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타의 마인(3)
* * *
유피테르의 말에 지하 감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교황과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명백한 실수였다. 아무리 마족 내통죄 혐의가 걸려 있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심지어, 교황 아스라엘은 유피테르가 무죄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하아.
유피테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국의 일처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족의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족의 마나에 공격당한 피해자였다.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게 분명했다. 강화된 석화 마법에는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유피테르는 이단 심문관들의 체포에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사정 청취를 하기 위해 데려가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응해줄 수 있었다. 마인이라는 존재는 유피테르도 처음 보았을 정도로 새로웠다.
게다가 이단 심문관의 조사력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여신의 적에 대한 그들의 집착은 어마어마했다. 그가 준 단편적인 힌트를 통해 ‘마인’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조사할 게 분명했다.
심문관들이 심문한 자료를 나중에 교황이나 성녀를 통해 얻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유피테르의 판단이 틀렸다. 이단 심문관들은 반쯤 미쳐있었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처벌하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원해서 야근과 추가 근무를 하는 신비한 생명체들이었다.
‘이놈들을 죽여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심문관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는 없었다. 이곳은 레아교가 지배하는 성국이었다. 성국에서 난리를 피면 델포이 아카데미에도 누를 끼치지만, 공적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는 앞으로 아티팩트를 자유롭게 찾아다닐 수 없었다. 이단 심문관들의 추격은 매섭고 대응하기 귀찮을 게 뻔했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창조신 레아를 믿는 자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니까.
“이 친구가 생각보다 무서운 친구니 빨리 돌려주게.”
교황은 유피테르의 기분이 나빠진 걸 빠르게 눈치챘다. 그는 유피테르의 숨겨진 힘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은발의 대행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성국을 뒤집어버릴 수 있었다.
“하, 하오나 성하. 그게….”
“잔말 말고 움직이게.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평소라면 교황의 말이라면 넙죽 엎드릴 심문관들이 이번에는 고개를 돌렸다. 마치, 잘못을 숨기려고 하는 아이들 같았다.
“자네들 대체 뭘 한 건가! 설마 그의 것을 훔치기라도 한 건가?”
도둑이 제 발 저린 그 모습을 보고 교황이 호통쳤다. 도둑질은 창조신 레아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독실한 레아의 종이라면 꿈에서조차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되었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계속 그렇게 시치미 떼봤자 소용없어.”
이단 심문관들이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리자, 유피테르가 쐐기를 박았다. 유피테르는 없어진 게 무엇인지도 누가 가져갔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성국의 눈을 피해 새로 개발한 마법 케팔로스를 펼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반지 두 개.”
유피테르는 오른손으로 V자 표시를 만들었다. 언뜻 보면 승리의 표시였지만, 이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히, 히익.”
그걸 본 한 심문관이 몸을 떨었다.
‘딱 그것들만 가져간 걸 어떻게 안 거지?’
은발의 죄인은 놀랍게도 다양한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성국이 자랑하는 것들에 비하면 값어치는 떨어졌지만, 분명 좋은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방어 마법이 새겨진 것들도 있었다. 방어 마법이 미숙했기에, 이것이라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티팩트로 방어하며 여신의 적들을 제압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떨려왔다.
‘어차피 죄인의 것이라 가져가도 아무도 모를 거야.’
레아 님께서도 이 정도는 눈 감아 주실 거라고 되뇌었다.
“톰. 왜 그러나.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나?”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후배야. 우린 군대가 아냐. 레아 님에 대한 신앙으로 움직이는 자발적인 단체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되겠니?”
“시정하겠습니다.”
후배가 몸을 흔들자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 선배가 물었다. 톰은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자 점점 더 얼굴이 붉어졌다. 교황 성하를 포함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가 저지른 짓을 알고서 추궁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돌려주면 이 일은 덮겠다.”
“여, 여기 있습니다.”
유피테르의 최후 선고에 톰이 이실직고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 숨겼던 두 개의 반지를 유피테르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러고서는 호다닥 자리로 돌아왔다.
이단 심문관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유피테르의 눈빛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은색의 눈동자를 빨려 들어가다 보면, 당장이라도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단은 정보부터 얻도록 할까. 톰이라고 한 저 신관, 절대로 좋게 끝나지는 않겠군.’
유피테르는 톰이라는 신관에게 장난을 좀 치려던 생각을 버렸다. 어차피 고문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겉으로만 볼 때만 상처가 보이게 조작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간 톰이라는 이단 심문관은 괘씸했으나, 그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톰. 너 나 좀 봐야겠다.”
“아니, 나랑 먼저 면담 좀 해야겠는걸.”
“제리, 제리 어딨니. 후배 관리 제대로 안 하니?”
유피테르의 물건이 이단 심문관들 사이에서 나오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여신의 적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되었지만, 그건 들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건 평화를 주장하는 교황, 아스라엘의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건은 나중에 회의 안건으로 올리겠네. 지금은 다른 일이 있으니 실례하지.”
그 후, 교황은 유피테르를 데리고 지하 감옥 밖으로 나왔다. 싸늘해지는 지하 감옥의 분위기를 모른 척하고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구먼.”
“지하 감옥에서의 생활 힘들었다고. 밥 메뉴를 좀 바꿔주는 게 어때? 그리고 죄 없는 사람 잡아가는 것도 좀 고치라고 해.”
“허허. 미천한 신의 종에게 그런 힘은 없다는 거 알잖는가.”
“라엘 너 교황이라고. 어디 아픈 거야? 네 곁에는 우수한 치유사들이 넘쳐날 텐데.”
할아버지와 청년.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태도는 마치 오랜만에 본 친구 같았다. 백발을 한 아스라엘과 은발의 유피테르의 모습은 은근히 잘 어울렸다.
“자네도 있으니. 교황청으로 좀 부탁함세.”
“알았어. 저번에 갔었던 그곳이면 되지?”
“정확하네.”
지하 감옥이 은밀한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교황이 유피테르에게 공간 이동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유피테르 역시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번쩍ㅡ.
게이트와 비슷한 공간 이동의 빛이 둘을 집어삼켰다. 둘은 성국 중심을 지키고 있는 교황청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교황청 내에 따로 마련된 교황의 방.
“허허. 자네는 볼 때마다 젊어지는 것 같구만.”
교황은 공간 이동이 익숙한 듯 편안하게 자리로 향했다. 그의 스타일대로 만들어진 방은 경건한 분위기 그 자체였다. 누가 오더라도 독실한 신관의 방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의자에 앉은 뒤, 유피테르에게도 앉으라고 권했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던 유피테르는 허락이 떨어지자 망설이지 않았다. 마법으로 주변에 있던 의자 하나를 빼와 교황을 마주 보며 앉았다.
“자네의 마법은 언제나 놀랍군.”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건 틀림없는 마족의 마나였어. 헤카테에 문제 없다는 말을 책임질 수 있어?”
“요즘 젊은이들은 성급하구먼.”
심각한 사안인데도 교황은 느긋했다. 그는 책상에 올려져 있는 레아의 상을 보며 기도한 뒤, 말을 이었다.
“다름 아닌 자네의 눈이 틀릴 리 없겠지. 하지만, 헤카테는 정상이네. 성배는 나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있어. 설령, 마족이라도 모르네.”
그의 말대로 성배의 위치는 교황에게만 전해지는 비밀이었다. 성국의 그 누구도 성배의 위치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설령, 성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볼까. 타르타로스를 막아두는 결계는 부서졌어?”
“페르세포네 말인가. 타르타로스에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면 내게 신탁이 내려졌겠지.”
대대로 신앙심이 높은 교황들은 레아의 신탁을 받았다. 초대 교황 클레토가 그랬던 것처럼. 아스라엘은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큼 독실한 신앙심으로 유명했다. 이전에, 유피테르가 몰래 성국에 들어온 걸 알려주기도 했다.
“마족이 날뛰는 건 이미 들었지?”
“달의 몰락과 델포이에서의 사건인가. 질투와 분노의 공작이 나타났다고 들었네.”
일반인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 소식도 아스라엘은 전부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인물이었으니, 마족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건 당연했다.
“평범한 마족도 아니고 공작 둘이나 날뛰었어. 레아가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는 거 맞아?”
“유피테르. 대행자인 당신의 입에서 어찌하여 그런 말을 내뱉는가!”
레아를 모독하는 듯한 유피테르의 말에, 아스라엘이 깊이 분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피테르의 입에서 저런 모욕적인 말이 나와서는 안 되었다.
레아교의 경전에 따르면 창조신 레아는 인간을 가장 사랑했다. 인간이 마족과 손을 잡고 반역을 일으켰음에도, 한 번의 유예를 준 이유가 바로 ‘사랑’이었다. 신벌로 제국을 불태웠으나, 인간이란 종(種)을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사랑했기에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어머니에 대한 투정도 눈을 감아 주었다.
“당신이 모시는 자도 레아 님과…!”
“거기까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자 이번에는 유피테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네게 그런 권한을 주지는 않았어 교황.”
“흠흠… 실례했네. 조금 과도하게 화가 난듯하군. 마인에 대한 정보는 자네가 거기서 들은 게 다일걸세.”
지하 감옥 내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행동했으나, 아스라엘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성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모두 그의 손안에 있었다.
“악마에게 힘을 건네받은 거라는 말을 믿으라고?”
교황의 말을 들은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었다. 알바레스가 고문받으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그도 옆에 있었다. 그러나 알바레스가 한 이야기는 별 것 없었다.
악마.
단지, 그 존재를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악마라는 존재는 지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대륙 전쟁 시기 마족들을 칭하던 말이었다.
인간들은 계약을 통해 신의 뜻을 거스를 힘을 주는 마족들을 악마라고 불렀다. 파괴적인 마족의 마나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파괴 본능을 일깨웠다. 우월한 이 힘을 가지고 인간들은 엘프와 드워프 등의 이종족을 탄압했다.
당시, 창조신을 믿는 자들은 악(惡)과 마(魔)라는 단어들을 합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사악한 마족들이 인간을 나쁜 길로 인도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마족을 악마라고 부르며 폄훼했다.
“네게 더 들을 말은 없는 것 같네. 설마 네가 마족이랑 내통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일이 있다면 이미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걸세.”
유피테르는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교황이 레아를 저버릴 일은 없었다. ‘그녀’도 그렇게 말했고 오흐트 역시 교황의 직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후…. 일이 점점 꼬이는군. 단 하루도 쉬어가는 날이 없다니.’
교황이나 성녀가 구해주긴 했지만, 마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이건 상정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역시, 타르타로스에 한 번쯤은 가봐야 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럼. 일단 돌아갈게. 교류전에 참여해야 하니까.”
마인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교황과 할 이야기가 더는 없었다. 차라리, 칼리스토들과 상의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교황에게 인사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아스라엘이 갑작스럽게 한 문장을 내뱉었다.
“기억하게. 신의 뜻을 이루려는 대행자에게는 고난이 당연한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