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대표 선발전(2)
* * *
델포이 아카데미의의 핵심 건물 중 하나인 거대 경기장 콜로세움.
지금 이곳에는 대부분의 델포이 아카데미 생이 모여 있었다. 콜로세움이 대단한 이유는 다름 아닌 엄청난 수용력이었다. 원하는 자들에게 모두 한 자리씩 줄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델포이 아카데미가 파르니소스 산과 인근 지역 전부를 부지로 사용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부터 델포이 아카데미 대표 선발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중계석의 한 자리를 차지한 에메리아 교수가 힘차게 선언했다. 그녀는 이미 교수로 선발되어 있었기에 특별히 중계를 맡았다. 리투아 제국 4대 공작 출신인 그녀의 실력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수준이었다.
그 옆으로 두 명의 아카데미 생이 진행을 지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에메리아 팬클럽 일원이었다.
‘우, 우리가 이 자리를 어떻게 얻었는데.’
‘암암. 에메리아 님의 옆자리를 위해서 그 정도 투자는 별것도 아니지.’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훤히 보였다. 하이파이브에 이어 굳게 악수를 하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벌였던가.
이 기간만큼 팬클럽의 마음이 하나가 된 적은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선발전을 중계하는 에메리아의 양옆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중계하는 경기가 많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자리는 돈과 거래 등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얻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에메리아에게는 비밀이었다. 옆자리를 위해 피를 튀기며 싸우는 걸 눈치챈다면 슬퍼할 것이기에. 델포이의 아이돌은 항상 행복해야만 했다. 팬들이 좋아하는 건 그녀의 미소였다.
그녀의 얼굴에 눈물을 짓게 만드는 건 올바른 팬의 도리가 아니었다.
[대표 선발전 이전에 학생회장 카테리나 아르테미스 양의 선서가 있겠습니다.]
“학생회장! 여기 봐주세요!”
“헤으응. 눈나.”
“우.윳.빛.깔. 카.테.리.나!”
학생회장을 상징하는 망토를 두르고 당당히 콜로세움으로 들어오는 카테리나. 카리스마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관중들이 열광했다.
수려한 외모. 강력한 마나. 뛰어난 통솔력.
삼박자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카테리나는 언제나 델포이의 인기인이었다. 에메리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팬클럽을 보유하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와 같은 날에는 초콜릿의 산이 쌓여 업무를 제대로 못 하는 수준이었다.
부회장 클리오나, 서기 라우라 그리고 선도부장 리하브.
다른 학생회의 임원들은 카테리나보다 한 걸음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카테리나가 빛날 수 있는 시간을 1초라도 더 주려는 것처럼. 물론, 이들 역시 실력이 출중하고 인기가 있는 자들이었다.
엄격한 기준에 의해 선정된 학생회의 임원들이 뛰어나지 않을 리 없었다.
“선서, 나 카테리나 아르테미스는 자랑스러운 델포이 아카데미의 대표 선발전에서 공정한 대결을 펼칠 것을 다짐합니다.”
카테리나가 오른손을 올리고 선서를 시작하자, 침묵 마법을 건 듯 콜로세움이 조용해졌다. 환호성을 보내던 아카데미 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선서를 따라 했다. 콜로세움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입으로 중얼거리며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속으로 같은 구절을 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카데미생 대표 학생회장 카테리나 아르테미스.”
우와아아아아ㅡ.
그녀의 선서가 끝나자, 하늘을 찌를 뜻한 환호성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대표 선발전 후보에서 탈락한 건 이미 지난 일이었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극히 일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자들의 숨 막히는 경기가 펼쳐지는 걸 기대했다. 대표 선발전은 학년에 상관없이 델포이를 대표할만한 마법사들을 뽑는 대회였다. 당연히, 수준 높은 경기가 펼쳐졌다.
[자! 드디어 첫 경기가 시작됩니다.]
카테리나와 함께 선서를 제창했던 학생회 임원들이 퇴장하자, 에메리아는 곧바로 대회를 진행했다. 올해 처음 해설 겸 진행을 맡았지만,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원래 쾌활한 그녀에게 진행 역할은 안성맞춤이었다.
[첫경기는 놀랍게도 아폴론 가문의 세이드와 신입생 성국의 출신의 유망주 마이야르가 맞붙습니다!]
[선 후배 간의 놀라운 대결이 되겠군요.]
두 명의 팬클럽들은 이날을 위해 목숨 걸고 준비했다.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막힘없이 에메리아의 말을 지원할 수 있었다.
중계진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동안, 콜로세움 중앙에는 두 명의 아카데미 생이 입장했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세이드 아폴론, 그리고 예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신입생 마이야르였다.
유난히 유피테르와 연이 깊었던 아카데미생들이 첫 경기에 출전했다.
“여어. 선배. 미안하지만 내가 나가야겠어.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조금 예의가 없네. 후배. 예의가 뭔지 그 몸에 새겨줘야겠어.”
서로를 노려보는 두 마법사.
2학년인 세이드와 신입생인 마이야르가 붙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이번 대회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르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틴 양.]
[맞아요. 엘리엇 씨. 교수님들과 조교 선배들이 직접 심판을 맞는다고 해요. 옴팔로스가 참여하지 않는 결투는 처음이네요. 뭐, 그래도 좋은 경기가 펼쳐질 거라고 믿어요.]
옴팔로스의 에고가 유피테르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대의 아티팩트에는 고작 결계를 유지할 힘만이 남아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델포이 상층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상층부는 교수들과 조교들이 번갈아 가면서 심판을 맡으라고 지시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하시죠.”
조금 떨어져 있던 조교가 경기의 시작을 알리자, 마이야르가 과감하게 선공을 가져갔다.
마이야르 식 신성 마법 ― 빛의 단도
마이야르는 근처에 강력한 마나의 구체를 여러 개 만들어냈다. 단순한 구들은 그의 마나를 먹고서 빛의 단도로 변해갔다. 마이야르는 신입생답지 않은 능숙함으로 단도를 제어했다. 신성 기관 출신이라는 과거가 빛이 나는 순간이었다.
쾅ㅡ.
신성 마법은 평범하지 않은 마법이었다.
마이야르의 단도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콜로세움 바닥에 구멍을 냈다. 그렇게 부서진 구멍은 혼자서는 기어 올라올 수 없을 듯한 크기였다. 사람이 빠지면 절대로 못 찾을 것만 같았다.
두두두두ㅡ.
마이야르의 공격은 숨 쉴 틈 없이 계속되었다.
세이드 식 불꽃 마법 ― 화염의 방패
세이드는 아폴론 가문이 자랑하는 불꽃 마법이 장벽을 만들었다. 세이드가 만든 방패는 크고 단단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단도에도 장벽은 뒤를 내주지 않았다.
“좀 치는데 후배?”
세이드는 공격적으로 나오는 후배를 보며 감탄했다.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그야말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저런, 무모함도 때로는 필요했다.
‘신성 기관 출신이라고는 들었지만, 대단하네. 졸업하지 않아도 벌써 이 정도라니.’
아폴론 공작가의 아들인 세이드는 신성 기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성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었지만, 적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창조신 레아에 대한 광신도 집단.
그런 성국의 깃발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신성 기관이었다. 그들은 경건하면서도 사나웠고, 자비심 넘치면서도 냉철했다.
델포이 아카데미와 같은 교육 기관에 속해있음에도 그들은 이미 완성된 인재들이었다. 신성 기관에는 유소년 부가 부속으로 딸려 있었다. 클리오나와 마이야르는 모두 이곳 출신이었다.
“후배. 설마 이게 끝이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마이야르는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자 조급해졌다. 자신은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지다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본때를 보여줘서 모욕적인 말을 취소시켜만 했다.
마이야르 식 신성 마법 ― 빛의 검
마법이 검과 같은 실질적인 무기를 압도하는 시대.
검사들도 마법을 익히지 않으면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시대였다. 검사들의 왕국 시에라에서는 마법에 대응하기 위해 ‘오러’를 개발했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마법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마이야르는 신성 마법으로 검을 만들어내 손에 쥐었다.
[마이야르 선수는 검을 꺼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엘리엇? 마법사가 검을 들었습니다.]
[역시 아폴론 공작가의 이름은 무겁군요. 불꽃 마법은 너무나도 강력합니다.]
[검과 검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메리아 교수님.]
[저도, 저도 꼭 듣고 싶습니다.]
중계를 맡은 크리스틴과 엘리엇은 세이드의 마법에 초점을 맞췄다. 고작 2학년이었지만, 세이드는 단순한 유망주가 아니었다. 신입생 때 아카데미 교류전에도 나간 예상되는 초신성이었다.
그는 차기 학생회의 임원으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유명했다.
[검이라니 흥미롭네. 신성 기관의 특징이랑 이어보면 어울릴지도?]
에메리아는 검을 쓰는 마이야르가 마음에 들었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한 용기가 있다는 것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길을 관철해 나가는 제자들을 좋아했다.
“여신의 힘을 이 검에!”
그가 만들어낸 검의 날은 빛의 마법으로 일렁였다. 마치, 주신 레아가 마이야르에게 가호를 내려준 것만 같았다.
“덤벼 봐. 후배.”
검과 마법이 대치하며 묘하게 흘러가는 상황.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세이드는 당당했다. 자랑스러운 아폴론 가문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야만 했다. 그에게는 그럴 힘도, 자신도 있었다.
‘보고만 계세요. 아버지, 당신의 꿈을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마도사가 되어 조디악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
그게 아버지 슐레이만이 평생 동안 가슴에 품었던 꿈이었다.
한 때, 아버지는 카르멘 아르테미스를 라이벌로 삼았었다. 청염을 꺼트린 카르멘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압도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고, 마도의 길을 걸어나가셨으니까.
그는 이미 별세계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조디악의 일원이 되어버린 것도 모자라 마족과 손을 잡고 인류를 배반했으니까. 황실 근위대장이었던 아버지는 그 소식에 누구보다 충격을 받으셨다.
그날 충격을 받아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보면서 결심했다.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뤄드리겠다고.
세컨드 서클의 마도사가 되는 건 물론이고, 조디악의 일원이 되어 보일 거라고. 그래서 카르멘 아르테미스를 뛰어넘어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교류전에 나가 아폴론 가문의 강함을 세상에 보여줘야만 했다.
“레아 님을 위하여!”
탁ㅡ.
마이야르가 빛의 검을 들고서 땅을 박찼다. 딱히,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그의 속도를 눈으로 쫓을 수 없었다. 템플 기사들이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세이드와 마이야르의 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들었다.
다섯 발자국.
곧장 달려오는 마이야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세이드는 초조함을 버텨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수가 방패라고만 믿게 해야 했다.
네 발자국.
마이야르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세이드는 공격 마법을 짜냈다. 그의 발밑에서 불의 장미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세 발자국.
마이야르도 무작정 돌진하는 건 아니었다.
익숙한 검을 들자, 잠들어 있던 그의 본능이 조금씩 살아났다. 신성 기관에서 날카롭게 다듬었던 감각이 그에게 속삭였다.
더 넓게, 더 빠르게
몸에 익었던 검술과 암살 방법들이 빠르게 조합되고 흩어졌다. 세이드를 제압할 가장 최고의 한 수가 드디어 나왔다.
두 발자국.
세이드의 불꽃의 장미가 바로 지금 만개했다. 화려하게 핀 불의 장미 꽃잎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화려한 만큼 눈이 즐거운 마법. 그러나 이 장미들은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다. 이 마법은 공격과 방어가 한 번에 가능했다. 적의 공격을 막고 자연스럽게 상황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이 마법이 없었다면 그는 작년 선발전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레아 님은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마이야르는 갑작스럽게 휘날리는 꽃잎에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세이드의 마법 자체를 베어내듯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자국.
콰앙 쾅ㅡ.
마이야르의 검이 닿기도 전에, 마나 지뢰가 사방에서 터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