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씨앗(15)
* * *
고대 마법.
과거 잊혀진 시대의 마법은 현재의 마법과는 완벽하게 달랐다. 현재의 마법 체계는 퍼스트 서클로 시작해 세컨드 서클과 서드 서클로 이어졌다. 지금 살아 숨 쉬는 자들은 신의 축복인 마나를 태어나면서부터 쓸 수 있었다.
급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법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는 극히 적었다. 오히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 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성국의 심판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카데미의 역사서에 ‘악마 사냥’이라는 표현이 정착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다.
그나마 유피테르는 카르멘이 버티고 있는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감히, 조디악의 마도사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고대에는 지금과 다른 분위기였다. 마법이란 희귀하면서도 무서운 현상으로 여겨졌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자들이 극히 소수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모두가 마나를 가지고 있었으나 마나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자들이 극히 소수였다.
그곳은 제로 서클이란 게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1부터 9까지의 숫자로 강함을 나누었다.
당시에는 ‘마도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나의 속성에 연연해서 싸우지도 않았다. 과거의 마법사들은 다양한 속성을 연계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싸웠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전술 병기들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고대의 사람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생각해냈다. 그중에 하나가 아티팩트였다.
옴팔로스가 에키드나의 마법이 고대의 마법과 닮아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고대 유산의 총체인 그가 잘못 볼 리는 없었다. 시트시거는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옴팔로스의 말을 부정할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에키드나는 도망쳐버렸나. 뭐, 상관없어. 어차피 할 일은 변하지 않았으니.”
“걔는 어차피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니까. 이제 우리들의 시간이라고. 유피테르.”
“우리가 아니라 내 시간이겠지. 이런 대화도 이제 지치는군.”
오랫동안 이어진 힘겨루기에 유피테르는 싫증이 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에키드나 때문에 작은 소란이 벌어졌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고유 결계 속 절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유피테르였다.
‘젠장. 어떻게 하면 마왕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거냐. 유피테르. 지금의 너의 모습은 마치….’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이 연속되자 시트시거는 이를 깨물었다. 밖에서 보일 정도로 피가 새어 나왔다. 뿔이 달린 강대한 마족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시트시거의 전신은 유피테르의 마법에 난자당해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었다.
‘저건 들었던 것보다 더 괴물이잖아….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질 않아. 난 여기서 죽는 건가. 자유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마왕을 단숨에 죽여버린 인외(人外)의 괴물.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지처럼 여기는 시트시거에게 여러 번 들었었다.
옴팔로스는 겁을 먹어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목숨을 걸었던 그 순간에 에키드나가 나타나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결심이 흔들리자 오히려 공포만 켜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유피테르는 그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어린 시절부터 얼음성에서 벌어지는 온갖 암투를 겪은 그에게 그 정도는 식은 포션 먹기였다. 옴팔로스의 생각 정도야 차 마시듯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더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네. 이렇게 약한 너희들과는 말할 가치가 없어.”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달빛 보름검
유피테르의 마법이 신호라도 되는 듯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서서히 바뀌었다. 밤하늘이 환한 달빛으로 가득 차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이빨을 그의 적에게로 향했다.
달빛 마나는 존재감만으로도 고대 마법의 유산과 마족 공작을 압도했다.
“무… 무슨? 이런 마법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어. 이건 마법이 아니라 마치 신의….”
진작에 전의를 잃은 옴팔로스는 결계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무언가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게 전부였다. 흥미를 잃어버린 유피테르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어차피 여동생을 치료할 방법이 없는 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나…. 이라(Ira)!”
옴팔로스가 눈앞에서 죽어버렸음에도 시트시거는 흔들리지 않았다. 옴팔로스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었다. 그는 고대 아티팩트에 깃든 정령과 비슷한 존재일 뿐이었다. 본차만 무사하면 언제라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숨기고 있던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사용했다. 파벌 산하의 마족들이 준 게 아닌, 공작 본연의 힘이었다.
철컥.
그는 망설이지 않고 마왕과 대공에게만 허용된 전용 무기를 꺼내 들었다. 카르멘 비제가 가지고 있던 아바라치아처럼 이라 역시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시트시거는 그 힘을 이용해서 고유 결계를 뚫고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시트시거는 역시 도망쳤나. 두 번 만에 빈틈을 찾다니 역시 공작급은 다르군. 뭐, 상관없어.”
구멍을 뚫고 도망친 시트시거를 보며 유피테르는 웃었다.
처음부터 시트시거가 전용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걸 꺼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원래, 자신보다 월등한 강자랑 싸울 때 패를 숨길 여유 따위는 없지 않은가? 이라(IRA)라면 기적을 만들 수 있었다.
마왕 티폰을 죽일 때, 이미 이 기술을 보여준 적 있었다. 물론, 공작들은 처음보는 고유 결계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다. 이 결계가 막강한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기술을 두 번 본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태초의 마족 중 하나인 시트시거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유피테르의 생각대로 고유 결계를 빠져나갔다. 달의 마나 특유의 성질로 인해 당분간 회복에 전념하겠지만 말이다.
‘어째서 고대 마법을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지. 시트시거.’
흑막이 도망쳤으니 쫓을 필요는 없었다. 유피테르가 원했던 건 아카데미의 평화와 카테리나를 치료할 방법이었다. 오히려 마음에 걸리는 건 고대 마법을 쓰지 않는 점이었다.
우우우웅.
유피테르는 펼쳐져 있던 고유 결계를 해제했다.
절대자들의 싸움이 벌어진 신전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곳곳이 파괴되어 더는 이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옴팔로스가 ‘그녀’를 찾을 열쇠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유피테르는 신전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산 정상에 부는 바람은 시원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은빛 머리칼이 화려하게 휘날렸다.
“상황은 다 끝났어 마스터?”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유피테르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회복과 지원을 담당하던 오흐트였다.
“오흐트인가. 트리아는 어디 가고 네가 왔지? 정보 담당은 그녀일 텐데.”
유피테르의 의문은 당연했다. 트리아가 가진 고유 마법과 능력으로 인해 칼리스토의 정보를 담당하던 건 늘 그녀였다. 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오흐트는 정보와는 늘 동떨어져 있었다. 당연히, 이번 작전에서도 후방에 대기시켰었다.
“트리아가 많이 다쳐서 말이지. 내가 와버렸어.”
“트리아가 다쳐?”
갑작스러운 오흐트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던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자연히 높아졌다. 칼리스토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트리아가 다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미간이 올라간 마스터를 보며 오흐트가 이야기를 이었다.
“피티아 학장의 몸을 이상한 마족이 지배하고 있더라고. 인질극을 해결하느라 트리아가 조금 무리했어.”
“상태는?”
“몇 주 쉬면 충분히 회복할 것 같아. 이건 담당 치유사의 의견이니까 확실하다구.”
보고할 때에는 어색함을 숨기지 못했으나, 치유사로서 말할 때는 달랐다. 오흐트의 목소리에서 확연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유피테르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기조였던 오흐트는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상황을 묘사했다. 상황이 끝나고 동료들을 치료하러 간 것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트리아를 필두로 한 그쪽에서는 격전이 벌어졌을 게 분명했다. 자세히 보니 오흐트의 제복은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분명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칼리스토들이 애를 먹을 정도의 전투였다면, 따라갔던 클리오나와 유알라냐가 걱정되었다.
“수고했다. 나머지는?”
“유알라냐는 원래 쉼터에서 대기했었구. 리오나는 마스터의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을걸? 기숙사에서 기다릴 거라고 했던가…?”
다른 일행의 동선에 대해 확신이 없는지 오흐트의 말꼬리가 점점 늘어졌다.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치유할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처럼 군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런 이유에서 그녀가 가진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대기조로 편성되곤 했다.
‘일단 끝이 나긴 났나.’
모든 게 유피테르의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옴팔로스가 두 번째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한 줌의 모래로 변해버렸다. 성녀가 건네주었던 단서는 의구심만 키운 채 흐지부지 끝이 나버렸다.
마족들은 ‘그녀’와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대대적으로 방해할 줄은 제아무리 유피테르라고 해도 몰랐다. 페르세포네를 어떻게 돌파했는지도 의문이었다. 또, 어디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봉인에 대한 건 자신과 신만이 아는 비밀이었으니까.
질투의 공작 에키드나 역시 큰 문제로 다가왔다.
그녀는 달의 몰락 사건 때부터 묘한 움직임을 보였었다. 빌어먹을 아버지와 동료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 정보를 넘겼으니까. 고유 결계를 부수지도 않고 들어온 것도 수상했다. 적어도 그녀는 무기를 사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어떤 목적으로 행동하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흐트 여동생의 상태를 확인해줄 수 있나?”
“뭐야뭐야? 마스터의 여동생이 이곳에 있었던 거야? 트리아가 괜히 고생했네. 애들은 무사히 구출했으니 언제든지 좋아.”
“웃을 일은 아니니 따라와.”
오흐트는 평상시처럼 유피테르에게 어리광을 부렸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여동생의 몸에 깃든 마왕의 씨앗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읽은 오흐트는 말없이 유피테르를 따라갔다.
카테리나를 가둔 결계는 그리 멀지 않았다. 유피테르는 결계에 도착하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묵묵히 마스터의 뒤를 따르던 오흐트는 유피테르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아야야… 아프잖아 마스터! 이게 무슨…?”
쉬지 않고 단련해온 유피테르의 등등 딱딱했다. 오흐트는 빨개진 코가 괜찮나 확인했다. 다행히도 잠깐 부어오른 것뿐이었다. 갑자기 멈춰서버린 마스터에게 한마디 일침을 날려주려던 오흐트는 뜻밖의 상황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들의 앞에 있는 건 유피테르의 특기 마법 중 하나인 얼음 나비의 꿈이었으니까. 아름다우면서도 어떤 마법보다 강력한 결계를 오흐트가 모를 리 없었다. 자매들과 유피테르가 진행하는 훈련을 치유역으로서 늘 지켜봐 왔기에.
“오흐트 부탁한다.”
유피테르는 칼리스토의 막내에게 말하며 마법을 해제했다. 그러자 은발의 학생회장, 카테리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잠들어 있는 카테리나의 몸 이곳저곳에는 싸웠던 흔적이 여실히 남아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지, 환자부터.”
마족이라도 붙잡아뒀나 생각하던 오흐트는 한 번 더 놀랐다. 그 안에 카테리나가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카테리나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분명히 마스터의 것이 맞았다.
카테리나를 만나러 간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저런 식으로 갇혀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대체 누가 감히 마스터의 여동생을 이렇게 해놓았나.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으나, 우선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어차피 상황 설명은 나중에 들어도 되니까.
오흐트 식 치료 마법 ― 원상복귀
카테리나의 상태를 확인한 오흐트는 바로 마법을 사용해 치료했다. 그녀의 마법의 효능은 확실한지 카테리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오흐트는 제대로 치유가 되었나 카테리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완벽히 없어졌고, 저주와 같은 것들도 없었다.
평소에 늘 보던 카테리나 아르테미스의 상태로 완벽히 돌아왔다.
“역시, 이거 마스터가 한 짓이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동생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