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28화 (128/265)
  • 크레이타의 마인(9)

    * * *

    꽈아아아악.

    프레이야는 성검 오를레앙을 세게 쥐었다.

    온 힘을 다해 성검을 잡았는데도 손이 아프지 않았다. 평범한 검사들이 검을 쓸 때 손이 붉게 물드는 것과 달랐다. 심지어, 무게감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깃털을 잡은 것처럼 가벼웠다.

    이게 그녀가 성검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였다.

    성검은 마족과 같은 창조신의 적에게는 그 무엇보다 두려운 무기였다. 창조신이 직접 만들고 가호를 내린 아티팩트는 믿을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다. 단순한 에고 소드로 취급할 수 없었다.

    성검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누구라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이라도 마족을 무찌를 용사로 진화할 수 있었다.

    처억ㅡ.

    프레이야는 성검을 머리 위로 올려 하늘을 겨눴다. 만약, 제대로 영상이 전해졌다면 평신도들이 감동할 모습이었다. 표정부터 검을 든 자세까지 나무랄 곳 하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마나들조차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고서 숨을 죽였다.

    그야말로 조용히 신의 답을 기다리는 신관의 모습이었다.

    프레이야 식 빛 마법 ― 성스러운 심판

    우우우우우웅ㅡ.

    프레이야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마나를 뿜어냈다. 혼자만의 힘으로 환상 결계 내 마나의 흐름을 바꿔내었다. 왜 그녀가 퍼스트 서클 마법사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지를 증명했다.

    [레이야. 네 소원을 들어주도록 할게.]

    성검 역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주었다.

    투명한 검신에서 은은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성녀의 마력에 못지않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 힘은 파괴적인 성질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근하게 덮어줄 따듯함을 지니고 있었다.

    성녀와 성검.

    두 개의 마나가 겹쳐지자 세계에 새로운 색이 덧씌워졌다.

    퍼엉, 펑, 펑ㅡ.

    경기를 찍고 있던 크리스탈들이 하나, 둘 터져나갔다. 인간이 만든 영상 아티팩트는 두 마나의 공명을 견뎌내지 못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요!]

    갑작스럽게 영상이 끊어지자 중계를 맡은 신관이 호들갑을 떨었다.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관객 여러분들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성검과 함께하는 신성 마법. 이것이야말로 신관들의 목표입니다!]

    신성 기관의 편을 들며 해설하던 리스 신관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직히 성녀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애들 장난에 어른이 낀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신성 기관은 그녀를 필요로 했다. 그래야만 작년의 처참한 패배를 갚아줄 수 있었다.

    리스 신관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패배의 쓴잔을 마시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델포이 아카데미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러나 리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유피테르는 빙긋 웃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리스는 유피테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교류전에서 한 경기를 패하는 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성 기관이나 델포이와 같은 상위권 팀들은 승점 관리에 목숨을 걸었다. 실제로, 단 몇 포인트 차로 종합 1위를 얻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경우의 수를 따지기 싫으면 이길 수 있는 경기는 확실히 잡아야만 했다.

    ‘레이야. 역시 네가 리나의 가장 좋은 상대가 되어 주겠군. 혼자서 조화 마법을 완성시킬 줄이야.’

    유피테르는 해설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카테리나가 성녀에게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왕의 심장이 폭주하는 게 아니라면 그럴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게다가 성국의 결계 때문에 마왕의 마나도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녀를 상대하는 것은 카테리나에게 좋은 경험이 돼줄 게 분명했다. 카테리나가 엄청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본인은 몰랐지만, 여동생의 재능은 점점 빛이 바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델포이 아카데미가 뛰어나다고 해도 벽을 부수기에는 부족했다. 애초에 퍼스트 서클들이 모여봤자, 세컨드 서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프레이야에게는 고마울 뿐이었다. 지금 여동생에게 가장 필요한 라이벌이 돼줄 수 있었으니까. 왜 교류전에 참여했는지 몰랐지만, 진심으로 카테리나와 붙어주기를 원했다.

    유피테르는 카테리나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줄 수는 있었으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마왕의 심장. 진짜로 도와주지 않을 거야? 저쪽은 성녀와 성검이라고. 한 번 정도는 눈을 감아줄 수 있잖아.’

    유피테르의 생각이 옳았다.

    카테리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성녀가 만들어낸 마나의 폭풍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태프를 잡았다.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마나를 불어넣었다. 단 몇 번의 공방이었지만, 에키드나와도 싸워본 적 있는 그녀였다.

    상처투성이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마나와 집중력은 충분했다.

    “경기 끝나고 보자. 바이바이. 카리나.”

    프레이야는 완성된 마법의 범위를 서서히 넓혔다. 성스러운 심판은 다른 마법과는 다른 방향을 지니고 있었다. 상대방을 공격해서 부수는 게 아니었다. 상대방을 마법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회개하도록 만들었다.

    어찌 보면 고유 결계와 비슷한 마법이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언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고 싶지는 않았다.

    두근.

    마왕의 심장이 카테리나가 가진 불굴의 의자에 응답했다. 마왕 티폰이 지니고 있던 승리에 대한 집착이 깨어났다. 그러자 카테리나의 아름다운 은색 눈동자가 어둠에 잠겼다.

    프레이야 식 특제 마법 ― 얼음 용의 꿈

    남색, 아니 이제는 검은색에 더욱 가까워진 그녀의 마나가 거대한 용을 만들어냈다. 대표 선발전에서 보여줬던 용과는 기세가 달랐다.

    선발전의 용이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용은 위험해 보였다.

    얼음의 용은 카테리나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울부짖지도 않았는데 대기가 공포에 떨었다.

    “저게 무슨…?”

    성검의 도움을 받아 마법을 유지하던 프레이야는 예상외의 사태에 놀랐다. 카테리나의 마나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강화 합숙 때 지겹도록 싸워봤었으니까.

    그러나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마법을 짜낸다는 건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마나를 제어해야 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마법은 언제든 마법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이미지를 세계의 구현할 수 있는 힘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뒤집힐 수 있었다.

    마법사가 세계를 바꿀 때, 세계도 마법사를 바꿨으니까.

    쿠오오오오.

    얼음의 용이 입을 벌려 브레스를 쏘아냈다. 거무튀튀한 기운이 곧바로 성녀를 노리고 날아왔다.

    그러나 용의 공격은 성녀에게 닿지 않았다. 성검의 힘으로 펼쳐낸 심판은 원래 마족을 단죄하기 위한 마법이었다. 고작 아카데미생에게 뚫린다면 성검이라는 칭호가 울었다.

    ‘잠깐만. 저 마나 묘하게 익숙한데. 설마, 그럴 리 없어. 쟤는 그냥 아카데미생일 뿐이라고. 더구나 유피테르의 동생인데.’

    프레이야는 얼음의 용을 보며 무언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마족.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싫은 마족의 마나가 카테리나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저어보아도 진실은 변하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먼저 필요한 조치를 했을 게 분명했다. 그 역시 누구보다 마족을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유피테르에게 있어 목숨보다 소중한 ‘그녀’를 잃게 된 원인이었으니까.

    바로 그 순간.

    푸욱ㅡ.

    프레이야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어, 어째서? 넌 다른 거점을 점령하고 있어야….”

    “성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수 있다고 경고한 건 당신이잖아?”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신성 기관의 마지막 선수, 바니토가 갑작스레 등장했다. 바니토는 성녀의 뒤에서 작은 단도를 들고 있었다. 자그마한 무기는 프레이야의 심장을 정확히 찌르고 있었다.

    털썩.

    순식간에 심장을 찔린 프레이야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기습 공격에 더는 마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황무지가 되어버린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다.

    “커흑….”

    프레이야는 피를 토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온몸에서 마나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니토는 그런 성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 비장의 무기의 맛이? 꽤나 충격적일 거야.”

    바니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쓰러진 프레이야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은 신성 기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성녀를 그런 식으로 대할 신도들은 없었다.

    “넌 대체 누구지?”

    “나는 언제나 바니토였다고. 성녀님. 뭐, 앞으로는 조금 달라지지도 모르지만.”

    프레이야는 격통에 시달리면서도 심장에 꽂힌 단도를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쉽게 빠지지 않았다. 분명 손에 잡히는 데 도저히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나마저 사용할 수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워워. 진정하라고 성녀 프레이야. 그 단도를 뽑으면 자네는 더는 성녀가 아니게 될 테니 조심해야 할걸?”

    프레이야를 보며 바니토가 크게 웃었다.

    늘 눈엣가시였던 성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은 너무나 통쾌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 짜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성녀가 쓰러졌다는 것에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거였다.

    이 모순적인 감정을 그는 제일 좋아했다. 게다가 이 기억이 진짜가 아니라는 게 더욱 유쾌했다.

    “그…게, 무슨 소리…?”

    “많이 아픈가 봐. 뭐 마지막 선물이니 설명해줄게.”

    바니토는 마치 대단한 선물이라도 주듯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단도에는 마왕의 마나가 들어있어. 마왕은 성검과 유사한 마법을 사용해. 음, 서로 다른 방향인데 같은 속도로 걸어간다고나 할까.”

    “닥치고…. 요점만, 요점만 말해.”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프레이야는 성녀의 의무를 다했다. 마족에 관련된 거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알아낼 거였다. 그 결과, 성녀의 칭호를 잃게 되어버려도 상관없었다.

    창조신 레아를 믿는 건 성검이 시켜서 그런 게 아니었다.

    “우와. 대단한 정신력이야.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미 마인이 되어버렸을 텐데.”

    그런 성녀를 보며 바니토는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정신력이었다. 이걸 맞은 평범한 인간들은 모두 한 가지 감정에 지배당해 마인으로 변했다. 성녀가 성검의 가호를 받고, 특출난 마나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일이었다.

    성녀라고 해도 고작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설마 바니토 네가….”

    그제야 프레이야는 바니토의 진정한 신분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성녀 역시 성국을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였다. 게다가 유피테르와 친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래. 내가 바로 이 세상을 뒤집어버릴 악마. 라플라스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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