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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29화 (129/265)
  • 흔들리는 성국(1)

    * * *

    델포이 아카데미와 신성 기관의 경기는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다.

    성녀가 엄청난 마법을 선보이며 영상 크리스탈을 깬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물론, 압도적인 마나에 영상 크리스탈이 깨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크리스탈 자체에 보호 마법이 걸려있다고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아니, 대체 경기 준비를 어떻게 하길래 화면이 안 보여!]

    [내 돈! 내 돈! 이 사기꾼 놈들아! 경기 조작하냐!]

    경기의 피날레를 장식할 프레이야와 카테리나의 전투가 보이지 않자 관중들은 화를 냈다.

    [잘 안 보이셔서, 걱정하고 계시는 관중분들이 계시죠? 걱정 마십시오. 이 크리스탈은 신성 기관이 직접 공수해온 물품으로…. 안 되잖아?]

    중계를 맡은 신관은 관중들을 달래기 위해 크리스탈과 관련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딱히 누가 시킨 게 아닌데도 시간을 끌었다. 그는 뼛속까지 성국을 사랑하는 신관이었다. 성국과 신성 기관의 힘을 신뢰했다.

    시간만 끌면 곧 화면이 복구될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성국은 이번 교류전에 자원을 아끼지 않고 투자했다. 비난을 무릅쓰고 성녀를 아카데미생으로 넣은 것은 애교에 불과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 구석구석에 승리를 위한 장치들이 즐비했다.

    성국의 아카데미가 계속해서 2위를 기록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창조신 레아에 대한 모욕과도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경기 시간이 끝나고도 선수들은 경기장에 복귀하지 않았다.

    심판들은 환상 결계에 문제가 생겼는지 기술팀에 확인을 요청했다. 그리고서 직접 결계를 펼친 외딴 섬으로 향했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아티팩트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 쓰러져 있습니다!”

    환상 결계 속에 들어간 심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웃되었던 제레미와 얼어붙었던 신관 형제를 제외한 모두가 기절한 상태였다. 분명, 상황을 주도하는 듯 보였던 성녀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심장에 단도가 꽂힌 채 연약한 숨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뭐해, 빨리 성녀님을 고위 신관에게 모셔다드려!”

    “나머지 아카데미생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할 수 있잖아? 치유의 다섯 가지 원칙 안 배웠어? 너 정말 신관 맞아?”

    “죄, 죄송합니다!”

    심판들의 대처는 괜찮은 편이었다.

    부상자들을 빠르게 대피시키고 신성 기관의 승리를 결정지었다. 돌발 사건과는 별개로 거점 스코어는 확실히 신성 기관이 우위였다.

    최종 스코어는 4:1이었다.

    후방에서 남아있던 바니토가 중앙 거점을 재점령했기 때문이었다. 스피이이긴 했지만, 나름 성녀의 오더를 따라주긴 했다.

    “대체 경기 운영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번 교류전은 실망뿐이네.”

    “그 마족처럼 보이는 것부터 너무 엉성한데. 이 섬 안전하기는 한 거야?”

    “어이. 뭘 기다려 티켓값은 돌려준대. 그냥 돌아가자고.”

    델포이에서 이뤄졌던 작년 교류전과 비교되는 운영에 관중들은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것과 실상은 달랐다.

    그야말로 모래성 같았다.

    그나마 문제가 발생했던 경기의 입장권을 모두 환불해 주었기에 잠잠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목숨이 먼저였다.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얼굴을 들이미는 취미는 없었다.

    [성녀 프레이야 자격을 잃다?]

    [성국의 결계 이제는 안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자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했다. 늘 기자들을 억압했던 성국에 복수하기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기사나 작은 일을 더 과장해서 표현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 * *

    성국 교황청 교황의 방.

    교황, 유피테르, 오흐트 그리고 카테리나까지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원래는 프레이야에게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심장에 꽂힌 단도가 무슨 수를 써도 빠지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론, 당시의 상황은 카테리나에게 들었다.

    그러나 성국의 입장도 한번 알아보고 싶었다. 단순히 실수라고 하기에는 적 의도가 너무 명확했다.

    미지의 적은 성국 자체를 흔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설마 이번에도 애매하게 넘어가지는 않겠지?”

    유피테르는 더는 참지 못했다.

    애초에 그가 아카데미 교류전에 참여한 건 교수로서의 마지막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별 교수였기에 언제라도 델포이를 떠나는 게 가능했다. 교수직을 유지한 채, 외부 임무를 담당할 수도 있었다.

    또, 카테리나의 성장까지 확인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시트시거가 마왕의 심장을 포기할 리 없었다. 마족에게 있어 이 아티팩트는 성배와 같은 위치였다. 이걸 돌려받기 위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곁에서 카테리나를 지켜줄 수는 없었다. 소중한 가족이었지만, ‘그녀’가 먼저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카테리나 스스로 벽을 깰 수밖에 없었다. 세컨드 서클은 아니더라도 마왕의 심장을 이용할 줄 알아야 했다. 최소한의 힘을 지녀야만 마족의 손아귀로부터 안전할 테니.

    교류전 이후, 유피테르는 ‘그녀’를 구하기 위한 열쇠들을 찾으러 갈 예정이었다.

    “라엘. 마스터에게 제대로 대답해 안 그러면….”

    오흐트는 어물쩍 대답을 피하려고 하는 교황을 노려보았다.

    “이거이거… 오흐트 님까지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늙은 신의 종이 한번 나서야겠군요.”

    “나보다 마스터가 더 윗사람이라고. 그건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라엘?”

    오흐트는 조용히 미소를 짓는 교황을 압박했다.

    칼리스토 자매들이나 델포이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진지한 오흐트의 표정에서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한마디 한마디가 찬란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대체 애들을 어떻게 교육시킨 거야.’

    이번 대 교황은 저게 문제였다.

    창조신 레아에 대한 신앙심도 높았고, 신성 마법도 누구보다 잘 사용했다.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서 성국의 위치를 몇 단계나 끌어올린 것도 사실이었다. 평화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대항할 힘도 키웠다.

    하지만, 마스터 유피테르를 너무 막 대했다. 마스터가 웃으며 넘겨줬으니 망정이지, 옛날의 자신이었다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라엘이라고 부르다니…. 오흐트 당신은 대체?’

    카테리나만 이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흐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치유 마법만 봐도 알았다. 하지만, 교황을 하대할 정도라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범인은 바니토가 맞긴 한 거야?”

    유피테르는 혼란스러워하는 여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눈치 빠른 카테리나는 아직 끼어들 때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입을 다물었다.

    “바니토라… 사실 그 친구는 나도 잘 모른다네. 스카라는 추기경이 추천해주었기에 명단에 넣었을 뿐이네.”

    “네가 성국의 총책임자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유피테르는 교황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성국이 다른 제국과는 다르게 특이한 형태의 국가라는 건 이해했다. 책으로도 봤었고 ‘그녀’가 직접 설명해줬었다.

    그럼에도 교황이 지니고 있는 힘은 막강했다. 황제와 비교할 수는 없었으나, 신탁을 받아본 교황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뒤에서는 무시한다고 해도, 앞에서는 모두 교황의 말을 따랐다.

    “정말일세. 교류전은 어디까지나 신성 기관이 개최자네. 성녀의 일도 바니토의 일도 모두 내 손을 떠난 일이지. 오히려 자네의 여동생에게 묻는 게 맞지 않을까 싶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교황은 천천히 카테리나를 바라보았다.

    “저, 저요?”

    갑작스럽게 시선이 모이자 카테리나는 떨었다. 제아무리 긴장하지 않는 그녀라도 상황이 묘했다. 교황을 존경하지는 않았으나, 이토록 신성한 아우라는 처음이었다.

    “그 바니토라는 선수가 프레이야 언, 아니 성녀 님의 심장을 찔렀어요. 완전한 기습에 성녀님도 아무것도 하시지 못했습니다. 그게 제 마지막 기억입니다.”

    카테리나가 이곳에 불려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성녀와의 마지막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영상 크리스탈에도 기록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카테리나뿐이었다.

    “어린 마법사여,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지금 마스터의 여동생을 협박하는 거야?”

    카테리나를 바라보는 교황의 태도는 의미심장했다. 그걸 본 오흐트가 한발 먼저 의심의 싹을 끊어냈다. 아스라엘에게는 마스터보다는 그녀의 말이 더 잘 통했으니.

    애초에 오흐트는 교황 앞에 카테리나를 데려가는 걸 반대했다. 마왕의 심장을 들킬 가능성도 있었다. 또, 아스라엘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딱히, 겉으로 드러나는 건 없었으나 그냥 싫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이 늙은 신의 종이 사과함세. 나이가 들으니 의심만 많아졌다네. 혹시 그밖에 떠오르는 건 없는가?”

    교황의 말에 카테리나는 미리 준비되었던 말을 꺼냈다.

    마왕의 심장의 힘을 빌렸던 카테리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면 의심의 화살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평범한 아카데미생이라면 마족의 마나만 보아도 기절할 테니.

    “라플라스. 그 마족은 자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레아 님이시여. 정녕 인간을 버리시는 겁니까. 하필, 라플라스입니까.”

    라플라스라는 말에 교황은 안경을 벗어 두고서 눈을 비볐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마족 공작들이 자유롭게 활개를 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라플라스는 나태의 공작이야.”

    그 이름에 담긴 무거움을 설명해준 건 오흐트였다.

    평범한 마법사는 마족 공작이 있다는 것만 알 뿐, 세세한 이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어쭙잖게 정보를 풀어서 묘한 이미지를 부풀리지 않으려고 성국이 노력한 결과였다.

    과거처럼 마족과 손을 잡는다면 그날이야말로 종말이 날이 될 테니까.

    “그렇군요. 또 마족인가요. 최근에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은데요.”

    카테리나는 오흐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티폰교라는 것도 나태의 공작이 준비한 걸 수도 있겠군. 혹시 추기경이나 신성 기관의 교수들 중 이상한 행동을 보인 자들이 있었어?”

    너무 침착하게 대응하는 여동생을 보며 유피테르가 물었다.

    달의 몰락 사건과 연관되어 있어 마족이 처음이 아니라고 해도 저런 반응은 의심받을 수 있었다. 아스라엘이 안경을 벗고 눈을 감고 있던 게 다행이었다.

    “집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네.”

    “그럼 방법은 하나밖에 없나. 이쪽에서 함정을 쳐야지. 멈춰있는 교류전을 속행해”

    “그들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감도 오지 않는 상황일세. 너무 위험한 방법이야. 아카데미생들과 일반인들이 다칠 수 있네.”

    교황에게는 남은 카드가 없었다. 달의 몰락 이후로 추기경들은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소리를 높였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서로 간 파벌을 만들어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권 쟁탈.

    레아의 말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싸우는 모습에 아스라엘은 신물이 났다. 어린 신관 시절부터 꿈꿔왔던 최고위 신관들의 모습을 알게 되니 실망도 컸다.

    그런 모습이 보기 싫어서 기도실에 있거나, 성녀의 여동생을 치료하는 것에 전념했다.

    “이단 심문관들은 대체 뭘 하고 있어?”

    오흐트가 교황에게 물었다.

    “이단 심문관들 역시 이상하네. 유피테르 아니. 대행자를 데려간 것만 해도 그렇지 않나.”

    “대체 라플라스는 성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정말로 의심 가는 사람 없어? 아주 작은 단서라도 마스터께 주면 해결해 준다고.”

    당당히 마스터를 자랑하는 오흐트를 보며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었다.

    ‘난 뭐든 일이나 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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