실험한 것만 같은…. 설마?”

    “역시 마스터는 똑똑하다니까. 마스터가 본 마인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실험의 완전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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