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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99화 (99/265)
  • 마왕의 씨앗(10)

    * * *

    “네가 정말로 마족의 계약자라면 내가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어.”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마나를 숨기려고 해도, 유피테르의 감시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가 감지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미세한 마나였으니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존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녀’는 예외였지만, 세계의 이치를 비튼 틈에 사는 칼리스토들과 마족의 왕(王) 역시 이 감지법을 피해 가지 못했다.

    “당신은 가장 강력한 후보를 자신의 손으로 제외한 거예요. 상상해봐요. 어떤 아카데미생이 초보 교수에게 고민을 상담하러 갈까요?”

    “확실히 그건 그렇네. 유피테르 교수라도 이건 맹점이었나 봐?”

    티아나는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옴팔로스 역시 유피테르의 흔들리는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신의 사랑을 잔뜩 받은 유피테르가 헤매는 모습은 흥미진진한 볼거리였다.

    “솔직히 그 부분은 의심했었다. OT 때 갑자기 고민 상담을 하러 오는 아카데미생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당시의 네게서는 분명히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어. 어떻게 된 거지.”

    유피테르는 ‘그녀’의 대리자였기에 다양한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목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뽐내는 가주의 펜던트 이외에 손에 끼고 있는 반지들도 있었다. 또,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아공간에서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도 많았다.

    아티팩트들 중에서는 당연히 상대방의 거짓말을 분간하는 것들도 있었다. 무려 신탁을 받은 교황이 직접 만든 거라 성능은 확실했다. 이 아티팩트는 티아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살아 있다고 말하기 힘든 옴팔로스 역시 피해가지 못했다. 그래서 티아나가 어떤 방식을 사용했는지 궁금했다. 빨리, 비밀을 파헤쳐서 아티팩트를 보완해달라고 성국에 요청해야 했다.

    “그때는 그게 진심이었으니까요.”

    “기억을 삭제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방법은 그런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고대에는 정신계 마법이 제재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을 쳤다.

    정치적 암투나 다른 종족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으니까. 세뇌, 기억 제거 등 다양한 정신계 마법은 어떠한 공격 마법보다 유용했다.

    정보적 우위만 있다면 적의 매복에 미리 대처할 수도 있었고, 보급품들을 중간에 가로채는 것도 가능했다. 심지어 적의 에이스를 세뇌해 든든한 아군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정신계 마법과 이를 막아낼 수 있는 방어 마법이 엄청나게 발전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잊혀진 역사 속의 이야기였다. 현대 세아니아 대륙에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다. 이마저도 성국과 각 제국의 엄중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우와.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네. 역시 신의 대리자.”

    옴팔로스는 은발의 교수가 한 번에 정답을 맞혀버리자 놀랐다. 이 모든 방법은 자신과 이곳에 왔던 마족이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한 것이었다. 그를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마족 두 명이 결계를 돌파했다고 말했는데, 결국 들켜버리고야 말았다.

    “맞아요. 마족 계약자로서의 기억을 완전히 삭제해달라고 했죠. 마족의 힘은 정말로 특별해서 그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했죠. 교수님에 대한 말은 엘프 귀가 될 정도로 많이 들었어요. 어떠한 상황에도 들키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했답니다.”

    “음음, 맞지맞지.”

    티아나는 마족과 처음 만났을 때가 너무나 그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에 느꼈던 마족의 힘은 학장이나 교수들의 경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응원단장이 되어버린 옴팔로스는 기쁜 표정으로 연신 맞장구를 쳤다.

    “옴팔로스가 고대의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힌트를 줬는데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조금은 설렜다구요?”

    티아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모든 기억을 떠올린 후 옴팔로스와 이야기를 할 때, 그 누구보다 두근거렸던 건 그녀 자신이었다. 여러모로 고생해서 만든 계획이 어디까지 먹혀들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유피테르는 고대 마법을 자세하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그렇다면 정신 마법으로 그를 속이는 방법이 실패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마왕을 되살린다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마족의 힘을 얻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족 피아모가 티아나를 찾아온 그 날, 그녀의 세계는 완벽하게 변해버렸으니까.

    “대체 언제부터 기억을 되찾은 거지? 사람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데.”

    “정말요? 교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면 그 마족의 힘이 엄청나다는 거네요.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서 만족이에요.”

    티아나가 만났던 마족은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성국과 연이 있는 유피테르라면 이 정도 함정은 쉽게 돌파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처음 계획을 변경하고, 그녀에게 정말로 저주를 걸었다.

    저주의 영향으로 티아나는 마족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잊었고, 마나 감소증을 앓게 되었다.

    “마족의 저주라는 것을 깨닫고 치료할 때까지 네 행동과 말투에는 변화가 없었어.”

    “와, 교수님이 틀리는 때도 있네요? 정답은 마족의 마나가 빠져나간 후였습니다!”

    유피테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답을 알 수 없었다. 티아나는 늘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약간 폭력적인 것처럼 변한 것 같다고 오흐트가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유피테르는 이렇게 답했다.

    그건 마법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기뻐서 그런 게 분명하다고.

    티아나는 대단하게만 보이던 유피테르 교수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속 깊이 기뻐했다. 은발의 교수는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그랬다.

    또, 두뇌 싸움에서 리투아 4대 공작을 이긴 것만으로도 그녀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

    “그럼, 마족이 굳이 널 기절시켰던 이유가…?”

    “지금 예상하시는 그대로일걸요?”

    의미심장한 티아나의 웃음을 보고서 유피테르는 퍼즐 조각을 모두 맞추는 데 성공했다.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강의에 임하던 티아나. 눈에 띄던 분홍색 머리카락의 마법사가 오늘만큼은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후우….”

    유피테르는 한숨을 푹 쉬고서 마족 일행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아이처럼 웃고 있는 옴팔로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티아나 그리고 전투의 흉흉함이 남아 있는 분노의 마족 공작 시트시거.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만 나왔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왜 몰랐을까. 왜 바보처럼 옴팔로스의 말을 들었을까. 왜 굳이 이용하려고 했을까. 그냥 처음 만났을 때 옴팔로스를 죽이고 정보를 빼앗았으면 이런 슬픈 사건들을 애초에 막을 수 있었는데.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강해졌다. 이건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자신만큼 고대 마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넘겨준 아티팩트들을 활용하고 칼리스토과 함께 대처했다면 다른 결말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분명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래서는 그녀가 부탁한 일을 하기는커녕, 그녀가 열심히 쌓아왔던 모든 것을 망칠지도 몰랐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에게 받은 끝없는 은혜와 사랑을 이런 식으로 되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 그럼 이제 그 자리에서 비켜주시죠. 일의 끝을 봐야 하니까요. 겸사겸사 여동생분도 데려가야겠네요. 그 표정을 보니 마왕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니까요.”

    유피테르의 상념을 깨운 건 티아나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예상외의 전개에 그녀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는데도 기울어져 버린 상황은 그야말로 행운의 연속이었다.

    “그래그래. 이만 우리의 승리를 인정해. 유피테르 교수. 당신은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에서 계속 있어봤자 시간 낭비야.”

    옴팔로스 역시 상황 변화에 민감했다. 승기가 있다고 느껴지자마자 유피테르를 놀렸다. 빙결 지옥이 펼쳐질 때와 다르게 지금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은발 교수의 존재감은 여전했지만, 죽일듯한 살기는 이미 사라져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맞아. 지금 상황에서 당신은 무력해. 누구도 구할 수 없지. 당신이 그렇게 소중히 하던 여동생도, 당신의 부하들도 결국에는 다 우리의 생각대로 될 거야. 거기서 그냥 지켜만 보고 있으라고.”

    유피테르는 옴팔로스의 도발을 듣고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뚫려버린 천장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발의 긴 머리가 그의 얼굴을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그의 극성팬들이 그 모습을 본다면 영상 구슬에 저장하려고 날뛸 정도였다. 물론, 마족과 계약자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 명 모두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힘을 합치고 있었다.

    이 미묘한 협력 관계는 유피테르를 쓰러트려야만 더욱 공고히 다져질 수 있었다. 그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획에 다양한 함정들을 더한 끝에 유피테르를 몰아넣을 수 있었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허나, 아직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란 존재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마왕과 7명의 마족 공작보다 높았으니까.

    “그래. 너희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난 무력해. 게다가 한 가지 방법밖에 모르는 바보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유피테르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흩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은색 눈동자는 얼음같이 차가웠다. 어떠한 것도 비추지 않는 눈동자는 그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 어쩌려고 그래? 그런 식으로 무게를 잡아도 더는 방법이 없을걸? 이미 당신의 몸에는 독이 들어가 있으니까.”

    옴팔로스는 순간적으로 그 모습에 겁을 먹었다. 빙결 지옥을 사용했을 때와는 달랐다. 얼어붙어 죽을 것 같지도 않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저 눈동자가 너무나도 두려웠다.

    분노에 휩싸인 것보다 공허한 눈동자가 무서울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 그런 마법을 사용하는 건 느껴지지 않았는데?”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지셨나 봐요? 제 독 마법의 위력은 교수님께서 가장 잘 알고 있으실 거라고 믿어요.”

    그런 허풍을 쳐봤자 소용없다는 표정에 발끈한 티아나가 곧바로 대답했다. 유피테르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무언가 이상한 마나가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어차피 난 그런 거로는 죽지 않아서 유감이네. 보여주도록 할게. 무력한 자의 힘이라는 걸”

    옴팔로스의 좋지 않은 예감은 이윽고 현실이 되어 그들을 덮쳤다.

    유피테르 식 고유 결계 ― 달의 그림자 : 그믐

    시동어가 끝내자 공기가 전율했다. 카르멘과 싸웠을 때 잠시나마 생겼던 고유 결계와는 시작부터 달랐다.

    그들이 있던 신전의 천장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밤하늘이 펼쳐졌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을 덧칠하려는 듯 뿜어나가는 밤하늘 사이로 그믐달이 고개를 내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은 손속을 두지 않았다.

    ‘그믐달…?’

    옴팔로스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그믐달을 보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흔히 볼 수 있는 노란색의 달처럼 따스한 느낌이 아니었다.

    고유 결계 속 만들어진 세계는 마족 일행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고유 결계…?”

    유피테르의 마력에 티아나가 몸을 떨며 말했다.

    단순히 결계를 펼친 것인데도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렸다.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같았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긴장을 풀려고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예상했던 대로 고유 결계를 사용하는군. 그때와 완전히 같은 이 광경은 정말로 그립구나.”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는 티폰이 죽었을 때를 생각하며 턱을 어루만졌다. 수염은 없었으니 그럴듯한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고유 결계에 갇혔는데도 무서움을 느끼기는커녕 호승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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