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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23화 (123/265)
  • 크레이타의 마인(4)

    * * *

    의미심장한 아스라엘의 말을 뒤로하고 유피테르는 숙소에 도착했다.

    성국이 제공한 방의 이미지가 명확했기에 공간 이동을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방에는 유피테르의 마나를 감지한 오흐트가 한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마스터구나. 몸은 어때 좀 괜찮아?”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예상과는 달랐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야.”

    오흐트는 유피테르를 보자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 떨어져 있던 것뿐인데도 유피테르의 얼굴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슈우웅ㅡ.

    그 바람에 손에 있던 포크가 유피테르에게로 날아왔다. 그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포크를 가볍게 피했다.

    퍽ㅡ.

    평범한 포크인데도 성국이 직접 설계한 결계를 뚫고 벽에 박혔다.

    항상 치유사로 활동했던 오흐트 역시 칼리스토의 일원이었다. 후방 지원 역할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힘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칼리스토란 인류는 물론 마족도 초월한 존재들이었다.

    “성국에서 용케 이런 걸 허락했다?”

    유피테르는 벽에서 포크를 뽑아냈다.

    가벼웠던 소리와 다르게 빼내는 데 꽤 힘이 들었다. 결계 마법 자체가 부서진 건 아니었는지 선명했던 포크 자국은 금세 지워졌다.

    “아, 이건 축제에서 사온 거야 카리나랑 리오나랑 같이 축제를 돌았거든. 되게 신기한 음식들이 많더라?”

    오흐트의 오른손에는 딸기 쇼트케이크 접시가 있었다… 생크림과 딸기의 조화가 환상적인지 멀리서도 달콤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오흐트는 딸기 쇼트 케이크를 한입에 털어넣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오물거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축제에 있는 음식을 거의 다 사왔는지 유피테르의 방은 온갖 음식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들도 많았다. 아마, 다른 국가의 음식인 듯했다.

    “여기 내 방이라는 거 알고는 있지?”

    “그치만, 마스터의 방이 더 좋은걸. 아카데미생 숙소는 답답하단 말이야.”

    칼리스토의 저택과는 다른 크기에 오흐트는 불만을 터트렸다. 어쩌다 보니 선발 멤버가 되었지만, 그 이후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류전에 참여하자마자, 너무나도 많은 제약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항상 자유분방한 삶을 살던 오흐트는 그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딱히 별일은 없었나보군.’

    유피테르는 평소와 다름없는 오흐트에 태도에 안심했다.

    자신이 빠진 사이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인이 더 나타나지 않은 건 알았지만, 교류전의 결과도 충분히 중요했다. 델포이 아카데미의 선발 멤버들의 실력은 출중했으나, 만에 하나라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신성 기관은 성녀를 데려올 정도로 칼을 갈았고, 천검 학원 쪽도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피테르가 이탈한 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설마, 라엘 걔가 또 사고 쳤어? 너무 늦게 온 거 같은데.”

    한참 동안 사온 음식을 해치우던 오흐트가 입을 열었다.

    잠깐, 치유사로서 유피테르의 몸을 살펴보니 있어서는 안 될 것이 보였다. 바로, 교황의 마나였다. 유피테르가 단순히 조사만 받고 왔다면 교황까지 만날 리 없었다.

    “잠시 고문 좀 풀코스로 받고 왔어. 마족과 내통했냐고 물어보던데?”

    “아니 마족의 마나를 쓴 건 그 알피인가 뭔가 하는 파르테논 아카데미 교수였잖아. 멀리서 봐도 확실히 보이던데.”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피테르가 피해자라는 사실은 관중석에서도 훤히 보였다. 영상 크리스탈 너머였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유피테르가 마족의 마나를 쓴 교수에게 공격당한 건 확실했다.

    유피테르가 이단 심문관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오흐트는 별생각이 없었다.

    늘 마스터는 한 수 앞을 읽고서 움직였으니까. 거기에 확실한 증거까지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해도 아스라엘이나 프레이야가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라엘이 바로 막아주지 않은 거야? 이거 안 되겠어. 한 번 기강을 잡고 와야겠어.”

    디저트까지 먹어치운 오흐트는 한 박자 늦게 화를 냈다.

    감히, 교황 주제에 마스터를 내버려 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황 아스라엘이 성국 최고위 인물이라는 것 따위는 상관없었다. 칼리스토의 일원이 아니라도, 그녀에게는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신앙심이 높다고 하더라도, 아스라엘은 고작 인간에 불과했다.

    “진정해. 오흐트. 지금 확인해봐야 하는 건 오히려 페르세포네야.”

    오흐트가 폭발하려고 하자 유피테르는 아공간에서 찻잎과 찻주전자를 꺼냈다. 그러자 오흐트의 시선은 유피테르의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저…저건!’

    오흐트의 머릿속에서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차의 향기만 맴돌았다.

    저건 유피테르가 아끼던 물건이었다. 전 마스터와 같이 살았을 시간을 추억하고 싶을 때만 마시던 극상품이었다. 차로 유명한 데메테르 가문의 씨앗을 신성력으로 축복까지 한 희귀한 찻잎이었다.

    군침이 싹 돌았다.

    “축제를 즐기고 온 걸 보면, 지금은 휴식기인가?”

    유피테르가 오흐트의 기세가 잠잠해진 걸 확인하고 물었다. 교류전의 일정표를 외우고 있었으나 확신이 필요했다. 그가 감옥에 있던 사이에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성국에서 마족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졌다는 건 그만큼 큰일이었다.

    “으음….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잠시만 있어봐! 이럴 줄 알고 카리나에게 받은 게 있지.”

    오흐트는 오흐트였다.

    치유와 관련된 일이 있다면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오흐트는 아공간을 뒤적이더니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학생 회장이라 다양한 정보를 알았던 카테리나가 적어준 것이었다. 오흐트는 그걸 유피테르에게 넘겨주었다.

    “딱히. 바뀐 건 없네. 그나저나”

    메모지에는 별다른 말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먼저, 시라쿠스 섬의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약도 곳곳에는 동그라미 표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카테리나가 직접 알아낸 유명한 맛집들이었다. 그 밑으로는 델포이의 경기 일정표가 알기 쉽게 적혀 있었다.

    카테리나가 오흐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눈에 보였다.

    “그러면 장소를 옮기자. 이곳에서는 마음대로 차 하나 마실 수 없으니까.”

    “알았어. 그럼 저택으로 갈 거야?”

    “내일까지 축제를 즐길 수 있으니까 바로 타르타로스로 가자. 확인해보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오랜만에 트리아 언니를 만날 수 있겠네. 너무 좋다.”

    이야기를 끝낸 유피테르는 차와 찻주전자를 아공간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오흐트의 표정에 아쉬움이 서렸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더 큰 행복을 위해서 참아야만 했다.

    ‘아직 행동으로는 나서지 않는군. 설마, 마인이랑 관련되어 있나.’

    유피테르의 마나 감지에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한 명이 잡혔다.

    그가 숙소에 도착한 후로부터 열렬한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기척과 마나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케팔로스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예상은 갔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직, 이빨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달의 몰락이나 델포이의 사건처럼 끝 맛 나쁘게 일 처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무대 뒤에서 웃고 있는 설계자를 잡고 싶었다.

    “응? 무슨 일 있어 마스터? 역시 고문의 후유증이라도 남은 거야? 이걸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자, 얼른 차를 마시러 가자.”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 그를 보고서 오흐트가 물었다. 유피테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 보였다. 그가 웃자 오흐트 역시 따라 웃었다. 때로는 이런 단순함이 약이 되어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유피테르가 오흐트를 곁에 둔 이유였다.

    그 후, 유피테르는 오흐트를 데리고 숙소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를 감시하던 시선 역시 흔적을 감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 * *

    유피테르의 공간 이동은 언제나 완벽했다.

    타르타로스는 위치는 대륙 최남단인 성국과 정반대였다. 꽤 먼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중계 지점 없이 원하는 곳에 곧바로 도달했다. 그 흔한 게이트 멀미조차 없었다. 유피테르가 인간을 그만두었다는 증거였다.

    이곳은 트리아만의 작은 집이었다. 거대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타르타로스와 마주 보는 이 집을 아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역시 성실하다니까.’

    유피테르 일행이 도착했어도 트리아는 자료를 정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맡긴 임무를 잘 수행하는 트리아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샤삭.

    평소 장난기가 넘치는 오흐트는 트리아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신성 마법까지 사용해 기척을 숨길 만큼 진심이었다.

    “야호!”

    우당탕탕.

    오흐트의 기습에 트리아는 놀라서 자빠졌다. 생각지도 못한 방문에 트리아는 의자에서 자빠졌다. 그 바람에 문서들은 꽃잎처럼 휘날렸고, 잡고 있던 펜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아하하하. 오랜만이야 트리아 언니.”

    오흐트는 쓰러진 트리아를 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유피테르는 그런 트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트리아는 유피테르가 내민 손을 잡을지 고민했다. 신과 같은 마스터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칼리스토의 일원이었다. 마스터의 일을 분담해야만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어찌하여 신께서 직접 이곳에?’

    유피테르가 직접 이곳에 왔다는 건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트리아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원하시는 정보가 있다면 저를 부르시면 되십니다. 신께서 굳이 움직이시지 않으셔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페르세포네의 상태는 어때?”

    유피테르는 트리아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치고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족의 결계는 평소와 다름없습니다.”

    트리아는 유피테르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족을 가둔 신의 결계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뭔가 이변이 있었다면 곳곳에 배치해놓은 경보가 울렸을 것이다.

    “확실해?”

    유피테르가 같은 질문을 해온다는 건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게 아니라면, 트리아가 무언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신이시여. 확인해보겠습니다.”

    트리아는 페르세포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경보들을 꼼꼼히 체크했다.

    “어…?”

    방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트리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마법은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무슨 일이지? 결계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그런 건 아닙니다. 페르세포네 쪽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애초에 신의 결계는 완벽하기에 보수도 필요없는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결계 쪽에 문제가 없다면, 타르타로스에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맞습니다.”

    애매하게 말하는 트리아의 말에 유피테르는 답답했다. 칼리스토 자매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 처리를 하는 게 그녀였다. 이런 식으로 빙 돌려서 말하는 건 그녀답지 않았다.

    그런 유피테르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트리아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타르타로스 안에서 느껴지는 마족 공작들의 마나가 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감지되는 마나가 줄었다는 건. 공작의 절반 이상이 저곳에 없다는 거야? 그게 어떻게 가능해? 결계에는 이상이 없다며!”

    트리아에 말에 대답한 건 오흐트였다.

    그녀는 유피테르가 준비해주는 차를 즐기러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오자 기겁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오흐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게 바로 마족이었다.

    평범한 하급 마족도 아니고 공작 급의 마족이 반이나 사라졌다는 건 세 번째 대륙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인류는 멸망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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