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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02화 (102/265)
  • 마왕의 씨앗(13)

    * * *

    1명의 마왕과 7명의 마족 공작이 단 한 명의 인간에게 트라우마를 갖게 된 바로 그 날.

    마족의 살아있는 역사 마왕 티폰은 전사했고, 그의 아내이자 마족 공작 에키드나는 압도적인 힘에 홀려 미쳐버렸다. 시트시거는 감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의 힘에 놀라면서도 희열감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분노’의 공작이자 싸움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마왕과 시도 때도 없이 싸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근육 뇌라고 놀림받아도 살아온 세월이 있기에, 그 정도 생각은 가능했다.

    마왕은 희망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시트시거는 신이 만든 결계에 갇혀 너무나 따분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었다. 마왕은 바빴고, 에키드나는 늘 그렇듯이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공작들은 자신과 싸우는 걸 꺼렸다.

    만족스러운 싸움을 하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는 강적이 출현했다. 달빛을 잔뜩 머금은 것 같은 은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무한한 자신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마왕 티폰이 신과 맺은 계약을 어겼다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들고 온 그분과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그들은 단 몇 분 만에 티폰의 약점을 정확하게 공략하고, 공작들을 힘으로 압도했다. 유피테르의 고유 결계 때문에 다른 마족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고위 마족들은 그들의 왕을 구하지 못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공작들은 그날의 일을 절대로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달빛 초승검

    티아나의 생명의 불꽃을 얼려버렸던 그 마법이 다시 한번 더 펼쳐졌다. 이에 시트시거는 현재로 돌아와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도 절망적인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옴팔로스! 본체로 도망가. 여기서 다 죽어봤자 무의미하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니까. 내가 결정을 지을 거예요. 아빠. 거기서 지켜봐 주세요. 아빠는 제가 꼭 이곳에서 탈출시켜드릴게요.”

    옴팔로스는 아버지의 간절함 외침에도 고개를 저었다. 고대 아티팩트의 인간 형태는 언제든지 해제할 수 있었다. 혼자 도망가지 않은 건 시트시거만큼은 잃기 싫다는 강인한 마음이었다. 본체가 살아있으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자신과 다르게 시트시거의 심장은 단 한 개였다.

    “아주 감동적이야. 그럼 슬프지 않도록 둘이 동시에 보내주도록 할게.”

    완전히 악역으로 굳어진 유피테르는 이야기의 결말을 선언했다.

    유피테르는 공중에서 대기하던 초승달 모양의 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달빛의 검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옴팔로스에게로 날아갔다.

    최종 선고의 시간이었다.

    ‘미안, 티아나. 제대로 죽지도 못하는 나를 용서해줘. 그래도 이 방법이라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 거야.’

    옴팔로스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마법들을 보고서도 주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어차피 이건 본체가 아니었다. 당분간 인간 형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게 분명했지만, 아티팩트가 살아있는 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유피테르의 마법이 옴팔로스에게 작렬하려고 하는 그 순간.

    “잠깐. 이쪽을 봐줄 수 있을까아?”

    이곳에서 절대로 들려서는 안 되는 매혹적인 목소리가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기운이 가득 담겨있었다.

    “에키드나?”

    처음으로 유피테르와 시트시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겹쳤다. 뱀의 혀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를 내는 마족은 세상에 한 명뿐이었다.

    ‘응…?’

    죽음을 각오했던 옴팔로스마저 슬며시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티아나가 아닌 것은 확실했다. 티아나의 목소리는 저런 식으로 끈적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옴팔로스를 지배했다. 마족의 계약자라면 무언가 비장의 한 수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자신 역시 아직 선보이지 않은 마지막 패가 남아있는 것처럼.

    “안녕 내 사랑? 정말 오랜만이지. 너무 보고 싶었다고.”

    옴팔로스의 자그마한 소망은 한순간에 짓밟혔다. 그곳에 모습을 나타낸 여성은 티아나가 아니라, 에키드나였으니까. 아티팩트가 꿈꾸던 달콤한 희밍은 풍선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갔다. 비어버린 그의 손에는 한 줌의 씁쓸함만이 남아있었다.

    “에키드나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비밀인데. 애기도 아니고 하나하나 다 이야기해야 하니? 이 누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바빠요.”

    “너…. 대체.”

    “왜, 불만이라도 있어? 시트시거. 넌 그냥 멍청이처럼 이곳에 있으면 돼. 네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끄드득.

    어이없는 에키드나의 태도에 시트시거는 이를 갈았다. 그의 분노를 보여주듯 그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컸다.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아냈다. 에키드나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와 에키드나가 힘을 합친다면 그 앞에어 있는 건 파멸뿐이었다.

    그의 감정은 활화산처럼 마그마를 뿜어내고 있었으나, 마족들의 위기라는 상황은 이를 간신히 얼어 붙이는 데 성공했다. 이성이란 이름의 사슬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에키드나. 어떻게 고유 결계를 통과했지?”

    유피테르는 심각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에키드나에게 물었다. 이건 절대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유 결계의 사기적인 능력은 불가침성에서 기반했다. 일정 영역을 마나로 완전하게 지배해 신과 같은 힘을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게 이 마법이었다. 결계 공간 안에 갇힌 자들의 마법을 무효화하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애초에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마나를 원하는 형태로 배열해야 했다. 주문이니, 시동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이 과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끝마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자신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법을 펼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마법사들의 실력이란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어이, 에키드나 날 보라고!”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에키드나의 모습에 시트시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분노의 공작을 가볍게 무시하고서 유피테르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밀은 여자의 무기란 말이야. 아무리 자기라도 알려줄 수 없어.”

    “뭐? 그런 표현 쓰지 말라고 했지.”

    “그나저나. 이게 뭐로 보여?”

    이번에도 에키드나는 듣고 싶은 것만 들었고,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고유 결계의 파훼법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그녀는 눈웃음으로 넘어갔다. 그리고서는 유유히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석, 아니 펜던트인가.”

    유피테르의 은색 눈동자는 정확했다. 에키드나가 오른손으로 흔들고 있는 건 묘한 붉은빛을 띠는 보석이 박힌 펜던트였다. 그녀는 유피테르의 시선을 받은 게 기뻤는지 신이 나서 설명했다.

    “맞아. 펜던트야. 이쁘지? 갖고 싶지? 그런데 이걸 어디서 구했게. 궁금하지 않아?”

    “그래서 그걸 왜 보여주는 거지?”

    에키드나의 움직임에 따라서 펜던트도 같이 춤췄다. 마치, 소를 유혹하는 투우사의 붉은 깃발처럼.

    유피테르는 그 말을 평소와 같은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굳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자랑할 정도라면 펜던트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줄곧, 에키드나를 무심하게 보고 있던 유피테르의 시선이 펜던트로 옮겨갔다. 확실히, 펜던트는 고가의 물품처럼 보였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마감과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온갖 영애들의 독점욕을 불타오르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였다.

    ‘설마…. 아니, 에키드나가 그걸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 어째서, 어떻게?’

    펜던트의 보석을 눈여겨보던 유피테르의 마나 감지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여왔다. 이곳에 그의 편은 없었기에,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나 세계의 탄생과 함께한 에키드나의 눈치는 유피테르 그 이상이었다.

    “눈치챘구나아? 이 펜던트가 무엇인지를. 자기가 언제 알아볼까 사실 기대하고 있었어.”

    “어떻게 네가 그걸 가지고 있는 거지? 그게 어디 있는지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네가 그녀보다 위일 리 없어.”

    “궁금해? 내가 이걸 어디서 얻었는지?”

    “그래. 궁금하다.”

    ‘그녀’에 관련된 일이라면 유피테르는 얼마든지 자존심을 굽히고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자신보다 소중한, 세계 그 자체였으니까. 애초에, 그녀를 되찾는 것이 지금의 유피테르에게 유일한 목적이었다.

    “으음…. 그러면 말이지이….”

    급한 것은 유피테르라는 것을 에키드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꼬리를 길게 끌며, 무슨 조건을 걸지 곰곰이 생각했다. 여기서 어떠한 조건을 걸어도 유피테르는 거절할 수 없었다.

    매력적인 은발의 마도사가 지금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에 불과했다. 창조된 존재들 중에서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그가 고뇌하고 있었다. 유피테르가 섣부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키스…. 어때? 지금이라면 특가로 키스 한 번 정도로 이걸 넘겨줄 수 있어.”

    “에키드나 너 제정신이야? 지금 네가 상대하고 있는 건 괴물이라고. 너와 나 그리고 티폰마저 뛰어넘은 신의….”

    에키드나는 마족의 이름값을 하려는 듯 뜬금없이 로맨틱한 단어를 꺼냈다. 그게 시트시거에게는 위험한 줄타기로만 보였다. 이미 티아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옴팔로스 마저 잃을 긴박한 분위기에 저런 말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에키드나가 들고 있는 펜던트가 대체 어떤 가치를 지닌 물건인지는 몰랐다. 만약, 저게 유피테르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거라고 해도 저 방법은 너무 바보 같았다.

    괴물에 대해 이해하는 순간, 자신도 괴물이 되어버리니까.

    “그게 가짜가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유피테르는 날이 선 목소리로 에키드나에게 물었다. ‘그녀’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 아직도 그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걸 갖고 온 존재가 에키드나라는 게 걸렸다.

    반역자 티폰을 죽일 때부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집착을 보여주던 에키드나.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달의 몰락’ 사건 때, 받았던 수정구슬이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약간의 함정이 섞여 있었으나, 마족의 본질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에키드나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뜻에 반기를 든 마족이었다. 게다가 리벨리온의 성을 가지고 빌어먹을 아버지와 함께하고 있었다.

    ‘여기서 손을 잡는 게 괜찮은 생각일까.’

    키스 한 번에 그녀를 찾을 열쇠일지도 모를 물건을 받는 건 분명히 이득인 거래였다. 그러나 명석한 그의 두뇌가 속삭이고 있었다.

    한쪽에게만 지나치게 유리한 거래는 분명 무언가의 함정이 숨어있다고.

    “시간을 많이 주면 또 이상한 술수를 부릴 거지? 싫으면 관둬. 그냥 돌아갈 거야. 나도 몰래 가지고 나온 거라서 말이야. 내 동업자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자기가 가장 잘 알 텐데?”

    에키드나는 유피테르의 무표정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갈등을 눈치채고 있었다. 은발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흐름을 놓치지 않고 두 번째 카드를 내놓았다.

    바로, 카르멘 아르테미스라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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