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05화 (105/265)

델포이 대표 선발전(1)

* * *

유피테르가 시트시거를 박살 낸 다음 날.

델포이 아카데미의 곡소리는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실종되었던 아카데미 생들이 한 번에 모두 귀환했기 때문이었다. 슬픈 일도 있었으나, 살아있다고 생각되는 모두가 돌아온 것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교수진과 델포이 가드들은 실종자들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대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실종되었던 아카데미생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뜨니 델포이 병원에 있더라구요?”

“누군가를 본 거 같은데. 아, 오흐트. 그녀를 본 것 같기는 한데…. 역시, 꿈이었겠죠?”

오흐트를 봤다는 실종자들의 말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오흐트는 아카데미로 유학 온 평범한 마법사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수들은 그들의 말을 우스갯소리라며 넘겼다.

일개 아카데미 생이 마족과 싸워 이긴 후 구출하는 영웅이 된다?

이는 상식선에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조디악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교수들도 아카데미생보다는 강했다. 그러나 퍼스트 서클의 끝을 달리는 교수들도 마족 앞에 서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아르테미스 가문의 마법사단도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전멸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아카데미생이 이 일을 해결했을 리는 없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티아 학장의 휴가도 도마 위에 올랐다.

부임 후 거의 휴가를 보내지 않았던 피티아 학장. 그녀가 첫 공식 휴가를 낸 것만으로도 아카데미는 술렁거렸다. 사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더 논란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욕적으로 실종 사건을 해결하려는 그녀였다.

피티아 학장이 이 모든 사건의 진범이다.

아니다. 피티아 학장은 델포이 아카데미를 너무 사랑해서 충격을 받은 것 뿐이다.

제프리스 부학장이 누명을 씌워서 피티아 학장을 내쫓은 것이다.

진범을 잡기 위해 학장님께서 떠나신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휴가를 내자 지라시들이 엄청나게 돌았다.

피티아 학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건 부학장 제프리스 리히베인이었다.

“피티아 학장께서는 잠깐 회복기를 가졌다. 모두 델포이의 이름을 명심하고 정진하도록.”

제프리스는 아욕이 강한 인물이었다. 중년의 신사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그의 눈은 학장의 자리를 분명히 좇고 있었다. 델포이의 학장이 되기만 한다면 명예와 실리를 다 얻을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델포이의 아카데미 생들은 마법사 겜블링이라 불리는 교류전을 앞두고 불안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는 없었다.

갑작스럽게 많은 일이 벌어져 어수선한 상황.

유피테르의 연구실에는 세 사람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치유 마법의 대가인 오흐트가 마법으로 카테리나를 진찰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빛의 마나는 환자의 몸을 꿰뚫어 보았다.

“좋아. 마스터의 여동생. 이제 마나를 모아 봐.”

“알았어요.”

카테리나는 오흐트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오라버니가 데려온 사람을 의심할 리 없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서, 왼손을 펴 마나를 집중시켰다. 늘 하던 연습이었다.

우우웅ㅡ.

아르테미스의 이름에 맞는 푸른 마나가 주먹 위에서 구를 형성했다. 강렬한 푸른색의 마나는 빛나는 재능의 결정체였다. 폭발적인 기운을 안정적으로 모으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평상시와 같은 몸 상태였다면 여기서 멈췄을 것이었다.

“이게 대체…?”

카테리나는 처음 보는 현상에 경악했다. 자신이 만든 푸른색 구체가 거무튀튀한 색으로 물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에 잠들어 있는 마왕의 심장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없앨 수 없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오라버니?”

“기억을 돌려줄게. 기다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수정궁

“오, 오라버니?”

유피테르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대륙에서 얼마 안 되는 정신계 마법을 그는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달빛을 머금은 마나를 사용해 카테리나에게 걸었던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그녀를 위해 지웠던 기억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마, 말도 안 돼. 내, 내가 이런 짓을 하다니.’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

카테리나는 밀려오는 기억의 파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가 세 조각이 날 것 같은 두통이 쏟아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런 고통은 수도 없이 해온 퀘스트 덕에 익숙했다.

감히, 오라버니에게 맞서다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제가 미쳐서 오라버니께 마법을.”

“아직, 다 돌아온 게 아닌가.”

카테리나는 유피테르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나오자 당황했다. 전부 기억하는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더 있는 것일까?

기억이 재생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태엽이 돌아가자, 카테리나는 조금 더 전의 시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려버렸다.

“제, 제가 아카데미 학생들을….”

카테리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은 자랑스러운 델포이 학생회장이었다. 힘에 취해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다.

이건 꿈이어야만 했다.

“걱정 마. 다른 이들의 기억은 모두 지워뒀어.”

아카데미생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 유피테르의 마법 때문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그의 마법은 사람의 정신마저 조작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받은 것들은 인간이 갖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힘이었다.

“오, 오라버니. 어째서! 저는 손에 피를 묻혔다구요.”

카테리나는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오라버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자신은 죗값을 받아야만 했다. 동료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은 자신에게 학생회장의 배지를 달 자격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사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피테르의 생각은 달랐다.

“너도 피해자야.”

“네…?”

“지금 네게는 마왕의 심장이 함께 뛰고 있어. 그걸 한 건 너이지만 네가 아냐.”

“그게 뭐죠?”

카테리나가 천재라고 불릴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맞았다. 그래도 아직은 아카데미의 일원에 불과했다. 유피테르처럼 인간 이상의 존재들을 수시로 만나보지도 않았고, 아는 것도 적었다.

“설명해 오흐트.”

유피테르는 마왕과 마족의 전문가인 오흐트에게 설명을 맡겼다. 오흐트는 마법으로 허공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티폰 리벨리온

“티폰…? 이라면 마족의 왕이죠?”

“맞아. 근데 이런 설명은 마스터가 해도 되지 않을까 나보다 더 잘 알잖아?”

오흐트의 글씨는 의외로 이쁜 편이었다. 글자 하나하나에 힘이 느껴졌고, 읽기도 편했다. 그녀는 카테리나와 유피테르를 번갈아 가면서 보고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마스터는 조용히 웃을 뿐 이야기를 이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왕 티폰은 오라버니가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심장이 있는 거죠?”

카테리나는 오흐트에게 물었다. 이미 죽은 마족의 심장이 어떻게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부하인 그녀라면 혹시 대답해줄지도 몰랐다.

“고대의 마족들. 그러니까 신에게 반기를 든 마족들은 강했어.”

“어느 정도로요?”

“지금의 마족 공작들이 애송이로 보일 만큼.”

“정말로요?”

카테리나는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그녀는 마족 공작 중 한 명과 대면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설쳤다. 생생한 기억에 잠드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마족 공작 에키드나.

그녀가 선보였던 그림자 마법은 공포 그 자체였다. 공작의 칭호에 맞게 에키드나는 다양한 마법을 사용했다. 간단하게 쓴 마법들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죽었다.

“마스터에게 티폰이 죽은 후. 공작들은 힘을 모아서 마왕의 씨앗이라는 아티팩트를 만들어냈어.”

“진짜 씨앗은 아니군요?”

“마왕의 씨앗이란 은어야. 차기 마왕을 탄생시키기 위한 아티팩트를 의미하지.”

“마족들에게도 만일의 사태라는 게 있나 보네요.”

카테리나는 의외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족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우는 아이도 마족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뚝 그칠 정도로. 그런 그들에게서 인간미를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오래 살수록 신기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현재로서는 네 마나에 마족의 검은 마나가 뒤섞이는 정도지만, 아마….”

“아마? 끝까지 이야기해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대처하니까요.”

뒷말을 흐려버린 오흐트. 카테리나는 그 태도에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알아챘다. 눈과 귀가 있는데 저런 어색한 연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오흐트 넌 연기는 하지 마라.”

“흐, 흥 나도 알고 있다구”

유피테르는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오흐트를 바라보았다. 칼리스토의 막내는 발연기를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마왕의 씨앗은 이미 네 심장이 되었어. 이제, 마왕의 심장 정도로 불릴 수 있겠네. 그 아티팩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차기 마왕을 키워내는 거야. 저번처럼 폭주할 가능성도 있어. 아니, 분명히 폭주할 거야.”

“제게 주어진 시간은요?”

카테리나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차기 가주로 키워진 경험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몰라. 그래서 내가 이곳에 남은 거야.”

유피테르는 원래 마족만 처리하면 델포이에서 떠나려고 했다. 애초에 성녀의 부탁 때문에 온 것이었다. 옴팔로스가 두 번째 열쇠가 아닌 이상 더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또, 에키드나가 보여주었던 반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성국에서 요양하라고 하고 싶지만, 안 되겠지?”

“대표 선발전과 교류전이 있어요. 학생회장인데 당연히 빠질 수 없죠.”

유피테르 역시 여동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기 가주로서 판단력과 책임감을 기르도록 강요받았다. 빠른 판단에 이은 과감한 결단은 그의 아버지의 장점이었다. 물론, 자기애가 너무 강해 가문과 황실 그리고 인류를 배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리나야. 잠시만 고개를 숙여볼래?”

유피테르의 말에 카테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가 뭘 할지 예상이 가지도 않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유피테르는 준비했던 물건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성스러운 마나가 서려있는 펜던트였다. 그가 차고 있는 가주의 펜던트보다는 작은 형태였다. 전투 중에도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찰랑거리는 은발을 넘겨 여동생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었다.

“펜던트네요. 이 마나는 클리오나와 같은…?”

카테리나는 유피테르가 준 펜던트에서 익숙한 마나의 향기를 맡았다. 성국 출신 클리오나와 1학년 때부터 같이 다녔기에 어떤 속성의 마나인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재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성국에 있던 아티팩트야. 마족의 마나를 정화하는 기능을 겸비했지.”

“하지만, 성국출신 아티팩트는 외부로 반출이 불가능하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추측은 맞았다.

이 펜던트는 유피테르가 교황에게서 받은 선물 중 하나였다. 교황은 대행자인 그와 긴밀하게 지내고 싶어 원칙에서 살짝 눈을 돌렸다. 유피테르는 성국의 아티팩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마스터에게 불가능이란 없지. 소중한 물건이니까 잘 다뤄야 해?”

마왕의 씨앗은 카테리나와 지나치게 상성이 좋았다. 칠흑의 마나는 그녀의 푸른 마나에 완벽하게 융합해버렸다. 이제는 ‘마왕의 심장’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오흐트의 비기인 원상 복귀도 통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 대표 선발전 개회식을 하러 가자.”

펜던트의 기능을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마족의 마나를 주기적으로 정화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이상은 사치였다.

이야기를 마친 유피테르는 마스터와 오라버니에서 교수로 돌아갔다.

실종 사건이 끝난 이상 아카데미는 대표전을 치러야만 했다. 마족 때문에 헤매던 사이 교류전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카데미 종합 평가 1위의 자리를 유지하려면 당연히 올해도 교류전에서 우승해야만 했다.

카테리나와 오흐트는 선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 유피테르를 뒤로하고 떠났다. 연구실에 홀로 남은 유피테르도 복장을 갖춰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온 카테리나는 델포이의 제복을 갖춰 입었다.

‘내가… 이걸 입을 자격이 있을까?’

학생회의 망토와 회장의 배지를 보며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은 동료를 배반한 살인자였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은 밝힐 수 없었다. 교류전을 앞두고 델포이를 흔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복 위에 학생회의 문장이 그려진 망토를 두르고, 학생회장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를 착용했다.

그리고서는 선발전이 이뤄질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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