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98화 (98/265)
  • 마왕의 씨앗(9)

    * * *

    마족들의 땅 타르타로스

    그곳을 다스리는 유일한 마왕 티폰(Typhon)과 그를 지지하는 7명의 마족 공작들.

    교만(superbia), 탐욕(avaritia), 질투(invidia), 분노(ira), 음욕(luxuria), 식욕(gula), 나태(acedia).

    7명의 마족 공작들은 각자의 성격과 전투 방식에 맞는 칭호를 얻었다. 동시에 칭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고대 아티팩트를 소유하고 있었다.

    애초에 공작들은 평범한 마족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 아티팩트까지 사용하게 되면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공작의 세대교체는 없진 않았지만, 극히 적은 편이었다.

    마족들이 투쟁과 피를 좋아한다고 해도,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트시거는 태초부터 역사를 지켜보았던 마족으로 세대교체를 하지 않았다. 호쾌하고 전투를 사랑하는 성격 덕에 분노의 파벌은 점점 켜졌다. 대륙 전쟁 이후 태어난 신인 마족들에게 시트시거라는 이름은 동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태초의 마족은 이제 세 명밖에 남지 않았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유서 깊은 칭호를 가지고 있는 시트시거를 비웃었다. 약해 보인다는 말은 공작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유피테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정말 할 말이 없다고.”

    시트시거 식 유성 마법 ― 유성벽

    시트시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빙결 지옥을 막기 위해 방어벽을 펼쳤다.

    이대로 가다간 얼음 동상이 될 판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전에 죽어버릴 게 분명했다. 마족 중에서도 단단하다고 소문난 그의 육체가 힘들어하고 있었다.

    시린 냉기에 손가락 끝이 움찔움찔하며 감각이 둔해졌다. 머리 위의 두 뿔은 계속해서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이 뿔은 단 한 번도 틀린 느낌을 주지 않았었다.

    “마왕의 씨앗을 찾아내고 사용할 거면 해결책도 제대로 가지고 있어야지. 안 그래? 역시 신에게 버림받은 종족은 그것밖에 안 되나? 아니면 시트시거. 네가 그냥 멍청한 걸까. 그리고 옴팔로스 넌 에고로 태어나기엔 너무 쓸모없다는 거 알지?”

    유피테르는 지금 누가 보더라도 완전히 악역이었다. 피해자의 가족이었지만, 그걸로 변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단어 하나하나가 시트시거와 옴팔로스의 심장을 후벼팠다. 싱긋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역시, 유피테르는 아르테미스의 이름을 이은 자였다.

    “네, 네가 감히 감히 아빠를 모욕해? 유피테르 교수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건 못 참아.”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화를 참아왔던 옴팔로스가 결국 폭발했다. 유성벽 뒤에서 냉기를 피하고 있었던 그는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마치 아들인 옴팔로스가 아버지 시트시거를 지키려는 듯한 훈훈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옴팔로스는 눈을 빛내며 본체에 새겨져 있는 고대의 마법식을 빠르게 훑었다.

    ‘이 마법은 막힐 게 분명해. 이것도 아냐. 좀 더 강한 마법이 필요해. 저 교수를 상대하려면 평범해서는 안 된다고.’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그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마법사들의 당연한 상식이었다.

    옴팔로스는 양손을 머리 위로 넓게 펼치며 마법진을 불러내었다.

    촤르르륵ㅡ.

    화려한 색깔과 다채로운 크기를 자랑하는 다양한 마법진이 신전을 가득 메웠다. 푸른색으로 가득한 신전 속에서 마치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난 바쁘다고 귀찮게 하지 마. 멍청아.”

    하지만 옴팔로스의 분노는 유피테르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고대 마법이 담긴 마법진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으나, 얼음의 세계에서 그들이 나설 자리는 없었다.

    얼음 속성 마나의 본질이리고 할 수 있는 마나에 대한 간섭이 시작되었으니까.

    “이, 이게 무슨…?”

    늘 자신의 뜻을 이루어주었던 마법진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슬프게도 제대로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피테르는 단지 빙결 지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마법진이 사라지다니.

    “그래, 바로 저거야. 위협적인 능력을 갖춘 티폰도 마법사의 근원을 부정하는 저 힘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

    뒤에 있던 시트시거가 씁쓸해하며 말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가 마법사 최대의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저거였다. 마법사들의 피나는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아르테미스 초대 가주 나이아드를 제외하면 ‘정지’를 실현한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다. 카르멘 비제도 카테리나도 그저 ‘감속’을 통해 적의 마법이 전개되는 속도를 늦추는 게 고작이었다.

    그 누구도 초대 가주의 ‘정지’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저주받았다고 소문이 난 유피테르 아르테미스가 마족의 땅에서 절대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그런 건 사기잖아. 저건 신의 능력이랑 비슷할 정도야. 애초에 인간이 맞기나 한 거야? 인간이 어떻게 마족을 능가해.”

    옴팔로스는 열심히 골랐던 마법진이 전부 다 사라지자 칭얼거렸다.

    마법진 자체를 무효화시키다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 시트시거가 힘으로 마법을 때려 부순 것과는 결이 달랐다. 저건 마나를 부정하는 힘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걸 쓸게. 아빠.”

    “뭐, 잠깐 기다려 그건 지금 사용해서는 될 물건이….”

    시트시거의 만류에도 옴팔로스는 강행 돌파했다.

    이대로 가다간 유피테르가 전개하는 마법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아버지의 유성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었다.

    저 비열해 보이는 은발의 교수는 마왕도 쉽게 죽였다. 아버지보다 분명하게 더 강한 사람을 말이다. 그렇다면 아버지 역시 이곳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들이자 계약자로서 참을 수 없었다.

    숨겨두었던 비장의 패를 사용한다면, 바로 지금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효과를 보고 난 후라면 자신을 칭찬해줄 게 분명했다. 원래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과도 같다고 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게 아버지와 나를, 위해서야!”

    옴팔로스는 강하게 소리치며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지 않으면 결심이 흔들릴 것만 같았으니까. 이 방법이 가져올 결과가 두려워 눈을 꽉 감고 있었다.

    단 한 개의 마법진이 옴팔로스의 위에서 만들어졌다.

    알 수 없는 문양을 새긴 마법진은 천장을 뚫고서 높이 올라갔다. 이윽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커졌다.

    “소용없는 짓이다. 네 실력으로는 내 마법을 뚫어내지 못해.”

    그러나 유피테르의 생각

    모든 마법과 마법진은 그의 마나에 부서져야만 했다. 그러나 저 마법진 만큼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녀’가 준 기억들을 찾아봐도 저렇게 난해한 형태는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지식의 도서관도 대답을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피테르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옴팔로스의 발버둥은 시트시거가 만류할 정도로 위험해 보였다. 그러니 대처할 방법을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고작해야 아티팩트였으나 세월의 무게는 쉽게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게 나의 비장의 수다!”

    완성된 대 마법진이 움직이며 엄청난 양의 마나를 토해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불었다.

    ‘뭔지 몰라도 단단히 준비했나보군.’

    유피테르 역시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마나 속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보였다. 폭풍에 시야가 가려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걸음걸이가 낯이 익었다. 유피테르는 평소 사람들의 특징을 잘 기억했다. 분명히 한 번쯤 만나본 사람일 게 분명했다.

    카테리나, 피티아, 이사야, 유알라냐….

    유피테르는 저 자세를 어디서 보았는지 빠르게 기억을 헤집었다. 직감을 통해 떠올린 사람들을 순서대로 되짚어봤지만, 그 누구도 일치하지 않았다.

    훈련을 받지 않은 경쾌한 느낌을 주는 사뿐사뿐한 발걸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교수님? 이런 식으로 뵙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티아나?”

    드디어 폭풍이 끝났다.

    그 속에서 걸어 나온 건 놀랍게도 저주에 고통받았던 티아나였다. 그녀가 나타나자 폭풍은 쥐죽은 듯 멈췄다. 마치, 그녀가 움직이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참고로 내일 과제는 다 했으니 걱정하지 말아 주세요. 교수님은 과제가 없어 참 좋았는데 아쉬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대체 여긴 왜 왔지?”

    유피테르는 티아나가 이곳에 온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어떠한 전조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사야처럼 의심할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피티아처럼 사람이 뒤바뀐 것처럼 답답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저주로 시간을 낭비한 평범한 마법사였다.

    “유피테르 교수님은 델포이의 아이돌이잖아요! 문득 보고 싶어져서 하늘을 쳐다봤는데 이곳에 도착해버렸지 뭐에요. 혹시, 이게 바로 운명의 붉은 실?”

    “그 말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유피테르 교수님은 그만큼 멋진 사람인걸요. 에메리아 교수님만큼 거대한 팬클럽도 있답니다. 알고 계셨어요?”

    왠지 모르게 이곳으로 이동했다는 말과 다르게 티아나의 태도는 느긋했다. 그냥 델포이 거리에서 걷다 만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유피테르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게 네가 가진 비장의 수니. 팔로스?”

    시트시거는 티아나가 이곳으로 난입하자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아카데미생은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다. 비장의 무기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상대는 마족이라는 종(種) 전체가 덤벼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유피테르였다. 옴팔로스 역시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옴팔로스에게 물어보았다.

    “맞아요. 아빠. 지켜만 보고 계세요. 저 은발의 교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준비해왔던 거니까요,”

    “그래 한 번 네 실력을 보여다오.”

    “맡겨만 주세요.”

    옴팔로스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당당한 계약자의 모습에 시트시거는 생각이 바뀌었다. 저 정도로 자신한다면 한 번쯤은 믿어봐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유피테르는 당황하고 있었다.

    항상 아이 같은 모습을 하는 옴팔로스였지만, 그 실체는 전혀 귀엽지 않았다.

    그는 대륙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아티팩트였다. 당연히 당시의 현자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지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고대 마법 기술의 집약체를 시트시거는 믿었다. 에고가 깃들 정도의 아티팩트는 그가 알기로도 몇 개 존재하지 않았다.

    “네 힘을 보여줘. 티아나.”

    “흐음. 당신은 제 위가 아닌걸요. 저기 계신 매력적인 남성분이라면 모를까.”

    빙결 지옥 속에서도 춥지 않은지 티아나는 옴팔로스와 티격태격했다. 그녀가 턱짓으로 가리킨 건 놀랍게도 시트시거였다. 공작급 마족의 명령을 듣는다는 말이 가리키는 건 단 하나였다.

    티아나 리스테인. 그녀 역시 마족의 계약자라는 것이었다.

    “설마, 마족의 두 번째 계약자가 너야?”

    유피테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받은 충격을 보여주는 것처럼 빙결 지옥 역시 멈추었다. 강철의 정신을 지닌 그에게도 예측하지 못한 일은 있는 법이었다. 티아나가 마족의 계약자라니 도저히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아픔을 고백했을 때의 표정은 진실한 것이었다. 또,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증상 역시 아카데미에 널리 퍼져있는 실제 소문이었다. 오흐트의 치유로 원래대로 돌아갔고, 마족의 마나처럼 보이는 게 몸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던가.

    오흐트가 진단을 잘못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치유 마법사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뇌가 따라가지 못했다.

    “정답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어려운걸요 교수님. 그런 답변은 C 밖에 되지 않는다구요? 낙제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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