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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100화 (100/265)
  • 마왕의 씨앗(11)

    * * *

    이미 신전 밖은 어둠이 가득한 밤이었지만, 고유 결계로 만들어진 칠흑의 밤은 더욱 어두웠다. 그림 같은 밤하늘 속에는 흔하디흔한 구름 한 점조차 없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어둠은 바라보는 존재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곳에서는 흰색의 그믐달만이 홀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 거 같은데. 이게 무서운 거야 아빠?”

    고유 결계라는 말에 움찔움찔했던 옴팔로스가 시트시거에게 물었다. 결계를 눈으로 보자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야기로 들었던 것만큼 엄청난 위력을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을 덧칠한 검은색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다.

    공간을 가득 메운 유피테르의 마나가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시트시거와 마족이 잊을만하면 또다시 경고했었으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유피테르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들은 이야기를 실제로 겪자 겁에 질린 건 사실이었다. 고대 마법진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생명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과 동료들이 우위에 있었다. 여차하면 티아나의 독 마법으로 유피테르를 암살할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게 유피테르 교수님의 진짜 마법….”

    핑크색 머리카락을 지닌 티아나는 고유 결계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 마법은 마도사만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의 꿈이었다. 동시에 죽음의 숨결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마법이었다.

    옴팔로스 옆에 서 있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심호흡밖에 없었다. 그녀의 일행이자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시트시거와 옴팔로스는 사람이 아닌 마족들이었다. 유피테르 교수 역시 초월자였다.

    이런 싸움에서 인간은 무력했다.

    “역시 인간은 …의 마나를 견디기 힘든 건가. 고작 이 정도로 떨어서야 어디 가서 마족의 계약자라고 말하겠나.”

    상황을 지켜보던 시트시거는 앞으로 걸어 나와서 두 명을 지키듯이 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뒤를 돌아 티아나에게로 걸어갔다. 유피테르가 두렵지도 않은 지 시트시거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그리고서 망토를 아공간에서 꺼내 두려움에 떨고 있는 티아나에게 걸쳐주었다. 그 손길은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것처럼 따스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그런데 무슨 마나라고 하셨죠. 잘 들리지 않는데…?”

    티아나는 망토를 둘러준 시트시거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녀가 계약한 마족은 분노의 공작 파벌에 있는 마족이었다. 그의 직접적인 계약자가 아닌데도 보살펴준다는 건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의 말 중 한 부분이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고유 결계 속에는 바람 한 점 불고 있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마나가 일렁거리는 게 다였다.

    세계의 의지가 그 단어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손을 쓴 것 같았다.

    “유피테르는 옛 …의 가호를 받은 자들 중 하나다. 아니, 정확히는 아르테미스 가문에 가호가 서려 있다고 해야 하나.”

    “가호인가요.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봐요. 잊혀진 시대와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밖에 모르겠어요.”

    티아나는 재빨리 기억으로 채워져 있는 도서관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가호라는 이름을 가진 책을 끝내 찾지 못했다. 마족이 강제로 지웠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트시거와 이야기를 하니 떨림이 조금은 덜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유 결계 속에서도 분노의 공작이 편안하게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연인다운 달콤함을 느낄 수는 없었으나, 시트시거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만 떠들어 시끄러우니까.”

    시트시거와 티아나의 사이가 좋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유피테르의 목소리는 낮았다.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는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거 누가 분노를 담당하는지 알 수가 없는 모습이야? 유피테르. 공작, 아니 마왕이라고 해도 믿겠어? 이 모습 그녀가 보면 어쩔래? 굉장히 실망할 텐데.”

    “닥쳐. 이라(Ira) 너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았어. 배신자인 너희들은 그분을 언급할 자격도 없어.”

    “휘유. 정말로 단단히 화가 난 건가? 오히려 좋은데 그 모습. 그때랑은 또 다른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유피테르는 옴팔로스 일행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차하면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구속을 풀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반면, 시트시거의 모습은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였다. 고유 결계 속이어서 원하는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오랜 기간을 살아온 마족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까?

    시트시거는 어떻게 싸울지 고민했다. 시간은 절대로 그의 편이 아니었다. 고유 결계에 갇힌 이상 마족 공작인 그조차도 마법을 쓸 수는 없었다.

    시트시거 식 유성 마법 ― 유성탄

    ‘역시, 마법을 쓸 수 없군. 그렇다고 마왕의 씨앗을 넘겨줄 수는 없어. 마왕이 없다면 타르타로스는 버티지 못한다. 확실한 구심점이 필요해.’

    시트시거는 혹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나 싶어 마법을 사용해보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마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고유 결계는 완성되어버렸다.

    시트시거는 당당한 태도와는 다르게 꽤나 초조했다. 모략을 좋아하지 않는 그가 옴팔로스를 회유해서까지 계획을 진행한 이유는 하나였다. 마왕 티폰의 죽음 이후 마족들, 특히 공작들이 뭉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의 짐작대로 마왕의 씨앗을 이용하는 계획을 시트시거가 세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방법을 요청한 것도 그였고, 승인한 것도 그였다. 여러 계획이 올라왔으나 마족을 일깨울 방법은 이것 하나뿐으로 보였다.

    공작이라는 지위를 떠나, 가장 오랫동안 살아온 마족으로서 분명히 나서야 할 때였다.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타르타로스는 분열되어 지리멸렬해질 것이 분명했다.

    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 시트시거의 눈앞에 있었다.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었다.

    ‘신의 대리자를 고작 마족이 처단할 수는 없지.’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는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에게 전해지는 서클의 개념으로 그의 한계를 측정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대륙 전쟁에서 패배한 그들에게 남아있는 건 타르타로스를 둘러싼 결계뿐이 아니었다.

    저주.

    다른 종족보다 월등히 강한 마족들이라도 신이 내린 저주를 피할 수 없었다. 마나와 서클은 결국 창조물들의 발악에 불과했다. 만들어진 존재들은 결코 창조주를 뛰어넘지 못했다. 마왕 티폰도, 마왕비 에키드나도 그리고 시트시거도 신의 앞에서는 그저 엎드려서 빌 뿐이었다.

    신은 단어 그대로 신이었다. 감히,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헛된 발악이야. 씨앗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만 죽어.”

    유피테르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는 하늘에 유유히 떠 있는 달빛을 받으며 시트시거에게로 걸어갔다. 그 무엇도 그를 멈출 수 없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달빛 얼음의 구슬

    유피테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역시 아르테미스의 피를 이은 자이자, 카르멘의 아들이었다. 아르테미스가 심장이 얼어붙은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그 역시 차갑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녀’와 약속했기에 최대한 상냥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일 뿐.

    달빛을 머금고 시린 냉기를 내뿜는 얼음 알갱이들은 아름다웠다. 푸른 구슬들은 적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유피테르의 마법은 날아가는 궤도마저 꽁꽁 얼려버렸다.

    ‘어쩔 수 없나. 상대가 상대이니 그걸 쓸 수밖에.’

    시트시거는 날아오는 마법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최고위 마족인 그에게 유피테르의 마법은 무섭다기보다는 특별했다. 오랜 기간 살아온 만큼 별별 마법들을 겪었음에도 유피테르의 마법은 늘 새로웠다.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애초에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긴장을 풀면, 티폰을 보러 가게 될 게 분명했다.

    우우웅ㅡ.

    시트시거는 아공간을 열었다.

    빌어먹을 저주가 몸을 옭아매는 게 느껴졌다. 늘 자신의 편을 들어주었던 마나는 신의 뜻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미지의 힘이 그를 적대하고 있었다.

    강인한 마족의 육체라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구만!”

    살갗을 태우는 것과 같은 고통에 시트시거가 부르짖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고유 결계를 넘어 그들이 있던 신전에 메아리 퍼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보석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그리고서는 곧바로 유피테르의 마법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청아한 소리와 함께 보석이 산산조각 나며 마나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을 확인하고 시트시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작 마법 하나 막자고 이걸 써버리는 게 아깝긴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티아나와 옴팔로스를 잃을 수는 없었다. 특히, 고대의 마법을 학습한 옴팔로스는 꼭 필요한 자원이었다.

    “고대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라고 해도 내 결계를 벗어날 순 없어.”

    유피테르는 폭풍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폭풍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그라들었다. 잠잠해진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얼음의 구슬뿐이었다. 시트시거가 준비하던 비장의 무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쾅. 쾅. 쾅.

    얼음의 구슬이 무자비하게 시트시거를 공격했다. 한 번의 공격이 아니었다. 고유 결계의 힘으로 강화된 마법은 쉬지 않고 분노의 마족 공작을 괴롭혔다. 구슬이 그에게로 향할 때마다, 몸의 곳곳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 아빠? 많이 아파?”

    “시트시거 님.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으세요.”

    신분이 제일 높은 시트시거가 자신들을 보호하며 대신 공격받자 두 사람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옴팔로스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고, 티아나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제일 강하긴 했으나 이런 식일 필요는 없었다.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유난 떨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명색이 공작이다. 이 정도 공격에 쓰러지지 않는다.”

    “정말로 눈물겹다. 꼴에 계약자들이라고 지키려는 거야? 마족답게 좀 행동해.”

    “어떻게 고대 아티팩트마저 무효화하는 거냐. 그때 네 결계는 이 정도가 아니었다.”

    “말이 많아. 아, 설마 저것들 앞이라고 멋있는 척하는 거야?”

    시트시거는 계속해서 쏟아지는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더는 마법이 소용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유피테르는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자 끝날 것만 같지 않던 달빛 구슬들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곳곳에 즐비하던 얼음들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유피테르가 만든 얼음이 지독하게 차가웠던 탓인지 뿌연 수증기가 만들어지더니 서서히 시야를 가렸다. 잠시 후, 드러난 시트시거의 육체는 정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시트시거의 몸 여기저기에 동상의 흔적이 가득했다. 마족마저 부러워하는 그의 강인한 육체도 얼음 마법에게는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다. 으스스한 절대 영도의 얼음은 설령, 마왕이라고 해도 피해갈 수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악당인 것만 같아 기분이 나쁜걸. 너희들이 세계의 악이라고.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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