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27화 (127/265)

크레이타의 마인(8)

* * *

쑥대밭이 되어버린 숲과는 다르게 두 마법사는 멀쩡했다.

“그때 보여준 게 전부는 아니었구나? 이런 깜찍한 방법은 분명 유피테르가 알려준 방법이겠네. 완전 같은 스타일이야.”

“언니야말로 아직 성검을 꺼내시지 않으셨잖아요?”

환상 결계를 뒤흔든 마법을 보여줬음에도, 두 사람 모두 진심을 내보인 건 아니었다. 그저 반가운 얼굴을 보았기에 인사를 했을 뿐.

이건 탐색전의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맥없이 포기하는 건 델포이는 물론 아르테미스의 정신도 아니지.’

성녀는 현재 카테리나의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래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라버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마왕의 심장이라는 조커도 있었다.

탁ㅡ.

카테리나는 목걸이 형태로 잠들어 있는 카드세우스를 뜯어냈다. 남색의 마나를 불어넣자, 펜던트는 순식간에 아름다운 스태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게 고대 아티팩트 카드세우스의 원래 모습이었다.

카테리나는 스태프를 양손으로 잡고 프레이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제라도 적의 마법을 맞받아칠 수 있는 유연한 자세였다.

“이기고 싶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프레이야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이겨야 할 이유는 많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크레이타는 깨끗한 곳이 아니었다. 성녀가 된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조금 분할 정도로.

프레이야는 허공으로 오른손을 쭈욱 뻗었다.

우우웅ㅡ.

그러자 손끝이 닿아있는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성검 오를레앙이 쉬고 있는 아공간이었다. 성검이 만들어 준 아공간은 크기 제한까지 없어,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성검을 노리는 자들의 눈을 피하기엔 이곳이 안성맞춤이었다. 아공간 속에서라면 성검은 자가 수복까지 가능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열 수도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들고 다니지 않아서 편했다.

평범한 마법사들은 아공간을 갖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고대와 다르게 현재의 마법사들은 아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새로운 마법 체계는 범용성이 좋지 않았다. 아티팩트에 의존해야만 아공간을 열고 닫을 수 있었다.

당연히 아공간 아티팩트의 가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스르륵.

성검 오를레앙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검신은 물보다 더 투명했고, 적당한 두께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작 하나에 특화되지 않고, 베기나 찌르기 모두 가능해 보였다. 레이피어와 비슷하게 생겨 부러질 것만 같이 얇다는 소문과는 완전히 달랐다.

검 손잡이 부분은 어떤 그립도 소화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 정방향이든 역방향이든, 그것도 아니면 양손으로 잡는 것까지 문제없어 보였다.

날렵한 매를 닮은 성검은 처음부터 프레이야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이 잘 어울렸다.

“그게 성검이군요?”

성검이 내뿜는 신성함에 카테리나는 숨을 삼켰다.

역사서나 스카우트 리포트를 통해 성검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성검을 보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창조신 레아가 손수 만들었다는 성검의 소문은 진짜인 듯했다.

지금껏 만나왔던 어떠한 아티팩트와도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프레이야 식 빛 마법 – 광참(光斬)

프레이야는 대답 대신 마법을 날렸다.

가볍게 오를레앙을 휘두른 것뿐인데 어마어마한 참격이 만들어졌다. 참격은 자비 없이 카테리나를 공격했다.

콰앙ㅡ.

단 한 번의 참격에 숲이 사막이 되었다.

“이런 건 반칙이잖아.”

카테리나는 몸을 날려 가까스로 참격을 피해내고서 중얼거렸다.

막아낼 시간 따위 없었다.

보자마자 옆으로 구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아웃될 정도의 위력이었다. 결계 시스템을 가뿐히 무시하고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계가 보호해줄 수 있는 데미지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테니.

성녀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 카테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있었던 곳이 황무지로 변한 게 보였다. 방금까지 그녀가 밟고 있었던 땅에 초록빛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밋밋한 흙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마워 아리아.’

대표 선발전의 기억은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리아의 검마법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반응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아리아가 보여준 새로운 경지는 검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검사 역시 원거리에서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레이야 언니. 대체 왜 하필 교류전에 참가한 거예요!”

“….”

카테리나의 물음에도 프레이야는 묵묵부답이었다. 감정을 지워버린 성녀의 눈동자는 적을 바라보는 것같이 차가웠다. 성녀는 오를레앙에 마나를 불어넣으며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성녀의 도움을 바라는 곳은 충분히 많다구요.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말을 해보세요!”

카테리나는 성녀의 태도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레이야가 교류전에 참여해서 얻을 이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교류전에 성녀가 나온다는 뜬 소문을 믿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출전하게 된다면, 교수들을 대표할 게 분명했다.

“모든 일을 알려고 하지 말렴. 세상에는 알면 다치는 진실들도 있단다 카리나.”

오를레앙을 꺼낸 이후 처음으로 프레이야의 입이 열렸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프레이야 식 빛 마법 – 광참(光斬)

‘같은 수법은 두 번은 통하지 않아요!’

방금 전과 완전히 같은 상황.

완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프레이야의 행동에 카테리나는 웃었다.

여전히 참격의 속도를 눈으로 따라갈 수는 없었다. 아리아와 비슷한 방식의 공격이었을 뿐, 속도, 위력 등 그 무엇도 같은 게 없었다. 성녀는 검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검을 든 ‘마법사’였다.

약 몇 초 뒤에 도달한 공격은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카테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유피테르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마법사끼리의 전투에서 늘 기본이 되는 건 마나 감지라는 걸 잊지 마.”

수업을 진행하면 할수록 오라버니의 경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사라졌던 시간 동안 뭘 경험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카테리나는 온 힘을 다해 성녀의 마나를 감지했다. 도착할 지점만 알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자신감도 없었으면 애초에 성녀와 싸우지 않았다. 미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딪쳐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지금이었다.

‘여기다!’

마나 감지로 카테리나는 프레이야가 노리는 곳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배였다. 베테랑다운 생각이었다. 급소 중 하나인 명치를 제대로 공격하면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송환될 테니까.

단 몇 초 동안 생각을 정리한 카테리나는 이번에는 왼쪽으로 피했다. 이 공격을 피해 없이 받아내면 다음은 그녀의 턴 이였다.

하지만, 성녀는 카테리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마법사였다.

성녀가 만들어 낸 참격은 카테리나의 바로 앞에서 순식간에 5개로 늘어났다. 카테리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각기 다른 방향을 노리는 참격들 중의 하나가 카테리나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참격에 베이자마자, 그 안에 담긴 마나가 폭발했다. 그 바람에 카테리나는 멀리 날아가 땅에서 몇 번이나 굴렀다.

“어째서, 분명 아까와 똑같은 마법이었는데….”

두 번의 마법은 분명 마나의 양과 흐름이 같았다. 카테리나의 마나 감지는 분명 그렇게 말해주었다. 당연히 같은 방식의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판단 때문에 마법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성장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히려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었다.

프레이야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카테리나를 보며 교황청과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평소처럼 임무를 마치고 쉬려는 그녀를 교황청이 불렀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어서 가벼운 기분으로 교황청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바쁘다며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교황청의 대표는 성국을 이끄는 교황이었지만, 그 밑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추기경이 있었다. 모두 창조신 레아를 받는 건 같았지만, 그 방법에 따라 다양한 파벌로 나뉘었다. 파벌들은 늘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런 파벌들의 수뇌들이 자신을 기다리자 프레이야는 쎄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얼굴을 보기도 힘든 노인네들이 왜 다 여기에 모여있어.”

“성녀여. 신탁이 내려왔다. 이번 교류전을 승리하지 못하면 창조신님께서 슬퍼하실 것이다.”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신성 기관 애들이 못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런 이야기면 난 돌아가서 씻고 잘 거야, 피곤한 사람 붙잡고 그딴 이야기나 할래?”

프레이야는 임무에 지친 상태에서 헛소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신성 기관의 유소년부 출신이긴 했으나,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현역으로 이름을 날린 마법사가 아카데미생으로 돌아가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자네에게는 여동생이 있지 않나.”

뒤를 돌아 그대로 교황청을 나가려는 프레이야의 발을 붙든 건 한 추기경의 말이었다.

“프릴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우리는 창조신을 모시는 신의 종인데. 감히 성녀의 여동생에게 무엇을 할 리가 있나?”

어깨를 으쓱이는 그 추기경의 이름은 스카였다. 아무도 본명은 몰랐지만, 한 눈이 상처로 찢어져 있어 다들 그렇게 불렀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아닐세. 약간의 거래를 하자는 것이지. 자네의 여동생의 병은 성검으로도 전부 고치지 못했다고 들었네.”

성녀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아프다는 건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다. 교황이나 치료사들만 알고 있는 걸 스카가 알 리 없었다. 저 능구렁이는 건수를 잡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교황 할아버지가 시간 날 때마다 프릴을 돌봐주고 계셔. 그 이상의 치료법은 레아 님이나 가능하다고 신탁까지 받았어.”

“글쎄? 여동생이 나을 수 있을지는 자네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네.”

“웃기지 마. 넌 고작 추기경에 불과해. 교황이나 성녀가 못 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어!”

능구렁이 같은 속삭임에도 프레이야는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스카가 내민 조건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래서 계약을 맺고 어쩔 수 없이 교류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에이프릴을 위해서라면 못할 건 없었다.

철푸덕.

그 소리에 프레이야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카테리나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계속해서 넘어졌다. 아름다운 지팡이를 지지대로 삼아도 제대로 서지 못했다.

“힘들어 보이네. 곧 쉬게 해줄 테니 기다려.”

어차피 나를 꺾어도 이 경기는 신성 기관의 승리로 정해져 있으니까.

이 말을 굳이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카테리나에게 절망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흔하지 않은 유망주로서 빛을 잃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어른들의 더러운 사정에 관계되어서 좋을 것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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