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씨앗(8)
* * *
“씨앗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줘. 그런 위험한 폭탄을 몸에 지니고 살라니 농담이지? 벌써 마족의 마나와 섞이기 시작했어.”
시트시거의 사과에도 유피테르는 단호했다.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마음이 담긴 사과가 아니라 이 일을 해결할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마왕의 씨앗이란 물건이 여동생의 몸에 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이들은 만나기도 힘든 마족 공작의 사과면 충분한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트시거가 백 번, 천 번을 사과해도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과한다고 잘못이 없어지는 거라면 ‘죄인’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테니까.
“어 그게 미안하다. 그 씨앗을 해제할 방법은 나도 몰라.”
“뭐라고?”
시트시거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분노의 공작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걸 다른 마족이 보았다면 거짓말 친다고 여겼을 것이다. 단순, 무식, 다혈질로 표현되는 시트시거가 저렇게 굽히며 이야기한다니. 티폰과 에키드나에게도 어깨동무를 서슴지 않던 그였다.
물론, 이야기의 상대방이 유피테르라는 것을 알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특히, 공작들은 기겁하며 고개를 끄덕일 게 눈에 선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마왕의 찍어 눌렀던 은발의 마법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이 어떠한 발버둥을 쳐도 유피테르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때 새겨진 공포는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 말이지 마왕의 씨앗이란 물건은 넣으면 그걸로 끝이야. 그래서 거슬렸던 델포이 학장을 목표로 한 거고. 팔로스 무슨 방법 있나?”
“아뇨….”
옴팔로스는 충격에 빠졌다. 항상 강자의 모습을 보이던 아버지가 남에게 고개를 숙였기에. 시트시거는 항상 당당해야만 했다. 그가 시트시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자신에게 없던 길을 그를 통해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날, 옴팔로스는 갑자기 ‘자아’를 갖게 되었다.
자아를 갖게 되자 세상에 궁금한 일이 너무나도 많아졌다. 다양한 고대 마법의 마법식을 갖고 있어도 호기심을 해결할 순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한 마법사가 찾아왔다.
“나와 계약해서 유일한 아티팩트가 되지 않으련?”
옴팔로스는 마법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생들이 모인 삶을 지켜볼 수 있다는 말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 마법사도 그에 비하면 약했으나,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게 너무나도 멋있었다.
그래서 그와 계약했다. 그 후, 델포이 아카데미가 만들어지는 것을 돕고, 관리했다.
아카데미생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전투를 직접 평가하고 싶다고 요청해서 심판이 되기도 했다. 연애로 힘들어하며 술을 마시는 마법사의 옆에서 은근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일들도 시간이 계속되면 질리는 게 당연한 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옴팔로스는 아카데미를 도와주는 일에 싫증이 나버리고 말았다. 더는 이 일에 메어있고 싶지 않았지만, 계약은 함부로 파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약을 어기면, 옴팔로스의 에고는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때마침, 시트시거의 부하가 옴팔로스를 찾아왔다. 마족이 이야기하는 건 마법사의 이야기보다 더욱 구미가 당겼다. 지금껏 생각해보지도 못한 독립적인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마족 그것도 공작과 함께한다면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 분노를 좀 받아줘야겠는걸. 불만은 없지? 분노의 시트시거. 감히 마족 주제에 내 가족을 건드리다니 말이야. 그날 이후로부터 배운 게 전혀 없는 걸까.”
“아니… 라고 말할 수만도 없겠는걸.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아버지가 어디 있나. 게다가 그 씨앗을 가진 여동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사과는 이미 했잖아. 이 정도로 만족하라고.”
유피테르와 시트시거의 사이에 긴박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무래도, 시트시거는 진심으로 옴팔로스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이 걸려있기에 진심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팽팽한 힘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옴팔로스는 옴짝달싹 못 했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자신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카테리나 아르테미스를 고른 건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부터 눈에 띄던 아카데미생이자 최연소 학생회장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엮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의 동생이기도 했다. 그래서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결과는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카테리나는 고대 마법에 유연하게 반응했다. 허무하게 납치된 다른 아카데미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장기였던 얼음 마법을 이용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카데미생들 중에서도 뛰어난 편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러던 도중 마왕의 씨앗을 품을 수 있는 적합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곧바로 든 생각이 옴팔로스를 지배했다.
이 뛰어난 마법사에게 마왕의 씨앗을 심으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시의 옴팔로스는 일이 이렇게 커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과거의 자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선공은 예고했던 대로 유피테르의 몫이었다.
“사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 전쟁은 없었을 거야. 안 그래?”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창 & 얼음 화살 & 얼음 기둥
상대가 상대인만큼 유피테르는 처음부터 트리플 캐스팅을 사용했다. 단순하지만 감속과 정지의 힘을 가지고 있는 얼음 마법은 마족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위편에서는 창들과 화살이 빼곡하게 만들어져 시트시거를 압박했다. 떠 있는 창과 화살 하나하나에 지독한 살기가 어려있었다.
아래편에서는 기둥이 솟아났다. 얼음 기둥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신전의 천장이 부숴졌다. 마족, 그것도 공작을 상대하는 데 손대중은 필요 없었다.
“아, 아빠! 위험해요!”
옴팔로스는 시트시거에게 경고했다. 아버지를 믿었지만, 저 은발의 교수는 마족도 가뿐히 뛰어넘는 괴물이었다. 유피테르가 사용하는 마법을 직접 봤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좋다. 어차피 사과를 받아주진 않겠지. 유피테르, 너와는 한 번쯤 붙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신전이 너무 좁겠지?”
시트시거 식 유성 마법 ― 유성권
시트시거는 선공을 당했음에도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는 듯, 자세를 잡고서 마나를 오른손에 모았다. 마나가 원하는 만큼 모이자 정권을 내질렀다.
유성권.
그 마법은 말 그대로 유성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간 유성은 얼음 마법을 부숴버리고 그 기세를 살려 신전까지 시원하게 뚫어버렸다. 유성권은 모든 얼음 마법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태초 마족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역시 아빠. 너무 멋있어요!”
옴팔로스는 유피테르의 마법을 부숴버린 그의 능력에 환호했다. 아티팩트에 새겨져 있는 고대 마법식으로도 은발의 교수를 압박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저렇게 호쾌한 결과를 낼 순 없었다.
“이거밖에 안 되는 거야? 유피테르. 마왕 살해자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달라고.”
고작 기본적인 마법을 부순 것이지만 확실히 기세가 올랐다. 시트시거는 음모와 계략에 능한 마족과는 궤를 달리했다. 단지, 마왕 살해자의 마법을 돌파한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 은발의 남자는 그의 목표였던 티폰을 아기처럼 갖고 놀았던 마법사였었다.
“유성권이라 재미있는 마법이네. 정말로 유성이 날아다니는 느낌이야.”
시트시거가 얼음 마법을 분쇄하는 걸 유피테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차피,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지금 그가 쓴 마법들은 애초에 그런 목적을 위해 개발되었다. 물론, 얼음의 특성과 합쳐져 약한 몬스터를 쓸어버릴 때도 사용했다.
유피테르는 ‘그녀’의 지식을 이어받아 마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유성권의 이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이론을 꿰뚫고 있었다. 그래도 실제로 보니 굉장히 신기했다.
또, 태초의 마족들이 전부 현재 마법사와 같은 마법을 사용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분명, 마족의 마법은 인간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고대의 마법과 비슷한 방식이라고 ‘그녀’도 몇 번이고 강조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왜 예전처럼 마법을 쓰지 않는 거지? 고대 마법이 지금보다 확실하게 강력할 텐데. 너 역시 태초의 마족이라서 사용할 수 있잖아?”
“그건 알려줄 수 없어.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구분한다고.”
시트시거는 에키드나처럼 그를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사과할 때의 진중했던 표정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피를 튀기는 전투가 선사하는 두근두근함만이 남아있었다.
‘고작 이 정도에 넘어오지는 않네.’
유피테르는 그가 조금 더 기밀 사항을 유출해주기를 바랐다. 원래 피티아가 목표였다는 말처럼. 그러나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시트시거는 생사가 오가는 전투를 좋아하고, 머리로 싸움하는 것을 싫어하는 엄청난 바보였다.
그러나 마족의 비밀을 함부로 이야기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다양한 실수를 했지만, 그렇게 쌓인 경험이 그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마족도 마음만 먹으면 인간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 아쉽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빙결 지옥
유피테르는 카테리나가 즐겨 사용하던 빙결 지옥을 선택했다. 얼음 창과 얼음 화살이 유유하게 헤엄치는 물고기 같다면 빙결 지옥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 사자였다.
천장이 없어진 신전이 엄청난 속도로 얼어붙고 있었다. 그저 냉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갈 뿐인데도 옴팔로스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인간을 초월한 두 마법사의 싸움 속에서 옴팔로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후다닥.
두려움을 느낀 옴팔로스는 시트시거의 뒤로 숨었다.
고대 마법을 어중간하게 펼치다가는 유피테르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여동생이 마왕의 제물이 된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된 자유를 누려보지도 못했다.
이대로 죽으면 그냥 개죽음이었다.
“이건 이미 본 마법이잖아. 짜릿한 느낌을 준 그 마법을 다시 사용해 보란 말이야!”
무언가 새로운 걸 기대했던 시트시거는 아쉬움에 투덜거렸다. 좀 더 자극적인 혈투를 기대했는데 유피테르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티폰을 죽였을 때 사용했던 ‘진짜’ 마법을 아직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다.
시트시거 식 유성 마법 ― 쌍 유성권
분노의 공작은 이번에도 정권 지르기를 위한 자세를 잡았다. 양손을 허리춤에 가져간 후 마나를 그곳에 집중했다.
슈우우웅.
그러자 마족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엄청난 마나의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뒤에서 살포시 시트시거의 옷깃을 잡고 있었던 옴팔로스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아버렸다. 시트시거 주위에 모이는 마나의 양은 범상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무서운 마법사였을 뿐이었다.
파아아.
시트시거는 양손에 집중된 마나를 앞으로 그대로 쏘아냈다.
그러자 두 개의 유성이 나타나 일직 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분쇄했다. 얼음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유성은 힘차게 튀어오르는 연어 같았다.
“해치웠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지옥을 돌파하는 유성들을 보며 시트시거는 환호성을 질렀다. 괴물 중의 괴물인 저 은발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건 늘 이해할 수 없는 에키드나도 신의 영역에 다가간 티폰에게도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신전을 가로지르던 유성은 끝내 얼음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피테르가 여전히 빙결 지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시트시거의 마나보다 유피테르의 마나가 더 위라는 뜻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약해 보이니까 그만둬. 너 일단은 마족 공작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