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101화 (101/265)

마왕의 씨앗(12)

* * *

헐레벌떡.

유피테르의 마법이 없어진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티아나가 시트시거에게로 다가왔다. 옴팔로스 역시 쭈뼛쭈뼛거리며 뒤따랐다. 시트시거의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아무리 보아도 유피테르가 ‘악’이었고 시트시거가 ‘열혈의 주인공’인 것만 같았다.

“이건, 정말 너무해요. 어떻게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만들 수 있죠? 유피테르 교수님 당신은 양심이란 게 없나요?”

티아나가 악에 받쳐 유피테르에게 소리쳤다. 공포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고유 결계를 부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공간 속에서 그들에게 승산은 없었다. 마족 공작도 처참하게 박살이 나는 데 인간이 뭘 하겠는가.

“어, 없어?”

이번에도 옴팔로스는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마족 공작의 패배를 눈앞에서 보는 건 충격이었으니까.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백 번도 넘게 유피테르의 힘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지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지금 여태껏 알지 못했던 공포라는 감정을 뼈저리게 배워나가고 있었다.

‘아빠가 고작 저런 마법에 쓰러지다니 말도 안 돼. 고작 고유 결계를 사용했다고 상황이 이렇게 바뀌는 거야?’

고유 결계 속에 갇히고 나서부터 야심 차게 준비했던 계획은 전부 어그러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피티아 학장에게 마왕의 씨앗을 심지 않은 게 잘못이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유피테르의 힘을 너무 낮게 상정한 것일까?

“날 자극한 건 너희들이잖아? 마왕의 씨앗이란 폭탄을 던진 후에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지. 아니고야 말고.”

유피테르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손가락질을 숙명처럼 달고 살았다고 해도 그 역시 카르멘의 피를 이은 사람 중 하나였다. 카테리나 아르테미스가 델포이에서 ‘폭군’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피는 끝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아르테미스의 직계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 것’을 절대로 남에게 빼앗길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만약, 빼앗긴다고 하더라도 되찾아 오는 것은 물론, 적에게 그 이상의 고통을 주는 게 당연했다.

이것이야말로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유일무이한 법칙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먼저 마법을 쓴 건 누구였지? 가만히 있는 리나에게 마왕의 씨앗을 심은 건?”

티아나가 격분해서 소리치려고 했지만, 유피테르는 조소하며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얼음 마법의 사용자다운 지독한 냉기가 유피테르의 은색 눈동자에서 뿜어나왔다.

티아나는 유피테르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맞는 말이었기에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잠자는 유피테르의 코털을 건드린 건, 다름 아닌 자신들이었다.

“그만해 티아나. 어차피 우리와 유피테르는 평행선이야. 끝내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시트시거는 이곳에서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얼어붙었던 손은 아직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오므리고 펴고를 반복했다. 그러나 반응은 여전히 두 박자 느렸다.

이런 몸 상태로는 유피테르와 싸울 수 없었다. 승패를 떠나, 전사로서의 의지가 울고 있었다.

신의 대리자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와의 싸움은 이렇게 불편한 공간이 아니라 최고의 무대에서 최선의 몸 상태로 이뤄져야만 했다.

그게 강한 자에 대한 당연한 예의였다.

‘여기서 이 둘을 잃을 수는 없어.’

말 그대로였다.

고대의 유산으로 계획에서 코어 역할을 하는 옴팔로스. 게다가 티아나 역시 장래가 유망한 마법사였다. 이대로만 성장하면 세컨드 서클을 이룩한 마도사의 경지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마족으로서, 인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패는 막중하다고 부하들이 말했다.

결계 밖에서 마족들을 위해 일하는 계약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근육으로 가득 찬 시트시거의 뇌도 그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유피테르. 패배를 인정하겠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을 결계 밖으로 내보내 줄 수 없겠나?”

“싫은데? 내가 왜 네 말을 따라야만 하지?”

“큿….”

“네가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 말이지? 안 그래? 시트시거 허밍웨이. 어리석은 공작이여.”

시트시거 허밍웨이.

마족 공작의 풀네임을 감히 가볍게 부르는 인간은 없었다. 일개 마족도 인간에게는 벅찬 상대였으니까. 마도사 쯤 되어야 마족에게 승부를 걸어볼 수 있었다. 귀족에게 가문명이 붙는 것처럼 마족 공작들과 마왕에게도 성이 있었다.

인간과는 다르게 그들의 성을 붙여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벽을 깬 강자들뿐이었다.

“유피테르…. 대리자가 되었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닌가?”

“힘을 가진 자는 마땅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그것이 강한 힘을 가진 자의 숙명이다. 기억나지 않나? 네가 했던 말이다.”

죽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도 시트시거는 격노했다. 그야말로 ‘분노’의 칭호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대기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고통스러운 상처에 몸부림을 치는 야수도 엄연한 포식자였다.

“웃기는군. 아직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봐? 큰소리를 칠 힘이 있으면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싱긋 웃는 유피테르의 모습은 차갑다는 것을 넘어 사악해 보였다.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열정적이고 자상한 교수로 인정받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 다음으로 소중한 카테리나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기에 화를 내고 있었다.

분노는 시트시거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도록 살짝 벌을 주도록 할까?”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달빛 초승검

서늘한 달빛을 받은 초승달 모양의 얼음검이 유피테르 주변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머금은 그 칼날들은 전설 속에 전해지는 사신의 낫처럼 죽음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하지 마. 그러지 마!”

옴팔로스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공포심에 눈을 감아버렸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죽음이 느껴졌다. 아카데미생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며 감정이란 걸 알고 싶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서걱.

살이 베이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넓지 않은 공간이었기에 더욱 섬뜩하고 생생했다.

살금.

옴팔로스는 살며시 눈을 떴다. 제일 먼저 확인한 건 아버지 같은 시트시거였다. 얼음 마법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어 보였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죽음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한 명의 동료가 남아있었다.

“티, 티아나? 왜 그래 말을 해봐.”

왼쪽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피로 물든 수정이 보였다. 그 속에는 잠든 것처럼 편안한 표정의 티아나가 갇혀있었다. 난잡한 주변과 대비되는 그 평온함이야말로 티아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장난기 많던 옴팔로스가 슬픔이라는 감정에 대해 처음으로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티아나, 티아나. 제발 눈을 떠봐. 예전처럼 같이 이야기하자. 응? 날 혼자 두지 마. 다시 지켜만 보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단 말야.”

옴팔로스는 티아나가 잠든 수정을 손으로 치며 서글프게 울었다. 단단한 수정을 쳐대도 그의 손에는 피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붉디붉은 피 대신 무색의 마나 입자가 그 역할을 묵묵히 대신하고 있었다.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는 상황에 옴팔로스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가깝게만 느껴졌던 인간과의 거리를 이런 식으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아티팩트 정신체의 한계였다. 감정을 깨달아도 그는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 꼭 이렇게 해야만 했냐. 저 애도 너의 제자였잖아?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던 거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너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내게 있어 소중함이란 단어는 몇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좁디좁은 개념이라는 걸 몰랐나?”

시트시거는 아들 같은 옴팔로스가 슬퍼하는 모습에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웃고 있는 유피테르가 너무나도 가증스러웠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마법을 못 쓰고 큰 상처를 입은 마족은 인간 어린아이보다도 연약했다.

“왜, 왜 죽인 거야!”

옴팔로스가 슬픔에 잠겨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아니,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주는 공포를 이겨내고 유피테르에게 뛰어 들어갔다

“돌려줘! 티아나를 누구보다 착했던, 웃는 모습이 이쁘던 그 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해주란 말이야!”

옴팔로스는 분노를 가득 담아 죽이고 싶은 은발을 가진 교수에게 주먹을 날렸다. 생각하고 일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몸이, 실제로 존재할 리 없는 그의 몸이 그렇게 하라고 부추겼다.

이런 짓은 소용없다고 머리는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화풀이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게 세계의 거대한 의지다. 인간은 흐름에 따를 뿐이야.”

열정으로 가르치던 제자를 죽이고도 유피테르는 담담했다. 달빛 반사하는 은색의 눈동자에는 눈물 한 방울조차 고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카르멘처럼 너무나 냉혹한 사람이었다.

‘안 돼. 옴팔로스. 거기서 멈춰. 그 뒤의 말은 절대로 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야.’

시트시거는 옴팔로스가 선을 밟고 있다는 걸 알았다. 힘들게 동료로 맞이한 고대 아티팩트는 폭주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증거로, 실체화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시트시거의 작은 바람은 그저 바람인 채로 끝이 나버렸다.

“지금 당장 티아나를 살려내지 않으면, 네 여동생을 죽여버리겠어. 죽이고 또 죽여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줄 거야. 마왕의 씨앗….”

“뭐? 다시 말해봐.”

선을 뛰어넘어 줄넘기하는 옴팔로스의 발언은 유피테르는 물론, 시트시거까지 놀라게 했다. 유피테르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러나 결코, 헛것을 들은 게 아니었다.

“빨리. 티아나를 돌려내라고 네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자, 원하는 대로 다시 말했어. 나도 죽일 거야?”

상황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유피테르에게 있음에도 옴팔로스는 거침이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아티팩트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자유로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분노했다.

티아나의 죽음에 큰 상처를 받은 옴팔로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분노하고 있는 모습 너무 잘 어울려. 옴팔로스 그게 네 소원이라면 들어줄게.”

유피테르는 시트시거와 옴팔로스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보고서 웃었다.

이 자리에 있던 유일한 인간은 죽어버렸는데, 마족과 아티팩트가 인간처럼 행동하는 게 너무나도 우스웠다. 티아나가 죽었다고 한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건 유피테르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카르멘과 아르테미스 가문이 죽도로 미웠지만, 그 가치마저 버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달의 가문에는 ‘그녀’의 숨결이 닿아 있었다. ‘그녀’의 숭고한 뜻은 그날까지 반드시 이어져야만 했다.

‘유피테르 너에게 있어서 가족을 건드린 게 그분을 모욕하는 것만큼 화가 날 일인 거냐.’

시트시거의 시선은 유피테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마왕 티폰이 죽었을 때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욱 절망적이었다. 당시에는 유피테르가 이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지 느끼지 못했다. 그저 절대자의 반려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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