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20화 (120/265)

크레이타의 마인(1)

* * *

‘환상 결계를 깼다고?’

유피테르는 알바레스가 저지른 짓이 믿기지 않았다. 물론, 유피테르도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한계를 풀면 기적과도 같은 힘을 보여줄 수 있었다. 칼리스토 자매들은 평범한 마법사를 마스터로 인정하지 않았다.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알바레스가 신의 숨결이 담긴 아티팩트를 부순 게 문제였다. 유피테르는 케팔로스를 구축하기 위해 결계의 원리를 해석할 때, 신의 섭리를 느꼈다. 신의 기적은 인간의 마법과는 구조 자체가 달랐다.

성국이 보유한 아티팩트는 대부분 신이 하사한 것들이었다. 프레이야가 사용하는 성검 오를레앙이 대표적이었다. 현재보다 뛰어난 고대 마법사들도 오를레앙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신의 기술이란 감히 인간의 흙발로 디딜 수 없는 경지였다.

당연히 알바레스가 부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가 아티팩트 본체를 없앤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계에 금을 가게 만든 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교류전이 처음 진행되었을 때부터, 환상 결계는 부서진 적이 없었다.

알바레스는 마족의 마나를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로 신의 그림자를 밟을 수는 없었다. 마왕 티폰도, 공작 에키드나도 ‘신’의 뜻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반마족이 아니라면 넌 뭐지?”

유피테르는 제대로 된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가 지닌 지식으로도 알바레스의 상태를 규명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마족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밖에 정확한 게 없었다.

“난 인간을 심판할 마인(魔人)이다.”

알바레스는 자신의 마법이 만든 참혹한 광경을 흡족하게 쳐다보았다.

파르테논 아카데미의 두 사람은 이미 흙인형이 된 지 오래였다. 죽어버린 옛 동료들을 보아도 눈물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두 명의 인간이 죽었을 뿐이었다. 그와는 상관이 없는 저급한 존재들이었다.

알바레스는 마법을 멈추었다. 위력을 확인하는 건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날개를 접으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은 레아교 경전에 적혀 있는 천사의 강림처럼 보였다.

“웃기지 마. 넌 고작 퍼스트 서클 급 마법사일 뿐이야. 아직 내게 제대로 복수도 못 한 주제에. 심판을 들먹여?”

유피테르는 정보를 얻기 위해 알바레스를 도발했다. 세계의 역사와 함께한 ‘그녀’는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잊혀진 세대부터 지금까지 마인이란 존재는 없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복수, 그래…. 복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복수라는 말에 알바레스의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는 힘이 넘쳤고, 유피테르는 꽤 큰 부상을 입었다. 은발의 마법사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게 마인이 된 알바레스의 힘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넌 사과조차 하지 않았지. 그럼 잘 가라.”

알바레스는 거대한 마법을 펼치기 위해 마나를 모았다. 어차피, 유피테르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느낄 수 있었다. 유피테르의 마나는 제법 대단했지만, 그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알바레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사르르르ㅡ.

선발전 경기를 위해 가동되었던 환상 결계가 갑자기 사라졌다.

경기에 참여했던 모든 교수들은 외딴 섬에서 스타디움으로 강제로 복귀했다. 마인이 된 알바레스와 그와 대립하던 유피테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족의 마나를 느낀 주최 측이 아티팩트를 꺼버린 것이었다.

‘드디어 일하는구나 크레이타. 마족이 나왔는데 대체 왜 이렇게 느린 거야.’

상처를 입은 척하며 시간을 끈 건 유피테르의 작전이었다.

성국의 이단 심문관들의 실력은 확실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정보를 얻어내는 ‘선수’였다. 어차피 프레이야를 통해 정보를 얻으면 되는데,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유피! 무사했구나. 엄청난 마나가 느껴져서 이 누나는 걱정했어.”

에메리아가 유피테르에게 달려오며 안부를 물었다. 눈보라 속에서 고생했는지 동상의 흔적이 있었다. 그녀가 지급받은 화살통 안에는 얼추 보아도 40개가 넘는 깃발들이 들어 있었다. 혼자서 파르테논 교수 2인분을 해버렸다.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무사해요. 메리 누나.”

“아니, 안 무사해! 여기 봐봐! 다쳤잖아!”

“이 다리는 사실….”

“사실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구. 이런 상처는 내버려두면 곪아서 더 아프다구. 빨리 치유사에게 가자!”

에메리아는 유피테르가 부상을 입은 걸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다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설명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누나 스위치가 들어간 에메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파르테논 아카데미 쪽은 한 명만…. 유피테르 교수 혹시, 뭔가 저질렀습니까?”

상대방을 확인한 사이가 교수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눈보라 치는 외딴 섬에서 깃발을 찾아다녔는데도 사이가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델포이 측이 전원 귀환한 것에 비해, 파르테논은 한 명만 돌아왔다. 심지어, 남은 한 명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파르테논 아카데미가 실전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귀족주의에 물들어 실력 있는 평민들을 등용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그래도 교수라면 이 정도는 문제없이 돌파해야만 했다.

“저지른 건 제가 아니라, 저쪽입니다. 보십시오.”

유피테르의 말에 두 교수의 눈이 파르테논의 쪽에 서 있던 알피를 향했다.

“마, 말도 안 돼. 나는 인간을 초월한 마인이란 말이다. 어째서 내 힘이 없어졌지!”

알피는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마나가 완전히 없어져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는 것처럼.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주변에는 그를 만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괜히 가까이 가서 다치고 싶지 않았다. 심판들조차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를 제압할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연락을 넣었으니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역시 마족의 마나가 맞긴 한가 보군. 헤카테가 없애버렸잖아.’

유피테르가 예상했던 대로 포션은 내용물은 마족의 마나인 듯했다. 성국을 성국답게 만들어주는 결계, 헤카테가 알바레스의 마나를 지워버렸다.

다른 이들은 알바레스가 그냥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유피테르는 아니었다. 방금까지 채워졌던 풍성한 마나가 사라져 저런다는 걸 알았다. 원래, 있다가 없는 게 더욱 허전하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예상외의 사건에 관중석은 소란스러웠다. 중계를 맡았던 신관이 애써 침착하게 말하고 있으나 큰 영향은 없었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관중들 역시 많은 증인 중 한 명이었다.

알피 교수에게 마족의 검은 마나를 흡수하는 장면을 똑똑히 봤으니까.

“다들, 움직이지 마!”

심판이 기다리던 이단 심문관이 드디어 나타났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하고 있었다. 손에는 스태프나, 철퇴 등의 무기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등을 가리는 망토에는 템플 기사단과는 다른 이단 심문의 마크가 그려져 있었다. 십자가와 칼이 동시에 그려져 있는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섬뜩했다.

“파르테논의 알피, 델포이의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이 두 사람을 티폰교와 내통한 혐의로 구속하겠다.”

다섯 명의 이단 심문관들은 혐의를 크게 선언하며 두 교수를 구속했다. 그들의 행동은 절제미가 넘쳤고 재빨랐다. 평소부터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유피테르는 양손을 올리며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렸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단 심문관은 마족보다 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여차하면 성녀나 교황을 불러서 나올 수도 있었다.

“유피.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런 사정을 하나도 모르는 에메리아는 크게 걱정했다. 리투아 제국에도 이단 심문관의 악명은 자자했다. 이들 눈에 잘못 띄면 다시는 세상의 공기를 맡을 수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분들도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무죄라는 걸 아실 테니까요. 아, 카테리나를 조금 돌봐주세요. 혹시 조사가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요.”

연행되어 가면서도 유피테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알았다. 걱정하지 말고 잘 해결하고 와라.”

그의 말에 대답한 건 의외로 사이가 교수였다. 그는 울먹이는 에메리아 교수를 토닥이며 약속했다. 유피테르는 몰랐지만, 이 교수는 의외로 자상한 성격이었다. 유명인들만큼은 아니어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

오히려 문제는 알피, 아니 알바레스 교수 쪽에서 벌어졌다.

“이거 놓으라고. 이거 놓으란 말이야. 죽고 싶어? 목숨이 아깝지 않아?”

원래 유피테르 쪽에 두 명, 알바레스 쪽에 세 명의 이단 심문관들이 붙었었다. 그러나 알바레스가 계속해서 날뛰자 유피테르 쪽의 한 명이 이동했다. 네 명의 이단 심문관들이 그를 재우려고 온갖 신성 마법을 걸었으나 먹히지 않았다.

‘인류를 초월하긴 한 건가.’

유피테르는 알바레스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걸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어떤 방법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알바레스도 자신처럼 초월자가 된 게 분명했다. 신성 마법은 아무나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성 마법은 신이 자신들의 신자에게 빌려준 힘이었다. 창조신의 힘을 고작 인간이 대항할 수는 없었다.

퍼억ㅡ.

참다못한 한 이단 심문관이 알바레스 교수의 뒷목을 철퇴로 가격했다. 알바레스는 날아오는 무기를 피하지도 못하고 한 방에 기절했다. 신성 마법에 저항은 할 뿐, 이미 몸은 만신창이였다. 사각에서의 공격을 피할 여력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딴 소리 하기 전에 빨리 치료나 해.”

“감사합니다!”

아직 사람이긴 한 건지, 철퇴로 후려친 자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초짜로 보이는 이단 심문관은 어쩔 줄을 모르며 선배들에게 사과했다. 다른 이단 심문관은 그런 소리 말고 치료나 하라고 조언했다.

초짜 심문관은 치유 마법으로 알바레스 교수를 치료했다. 놀랍게도, 알바레스의 육체는 신성 마법의 치유는 막지 않았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경기 결과를 발표하시길.”

상황이 정리되자 이단 심문관들은 용의자 두 명을 데리고 떠났다.

[어, 많은 일이 벌어 졌지만. 경기의 판단을 해야겠죠. 심판들이 의논한 결과 델포이 아카데미의 승리로 판정되었습니다!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진행자는 델포이 아카데미가 엄청난 스코어 차이로 이긴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교류전의 분위기를 띄워야만, 마족이 성국의 결계를 뚫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교류전 첫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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