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03화 (103/265)

마왕의 씨앗(14)

* * *

카르멘 아르테미스.

유피테르에게 있어 생각하기도 싫은 그 사람이 기어코 화제에 올랐다. 피가 이어진 아버지란 존재는 지우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문을 직접 몰락시키고, 인류를 배반한 카르멘 아르테미스는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그러나 카르멘과 동료였던 에키드나가 등장한 이상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카르멘과 아직까지도 동료라고?”

심사숙고 끝에 유피테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맞아. 카르멘은 생각보다 쓸모가 많은 패인데에. 이렇게 자기를 흔들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한 거 아닐까아.”

“어째서지?”

에키드나 리벨리온.

질투의 공작이자 전 마왕비, 마왕 대리 등 다양한 직위를 가지고 있는 마족.

여태까지 그녀와 함께 행동한 심장이 두 개인 존재는 없었다. 그녀를 존경하는 마족들도 에키드나와 함께 다니는 건 피했다. 티폰이 죽은 이후 더욱 종잡을 수 없어진 그녀의 곁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질투의 공작 산하 파벌만이 울며 딱딱한 빵 먹기로 남아있었다.

이미 던져진 주사위의 숫자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으음… 사소한 거까지 물어보는 건 예의가 없는 거 아닐까? 여자의 비밀은 지켜줘야지.”

“웃기는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나도 웃고 싶으니까 알려줘! 같이 웃어야 좋지.”

유피테르는 대화가 잘 이어지다 딴 길로 새어버리자 한숨을 푹 쉬었다. 여전히 에키드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늘 보아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야말로 경계 대상 1순위였다.

항상,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척을 하지만, 진심이 담겨있지 않아 보였다.

얼음성에 숨겨져 있던 ‘그녀’를 찾기 위한 열쇠를 노리는 것부터 수상했다. 에키드나를 비롯한 마족들이 ‘그녀’를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에키드나는 열쇠까지 찾아냈고, 고유 결계에 침입까지 했다.

“네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치자. 교환조건은 뭐지?”

“으음… 뭐가 좋을까아. 찐한 키스? 아니야. 이게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아는데 고작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없어어.”

유피테르의 제안에 에키드나는 중얼거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상기된 얼굴만 놓고 보면 정말 사랑에 빠진 소녀로만 보였다.

“에키드나! 우릴 타르타로스까지 데려가 줘! 사례는 나중에 하겠다.”

그걸 지켜보던 시트시거가 고통을 참고서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같은 종족이었으니까. 에키드나와 그는 마족의 시작부터 함께한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다.

티폰이 죽은 이후 서먹서먹해졌지만, 과거의 추억이 모두 날아가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시트시거의 자그마한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서 사라져버렸다.

같은 마족의 구조요청에도 에키드나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말로 전 마왕비가 맞는 것인지 옴팔로스가 의심할 정도였다. 유피테르와 이야기할 때의 사근사근함은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살기마저 담겨있었다.

그녀가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빼내 줄 거라 굳게 믿던 옴팔로스는 갑작스런 살기에 몸이 굳어버렸다.

“에키드나. 협상 조건은 정했어?”

“아, 아직이야. 네가 말을 시켜서 생각할 시간만 잃었잖아! 죽고 싶니 시트시거? 우리의 애정이 담긴 이야기를 방해하지마. 그럼 너희들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으니까.”

유피테르는 협상에서 조금이나마 우위를 잡기 위해 에키드나를 재촉했다. 에키드나는 대화의 화살을 시트시거에게 돌리며 분을 풀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었나?’

졸지에 비난의 대상이 된 시트시거.

그는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소꿉친구와 다르게 유피테르의 태도는 무심했으니까. 요리보고 저리 봐도 달콤한 연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협상 조건은 네가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유피테르 내 사랑.”

밤하늘 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에키드나가 제안했다. 사실, 그녀도 마음 가는 대로 이곳에 들이닥친 것뿐이었다. 유피테르가 보고 싶은 밤이었으니까. 딱히 준비해둔 계획은 없었다.

유피테르와 수 싸움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멍청한 짓이었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에키드나가 목표로 하는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유피테르가 ‘그녀’라고 부르며 따르는 존재의 가르침이 옳았다.

“열쇠를 포기하고 너희 셋 다 내 손에 죽는 건 어때? 그러면 모든 게 내 손으로 들어오는데?”

살기를 잔뜩 머금고서 한없이 낮아진 유피테르의 목소리.

유피테르는 그렇게 선언하고서 마나를 끌어모았다. 훈훈했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이질적인 힘이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고유 결계 속에서 요동치는 마나는 그의 적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자, 잠깐 유피테르 그 부분을 좀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나?”

지독하게 상처를 후벼 파는 달의 마나에 시트시거가 제일 먼저 반응했고,

“마, 맞아요. 부, 부, 부탁드릴게요.”

어느새 시트시거의 곁으로 돌아간 옴팔로스도 겁에 질린 상태로 애원했다.

“이게 아닌데…. 그래도 좋아. 너무 멋져 유피테르. 조금 더, 조금 더 부탁해. 바로 그 그거란 말이야.”

광기 서린 질투의 공작 에키드나.

그녀는 유피테르의 이런 모습에서조차 매력을 느꼈다. 그가 티폰을 죽인 원수라는 사실은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티폰도, 계획도 그리고 ‘그녀’에 대한 것도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홀함만이 남았다.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게 만드는 지독한 달의 마나는 언제나 치명적인 매력을 품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 그건 에키드나에게는 구미가 당기는 감정이었다.

“너 정말로 미쳤어 에키드나? 유피테르가 아무리 좋아도 그는 마족과 상극이라고.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정신이 아닌 건 너겠지. 분노.”

이미 달의 포로가 되어버린 에키드나는 싸늘하게 반응했다. 시트시거가 친구인 건 맞았지만, 어디까지나 그녀가 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마족이 ‘힘’을 중요시하는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시트시거 정도라면 10명이 덤벼도 에키드나의 발끝조차 따라오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도, 마족의 적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티폰을 제외한다면 그녀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었다. 마족들은 오를 수 없는 산을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파괴를 좋아하는 것이지, 자신들의 존재가 지워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 너 정말로 저 자식을 사랑하기라도 해?”

“설마, 날 공격하기라도 할 거야? 고작 네 주제에? 그런 몸으로 뭘 할 수 있을지 기대되네.”

“너, 너 진짜!”

에키드나의 도발에도 시트시거는 화를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유피테르의 마법이 만든 쓰라린 상처는 점점 악화하고 있었으니까. 태생적으로 높은 서클을 가지고 태어나는 마족들이기에 더욱 마나에 의존했다. 마나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지금, 다른 방법은 없었다.

‘타르타로스를 벗어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었지.’

그랬다.

창조신 레아가 직접 만들어 놓은 결계, 페르세포네는 복잡하고 기괴했다. 마족들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의 경지는 감히 넘볼 수 없었다. 마족의 시작을 기억하는 세 마족이 머리를 모아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타르타로스는 나갈 수 없는 감옥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오만의 공작이 결계를 돌파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완전하게 새로운 방법은 아니었다. 신의 결계가 마족만을 인식하고 발동한다는 사실에서 기반한 단순한 소거법이었다.

마족을 가두는 결계는 마족이 아니게 되면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정말로 가능한지 실험을 하려는 도중, 그 사건이 발생했다.

유피테르와 빌어먹을 ‘그녀’가 등장해서 마왕 티폰을 죽인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몰랐었다. 신에게로의 반란이라고 말하면서 친구를 죽였으니, 아마 결계를 파훼할 방법을 찾는 것을 들켰을지도 몰랐다.

‘유피테르… 여기서 고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나와 에키드나를 죽일 생각이냐. 방해되는 말은 미리 치워놓겠다는 생각 다 보인다고.’

티폰이 죽는 그 날 밤에도 시트시거는 유피테르가 가진 힘의 끝을 보지 못했다. 지금의 유피테르는 그때보다도 성장한 것 같앗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마법을 자유자재로 펼쳐내고 있었다.

마치 ‘대행자’라는 칭호를 누군가 살포시 떼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달빛 얼음

“적당히 하지?”

절대 영도의 목소리가 서로의 탓을 하는 시트시거와 에키드나의 행동을 멈추었다.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마법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후후… 역시 내 사랑. 못 본 사이에 너무 멋있어졌네?”

시트시거와 에키드나는 말싸움을 멈추고서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공작급 마족 중에서도 최상위를 달리는 두 명인데도 얼음 마법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족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었다.

이 공간은 유피테르의 생각을 투영한 공간이었고, 그들은 갇혀있는 죄수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유 결계로 인해 한층 더 강해져 있는 얼음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유피테르…. 더 놀고 싶지만, 착한 어린이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에키드나는 무언가 방법이라도 있는지 여유로웠다. 시트시거와 다르게 고유 결계가 그녀에게는 공포를 주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고혹적인 웃음을 뿌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협상은 여기서 끝인 건가봐아? 그럼 이만 돌아가도록 할게. 할 일을 내버려 두고 온 거라 카르멘이 잔소리할 게 뻔해서.”

“누구 마음대로 고유 결계에서 빠져나간다는 거지?”

유피테르의 가슴속 한구석에 불안감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고유 결계의 주인을 제외한다면 갇힌 이들은 그 어떠한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의지를 이었기에 유피테르의 결계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었다. 그의 결계는 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달의 공간이었다.

“내. 맘. 잘 있어. 또 봐.”

에키드나는 작별의 인사를 하고서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의 행동은 절대로 나가지 못한다는 유피테르의 말을 비웃는 것 같았다. 에키드나가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영롱한 빛깔의 얼음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대체. 어떻게….”

시트시거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바보인 것은 맞았지만, 상식은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탄탄한 근육으로 먹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고유 결계를 다른 이가 마음대로 출입한다는 일은 그의 세계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옴팔로스는 에키드나가 사라진 곳을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시트시거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고대 마법 같아 보였는데요. 아빠.”

“뭐라고? 그래서는 결계를 돌파할 수 없었을 텐데. 고대 마법은 결계를 빠져나오기 위해 버려야만 했다. 에키드나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같은 위험을 부담했을 거다. 네가 잘 못 본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제가 인간이 아니라 마도의 정수라는 건 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으시죠? 방금, 그 마법식 어디선가 본 것 같아요. 분명히 봤는데 왜 기억이 안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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