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타의 마인(2)
* * *
성국 크레이타 곳곳이 교류전의 열기에 휩싸여 있을 무렵.
템플 기사단 본부 지하에 자리잡은 감옥은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언제든지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무거웠다. 관중들의 함성과 웃음꽃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죄인들은 고개를 들라.”
두 죄인을 지켜보는 이단 심문관들의 표정은 흉흉했다. 마치, 부모님의 원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또 시작인가.’
그 말에 갇혀있던 유피테르는 눈을 떴다. 그러자 지겨운 검은 감옥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제없을 거라고 장담했던 말과는 다르게 벌써 사흘째 이곳에 갇혀있었다.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생각보다 더 융통성이 없었다.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그저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이쯤이라면 어떤 마족과 달라붙었냐고 물어볼 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문 속에서도 유피테르는 당당했다.
그에게 떳떳하지 않을 이유 따위 없었다.
그는 마족을 사냥하는 쪽의 사람이었다. 공작급의 마족들은 지금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시트시거와 에키드나는 그와 전면 대결을 피해 도망갔다. 또, 세상으로 돌아온 후 벌써 몇 번이나 마족과 싸워 인간들을 구해냈다.
그는 큰 의미에서 이단 심문관들과 동류였다.
“형님 이 녀석 웃는데요.”
“내버려 둬. 아직 쓴맛을 못 봐서 그래.”
이단 심문관들은 유피테르를 비웃었다.
이미 은발 마법사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얼음 같았던 아름다운 피부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은발의 머리카락 역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도 입을 열지 않아 고문의 강도가 점점 올린 결과였다.
“저기 봐. 저 친구는 벌써 다 불어서 편하게 돼 있잖아. 너도 얼른 편해지고 싶지 않아?”
이단 심문관 중 한 명이 옆을 가리켰다.
유피테르는 격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함께 끌려왔던 알바레스가 보였다.
쥬르륵.
알바레스는 정신이 이상해졌는지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쳐든 그의 시선은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천장을 향했다. 지나친 고문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결과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벽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끔찍했지.’
이단 심문관들의 방식은 효율적이었다. 특별한 고문 기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을 극한 상황으로 몬 후에 웃는 얼굴로 치유를 해줄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의 웃는 모습이 두려워졌다. 마인을 자처했던 알바레스도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입을 열 때까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면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그게 그들의 신조였다.
“너도 곧 이렇게 되기 전에 빨리 불어. 서로 편하게 가자고. 응?”
다른 이단 심문관이 나서 유피테르를 은근히 협박했다.
사실, 이단 심문관들도 조금 지친 상태였다. 은발의 마법사는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은 열었다. 다만 자신이 마족과 내통했다는 문장을 말하지 않았을 뿐.
“상식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네 놈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심지어 반마족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라니 믿을 수 없다고. 반마족을 잡는 데 얼마나 많은 신관이 투입되는지나 알아?”
“맞아. 신의 저주를 극복한 자는 지금까지 없었다. 성녀님께서도 교황님께서도 해결하지 못하셨다. 그런 저주를 일개 마법사가 풀 수 있을 리 없다.”
심문관들의 말은 타당했다. 태초의 교황 클레토 이후에도 신의 저주를 극복한 신관은 없었다. 마나 자체를 느낄 수 없는 그들은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속성을 깨닫지 못한 제로 서클들과도 달랐다.
어린 시절부터 유피테르가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이야기가 자자했다. 최고 마법사를 여럿 배출한 달의 가문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었다.
마족의 마나를 흡수해 인간의 탈을 벗은 반마족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퍼스트 서클 마법사들을 가뿐하게 찍어누를 수 있었다. 마족의 마나는 인간의 마나보다 더욱 파괴적이었다.
오죽하면 마족의 마나를 주입하는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이성을 파괴했다. 파괴 충동에 마음을 지배당한 반마족들은 테러를 일삼았다. 마족보다 더 마족 같은 짓을 하는 반마족들은 당연히 처형대상이 되었다.
평범한 방법으로 마족의 마나를 제거할 수 없기에, 이들을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난 원래부터 마나를 쓸 수 있었다니까! 내 마나가 검은색이 아닌 건 당신들 눈으로도 똑똑히 봤잖아.”
유피테르는 억울하게 소리쳤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류전에서 푸른 마나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교도 놈. 네놈은 아르테미스 가문 출신이 아닌가.”
유피테르가 ‘아르테미스’라는 것도 문제였다.
크레이타의 신관들은 조디악의 마도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강함과는 별개로 신의 섭리를 해치는 게 눈엣가시였다. 조디악의 일원인 카르멘도 이단 심문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아르테미스 가문과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르테미스 대공자의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돌아온 유피테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준 얼음성이 이상한 거였다. 카르멘은 에키드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해도,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프레이야나….”
어떻게 해도 말을 들어주지 않자 유피테르는 초강수를 두었다. 교류전은 한창 진행 중이었고 티폰교에 대해서 얻어낸 정보도 없었다. 더는 가만히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을 자극해서라도 틈을 만들어야 했다.
“감히, 성녀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
“연장 가져와. 오늘 얘를 죽이고 나도 죽는다.”
유피테르의 예상대로였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광기가 일렁거렸다. 평범한 용의자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죽여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단 심문관들에게 있어서 성녀의 이름을 꺼내는 건 금기였다. 이단 심문관이 레아교의 어둠이라면, 성녀는 빛이었다. 빛의 길을 걸어가는 자애로운 성녀는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 중에서 원해서 이단 심문관이 된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아니었다.
끼이익.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다들 잘하고 있는가?”
누군가가 지하 감옥의 문을 열며 들어왔다.
“어떤 자식이 감히 이단 심문 중에 들어오는….”
뒤에서 도구를 준비하던 이단 심문관이 고개를 돌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단 심문 중 부외자가 참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단 심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비밀리에 붙여져야만 했다.
모든 건 성국과 레아 님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당당한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교, 교황 성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현 교황인 아스라엘이었다.
그런 그를 확인한 이단 심문관들은 얼어붙었다. 성국을 움직이는 세 개의 축 중 하나인 교황이 이곳에 온 이유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교황은 교류전을 위해 참여한 각국의 고위층들과 회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이 늙은 신의 종은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시게. 바빠 보이는구먼.”
참혹한 현장 속에서도 교황은 덤덤했다. 그러나 이단 심문관들은 아니었다. 성국의 최고위 인물이 당도하자 어쩔 줄을 몰랐다. 평소 교황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늘 그의 의중을 담은 서신이 대신 전해졌을 뿐이었다.
심지어, 이곳에 있는 건 이단 심문관들 중에서도 초짜들이었다. 선배들은 마족의 마나를 직접 사용했던 알바레스를 담당했다. 밤을 새워가며 심문을 이어간 끝에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 후, 잠시 밥을 먹으러 간 상황이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셨습니까. 정보라면 선배들께서 곧 오실 겁니다.”
남은 초짜들 중 한 명이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섰다. 그나마 그가 이 중에서는 제일 경험이 많은 편이었다. 무언가 잘못해서 매를 맞는 거라면, 먼저 맞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여기서 한 번 막아줘야 나중에 선배들의 눈총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헤카테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네.”
“성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헤카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고 말했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교황의 잔잔한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있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교황의 권위에 눌려서 제대로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교황복을 입은 아스라엘의 성체를 이렇게 가까이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이게 어둠의 길을 걷는 자들의 한계였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이네. 신의 종이 이렇게 말해야만 알아듣겠는가?”
답답했던 교황은 더 직접적인 어투로 바꾸었다. 물론,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단 심문관들에게는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보다 더 무서웠다.
“아, 아, 알겠습니다. 성하.”
교황과 대화하던 이단 심문관이 쭈뼛거리는 후배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유피테르의 손을 묶고 있던 수갑과 몸을 구속하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
이 두 개 모두 이단 심문관 전용으로 개발된 아티팩트였다. 평범한 마법사들은 이걸 풀어내지 못했다.
“기분이 어떤가. 유피테르.”
교황은 유피테르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다. 주변에 유피테르가 흘린 피가 낭자한데도 개의치 않았다. 흰색 교황복 밑단이 붉은색으로 물들어가자, 겁에 질린 건 오히려 이단 심문관들이었다.
“너무 늦게 온 거 아냐?”
“이래 보여도 신의 미천한 종이지 않은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자는 이곳저곳에 많은 법이네.”
아스라엘 식 신성 마법 ― 치유의 빛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교황은 직접 유피테르를 치료했다. 단순한 치유 마법이었지만, 교황이 직접 쓴 마법의 효과는 대단했다. 그 많던 상처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가히, 오흐트의 원상 복귀에 비견할 수 있었다.
‘대체 저 자식이 뭔데 교황님께서 직접 마법을 사용해주시는 거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단 심문관들의 머릿속은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다.
교황이 다음으로 지시한 건 유피테르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감옥에 갇히기 전 유피테르는 심한 몸수색을 당했다. 그때 아르테미스 가주의 목걸이를 포함해 많은 아티팩트를 빼앗겼다.
마족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씌여진 중죄인에게 말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가져간 것들이 다 있는지 확인해보게.”
심문관 중 한 명이 압수했던 물건들을 모두 가져오자, 교황이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교황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는 이단 심문관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묵묵히 유피테르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고마워. 라엘.”
교황의 말에 반말로 대답하는 유피테르. 심문관들은 그런 유피테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교황에게 하대할 수 있는 건 창조신 레아뿐이었다. 일개 귀족이 입에 담을 수 있는 표현이 아니었다. 리투아 제국의 황제조차 교황에게는 존댓말을 써주었다.
물론, 유피테르는 그들이 살기를 뿌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그저 없어졌던 물건이 전부 돌아왔는지 확인할 뿐이었다. 그가 막 나가지 않은 건 아직 델포이의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깐, 하나가 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