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교류전(3)
* * *
“티폰교라니.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립니까?”
처음 질문했던 로즈는 오스티안에게 따지듯 물었다. 부기관장이 설명한 내용은 귀를 의심할만한 이야기였다. 세이니아 대륙의 상식을 아는 마법사라면 도저히 웃어넘길 수 없었다.
끄덕.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학문적으로 자유가 보장되는 교수들도 마족의 동료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족과 손을 잡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역사가 기록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신벌로 소멸한 고돔과 소모라 제국의 전철을 밟고 싶어 하지 않았다.
‘티폰은 나한테 죽었는데 말이지.’
유피테르는 속으로 실소했다.
델포이 측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마 자신뿐이었다. 교황이나 성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섣불리 마족을 자극하다간 세 번째 대륙 전쟁의 신호탄이 될 테니까.
고대 마법사들에 비해 한없이 약한 현재의 인류는 감히 마족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신성 마법이 있긴 했지만, 고위 신관은 수가 적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족과의 전면전은 피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현재의 교황은 동료들이 피를 흘리는 것보다는 거짓된 평화를 유지하는 걸 선호했다.
“자네가 혹 마족의 스파이 아닌가?”
제프리스 부학장은 한 발 더 나갔다. 이곳을 통솔하는 입장이기에 던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오스티안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무려, 미궁의 마녀 피티아의 ‘대리자’ 였으니 말이다.
“하하… 재밌는 농담을 하시네요?”
오스티안은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까지의 모습이 모두 연기였다는 듯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바뀌었다. 지금껏 감고 있는 듯 보였던 눈을 뜨자, 무거운 마나가 주변을 둘러쌓았다.
“흠흠. 아닐세.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인 거로 하지. 자네도 다른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제프리스는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지 않았다. 모두에게 숨기고 있었지만, 그는 델포이를 졸업하지 못한 마법사였다. 델포이의 커리큘럼과 적자생존의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퇴했다. 그가 젊은 나이였을 대의 델포이 아카데미는 생지옥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힘들었다.
그런 그가 고위 신관으로 보이는 오스티안을 이길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쉬세요. 경기장에서 뵙도록 하죠. 빛이 있기를. 가서 조금 쉬도록 해요 이안.”
“그, 그래. 조심히 가게나.”
오스티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처럼 살벌한 기세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델포이의 일원들에게 부드럽게 인사하며 이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제프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신관이 맞는 건가? 암살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살기잖나.’
부기관장이 사라지자 제프리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 그가 감지한 기세는 신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섬뜩했다. 빛의 길을 걷는 자가 맞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피비린내 나는 뒷골목의 보스 같은 느낌이었다. 델포이 시절 만났었던 암살자들과 비슷했다.
“제프리스 부학장님?”
기세 싸움에서 밀려버린 겁먹은 토끼처럼 변해버린 제프리스. 로즈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안색을 살폈다.
제프리스는 아차하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교수들을 보았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유피테르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이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오스티안이 전해준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뭐, 뭣들 보는 건가? 어서 숙소로 들어가 인원이 맞는지 체크하게나.”
제프리스는 멋쩍은 듯 교수들을 닦달했다.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화를 내는 게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이걸로 되었다. 마나에 겁을 먹었던 걸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제프 부학장님은 재미있으시다니까?”
에메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탐욕만으로 움직이는 것 같던 제프리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선발된 교수들은 델포이의 최고 정예들이었다. 교수라고 불릴 뿐 당장이라도 현직에 나서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인재들이었다. 당연히 제프리스 부학장의 어색한 발연기 따위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제프리스 학장 대리라고 정확히 부르게. 에메리아 교수!”
제프리스는 호칭을 확실히 하라고 소리친 뒤 에메리아를 뒤따랐다. 로즈를 포함한 다른 교수들 역시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숙소에 짐을 풀러 이동했다.
* * *
톡. 톡. 톡.
햇빛을 잔뜩 머금은 큰 창이 작게 흔들렸다.
“오라버니?”
유피테르의 방에 상담하러 왔던 카테리나는 미세한 울림을 눈치챘다. 델포이 랭킹 1위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마왕의 심장을 얻으며 마나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잠시만, 기다려. 귀찮은 친구가 찾아온 것 같거든.”
“귀찮은 친구라니. 성국에도 친구가 있으셨어요? 아니, 설마….”
유피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의 근원지인 창문으로 걸어갔다.
이런 일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유피테르가 선택한 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제일 큰 방은 당연히 제프리스 부학장, 아니 학장 대리의 몫이었다. 교수들의 방이라고 해봤자 아카데미생의 것보다 1.5 배 정도밖에 크지 않았다.
성국은 필요한 부분과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확실하게 나누는 성격이었다.
퉁. 퉁. 퉁.
유피테르의 위치가 바뀐 걸 눈치라도 챘는지 그새 소리가 더 커졌다.
창문 앞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창틀 사이에 껴있는 돌멩이들을 찾아냈다. 그가 있는 방은 8층이었다. 요령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던져도 닿지 않는 거리였다.
슬픈 예감은 늘 틀리지 않았다.
“역시, 레이야 너구나.”
덜컹. 드르르륵.
유피테르는 한숨을 쉬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사치를 부리지 않았을 뿐 숙소의 모든 부분이 최신 기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밑에서 예상했던 그 사람이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성녀 프레이야 다르크였다.
“유피테르. 놀자!”
문을 열자 그녀의 목소리가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 주변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유피테르를 불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었다. 다른 아카데미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싶었다.
사실. 델포이 아카데미의 선발 인원이 새벽같이 출발하긴 했다.
뭐든지 1등 해야 한다는 제프리스 학장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 일정이었다. 개막전은 오후 3시부터 시작될 예정이고, 시곗바늘은 아직 10시를 겨누고 있었다
“레이야 언니잖아요?”
동네 친구를 찾아온 옆집 친구 같은 모습에 카테리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동생과 성녀는 강화 합숙 때 같이 생활하며 친해졌다. 프레이야는 클리오나의 성장을 전담했지만, 가끔 카테리나와도 대련을 해줬다. 신성 마법만 보고 있으면 따분하다고 투정을 부렸기에, 유피테르가 허락했다.
“프레이야 언니 진짜 강하던데요.”
성국에서도 손에 꼽는 전투광인 그녀에게 카테리나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카테리나가 마법에 재능이 있다면, 프레이야는 전투에 재능이 편중되어 있었다. 전투 중에 순간적으로 판단하는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리나 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성녀를 이기려면 아직 멀었어.”
“이제 더블 캐스팅도 가능한 걸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구요 오라버니.”
합숙의 성과는 확실했다.
성장의 실마리를 잡았던 카테리나는 확실히 한 단계 벽을 넘어섰다. 마왕의 심장도 어느 정도는 제어가 가능해졌다.
작년에도 신성 기관의 유망주들과 맞붙었긴 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박진감이 넘치지는 않았다.
유피테르가 돌아오기 전의 카테리나는 그야말로 폭군이었다. 소문에 겁을 먹은 자들이 기권해 카테리나는 개인전에서는 무혈로 순위권에 입상했다. 단체전에서도 비슷했다. 신성 기관 출신 클리오나가 있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은 현재도 충분히 통용되었다.
“오라버니. 레이야 언니도 이곳으로 오라고 하죠. 할 말이 있어서 온 것 같은데.”
“네가 불편하지 않다면 이곳으로 오라고 말할게.”
유피테르는 프레이야에게 통신 마법을 보냈다.
정확히 이 방 창문에 돌을 던진 걸 보아 자신의 위치가 새어나간 게 확실했다. 비밀이어야 할 정보였지만, 성녀는 초법적인 존재였다. 교황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야호, 카리나.”
카테리나가 문을 열어주자 프레이야가 반갑게 인사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카테리나에게 달려가서 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성녀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단련된 두 팔은 흔들리지 않게 거뜬하게 버텨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열렬한 춤은 계속되었다.
회전이 멈춘 건 약 열 바퀴를 돌고 나서였다. 프레이야는 만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카테리나를 살살 놓아주었다. 이 부분에서 의외로 섬세한 성격이 엿보였다.
“레이야 언니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라니, 며칠 전에 산에서 같이 뒹굴었잖아?”
“그래도 언니랑 만나니까 너무 좋은걸요!”
“나도 마찬가지란다. 카리나.”
방 안으로 들어온 프레이야는 카테리나와 안부를 나눴다. 열 바퀴를 빠르게 돌았지만, 문제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 정도로 어지러워할 리 없었다. 현대의 마법사는 체술도 경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너답지 않게 돌멩이나 던지고. 그러다 창문이 깨지면 다친다고.”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유피테르가 끼어들었다. 아직, 그녀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듣지 못했다. 델포이의 마족 사건 때처럼 무언가를 알려주러 온 걸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툭툭.
“이거 말하는 거야?”
프레이야는 방을 가로질러 창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어… 언니?”
“어이, 레이야. 그러다 부서진다고. 네 힘을 생각해.”
쾅쾅.
시시각각 변하는 남매의 표정을 보며 프레이야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재밌다는 표정을 지은 프레이야는 창문을 다시 한번 두드렸다. 방금 전보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거 잘 안 부서져. 방마(防魔) 유리라구. 크레이타의 특산물인데. 델포이에서는 이런 거 안 배워?”
얼음성과 마찬가지였다. 신성 기관에서 교류전을 위해 준비한 숙소의 곳곳에는 강화 마법걸려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마법이 아니었다. 마를 멸하는 성스러운 빛이 들어가 있었다. 프레이야가 자신할만했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은 안 한 것 같은데.”
평소의 유피테르였다면 이쯤에서 웃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반쯤 농담으로 던진 프레이야의 말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던진 말 때문에 가게 된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큰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무사했지만, 여동생은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마왕의 심장이 언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 신성 기관 소속 신관 프레이야 다르크야.”
프레이야는 새 옷을 산 아이들처럼 자랑스럽게 제자리에서 빙 돌았다. 흰색을 바탕으로 한 신관복 가슴팍에 금색으로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틀림없는 신성 기관의 것이었다.
“너… 신성 기관 소속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