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96화 (96/265)
  • 마왕의 씨앗(7)

    * * *

    만약, 옴팔로스가 단순한 실행범일 경우, 진범을 찾아서 죽여놓을 거였다.

    감히, 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제자들과 여동생을 건들다니. 그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절대로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디에 숨어있어도 그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일의 경우, 눈물을 머금고 ’약속‘을 깨면 되니까. ’그녀‘도 이 정도는 이해해줄 것이다.

    현재의 유피테르는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예전에 한 번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가진 힘은 오롯이 네 힘이야. 내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자신을 가져.”

    그랬다.

    그녀는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이었다.

    “아니 아니. 난 포장만 했을 뿐인걸. 다른 사람이 선물을 준비해줬어. 아ㅃ…. 아니지 아니야. 그 사람이 유피테르 교수, 당신을 엄청나게 보고 싶어하던데.”

    유피테르의 살기를 무시하는 건지 옴팔로스는 평온했다. 여전히 아이 같은 태도를 유지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카테리나라는 장애물을 쉽게 돌파했는데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누가 나를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데?”

    아이의 대답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게 중요했다. 옴팔로스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건 가능했다.

    이제는 그도 어엿한 교수였으니까.

    “곧 알게 될 거야. 그러고 보니 카테리나는 어떻게 돌파했어? 몸속에 마왕의 씨앗을 품고 있어서 쉽게 제압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거 생각보다 다루기 힘든 물건이거든. 나도 자신이 없는 데 말이지.”

    “리나의 몸에 마왕의 씨앗을 심었다고? 제정신… 일리는 없겠고 대체 왜? 티폰이라도 부활시키고 싶은 거야?”

    마왕의 씨앗.

    그 불길한 단어가 여기서 튀어나와서는 안 되었다.

    그게 여동생의 몸에 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마족의 마나가 섞여있기에 다른 아카데미생들처럼 반―반 마족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세상의 모든 일을 전부 알지 못했다.

    드르르르.

    바로 그때, 신전이 대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단순한 구조였던 신전을 다채롭게 꾸며주던 장식품들이 모두 흔들렸다. 그곳에 있었던 잡기들은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벗어나 깨져버렸다.

    그 지진 속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옴팔로스와 유피테르. 단둘뿐이었다.

    “헤헤… 드디어 오는구나.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구.”

    제단에서 어두운 색의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유피테르는 자연스럽게 제단을 쳐다보았다. 아무리봐도 그게 이변의 원인이었다. 보기 싫은 문양으로 가득한 제단은 무언가를 뱉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쁨에 겨워 몸 둘 바를 모르는 옴팔로스.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일종의 소환 마법의 가능성이 높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리던 진동은 오래가지 않았다. 흔들림이 멈추자 제단이 열리며 꾸물꾸물한 검은 연기가 퍼져 나왔다. 매캐한 연기는 이내 신전을 가득 채웠다.

    연기는 생각보다 위험해 보이는 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마족의 마나를 연상시키는 칙칙한 검은색이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얼음 나비의 꿈

    유피테르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추고 결계로 방어했다. 적의 위험한 공격을 괜히 맞아줄 필요가 없다는 카르멘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연기가 걷힌 후, 제일 먼저 보인 건 붉은 안광이었다. 마족임을 증명하는 피처럼 붉은 두 눈동자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동자만큼 시선을 끄는 건 머리 위에 나 있는 두 개의 검은색 뿔이었다.

    우람한 뿔과 눈동자. 그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진짜 너였나. 시트시거. 대체, 타르타로스를 가두는 결계는 대체 뭘 하는 건지. 거기엔 …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피아쿠스가 말한 대로, ‘분노’가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분노의 마족 공작 시트시거가 델포이 아카데미에 강림하고야 말았다.

    옴팔로스를 조종한 인물이 시트시거라면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뚝딱 만들어졌다. 마족 공작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단순한 인물이 그였으니까. 밑의 부하들이 계획 정도야 얼마든지 세워줄 수 있을 테니까.

    실종을 계획하고 마왕의 씨앗을 준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에키드나가 단순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공작이라면 시트시거는 정말로 단순명쾌한 마족이었다.

    당한 만큼 갚아준다.

    이게 시트시거의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명제였다.

    “정말로 오랜만이군. 유피테르. 이제는 마왕 살해자라고 불러야 할까?”

    “드디어 왔구나! 아빠.”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가 모습을 드러내자 옴팔로스는 오도도 하고 달려갔다. 체구가 작은 옴팔로스는 시트시거의 품에 쏙 들어갔다. 그 모습은 오랜만에 가문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하는 막내아들 같았다.

    “가족 놀이라도 하는 거야?”

    아티팩트와 마족을 상봉을 보며 유피테르는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게 둘 다 인간의 감정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한쪽은 마족 내에서도 상대하기 버거운 근육 뇌 시트시거였다. 다른 쪽도 고작 아티팩트에 깃든 에고에 불과했다.

    “그럼 이 모든 걸 생각해낸 게 너라고 시트시거?”

    “그렇다. 바로 내가 마왕을 되살리기 위해 행동한 거다. 어떠냐 감탄했냐?”

    감탄할 리가 있냐.

    유피테르는 입 바로 안쪽에서 그 말이 뛰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간질간질함을 견뎌낸 자신에게 감탄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카테리나에게는 마왕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그 영향으로 마나의 색이 검푸른 색이 되어버렸다. 또, 분노에 몸을 맡겨 아카데미생을 살해했다. 본인에게도 확인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실종된 아카데미생들은 시트시거를 소환하기 위한 매개체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작위로 아카데미생들을 고른 것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굳이, 신경을 쓸 필요 없이 그때그때 적당한 마법사들을 골라잡으면 되니까.

    그렇게 하면 계획을 들킬 리스크를 확실히 줄일 수 있었다.

    “시트시거.”

    “응? 왜 부르나. 유피테르. 욘석아 잠시만 가만히 앉아있어 봐 어른들이 대화할 때는 끼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시트시거를 만난 게 그리도 기쁜지 옴팔로스는 거의 춤을 추고 있었다. 분노의 공작은 그런 옴팔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시트시거의 말투로 볼 때 분노의 공작은 옴팔로스를 한두 번 만난 게 아닌 것 같았다.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정말로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어린 시절 그와 카르멘의 사이보다 더욱.

    “대체 왜 이곳에 온 거지. 공작급의 마족들은 타르타로스를 나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에키드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앙? 그 계집애도 나와서 활동하고 있다고? 아 그랬나. 요새 일이 많아서 자꾸 까먹네. 빌어먹을 신이 만든 결계를 쉽게 돌파할 수는 없었어. 하지만, 방법이야 늘 찾아낼 수 있지. 봐, 나도 이곳에 있잖아.”

    의외로 시트시거는 제대로 대답해 주었다.

    불가능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결계 돌파가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또, 오랜만에 맛보는 인간 세계의 향기 덕에 기분이 고양되어 있었다.

    시트시거는 태초의 마족 중 한 명이었기에 타르타로스 밖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살아온 티폰과 에키드나보다 살짝 어릴 뿐이었다. 둘을 제외한다면 시트시거는 마족 중 최강이었다. 마족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강해지는 그야말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었다.

    ‘에키드나가 밖으로 나온 걸 모르고 있었다고…? 마왕을 살리는 게 에키드나의 뜻과는 다르다는 건가. 아니,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순 없어.’

    시트시거의 말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무식한 성격 때문인지 유피테르가 원하는 정도의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다. 단편적인 정보로 짜깁기를 하는 건 위험했다. 바로 전 카테리나의 사례에서 배웠지 않는가.

    “생각보다 피아모가 잘 해주었군. 네게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피아모.

    또 한 번 알지 못하는 단어가 나왔다.

    분노 파벌 산하의 마족을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피아쿠스라고 밝혔던 마족과 이름이 다른 걸 볼 때 저쪽이 진실한 이름인 것 같았다.

    ‘어쩌면…. 피아쿠스도 계약자가 마족처럼 속인 걸 수도 있지. 본체를 보지는 못했으니까.’

    마족이 거짓말을 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절망,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놈들이었다.

    “헤헤. 저도 열심히 했다구요. 아빠. 안 그래 유피테르?”

    옴팔로스는 유피테르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런 건 모르겠고. 시트시거. 넌 왜 그곳에서 나왔지? 지금까지는 조용히 있었잖아. 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건데.”

    유피테르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혼자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작 시트시거를 타르타로스에서 빼내려고 이 모든 일들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티폰을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이 잠들어 있다고 해서 말이지.”

    “아빠 그건….”

    “걱정하지 마. 쟤가 진심으로 알려고 하면 우린 꼼짝도 못 한다고 누누이 이야기 해왔잖니?”

    단순한 것인지 시트시거는 유피테르의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시트시거는 마왕 티폰이 살해될 때 그 자리에 있던 자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유피테르가 전력을 다하면 모든 계획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상위 마족들은 유피테르의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대답 고마워.”

    대답을 해줄 줄은 몰랐던 유피테르는 머쓱했다. 있는 그대로 정보를 전해줘서 해줘서 오히려 사이가 어색해져 버렸다. 물론, 티폰을 살해한 건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얽혀있는 사정도 있었다.

    “그래서 대계(大計)를 방해할 거냐 마왕 살해자?”

    “내 여동생을 연관시키고 살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날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너라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텐데.”

    유피테르는 시트시거의 입에서 저런 질문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제자를 제쳐두고라도 가족까지 건드린 건 분명히 선을 넘었다. 시트시거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하고 많이 사용했다.

    그 말에 따르면 유피테르의 복수는 당연히 정당한 것이었다.

    “팔로스 너 설마… 저 녀석의 여동생에게 뭐 했냐? 다른 사람은 괜찮아도 걔만은 건들지 말라고 했잖니.”

    “그게… 씨앗이요.”

    “설마 마왕의 씨앗을 그 아이에게 심은 거야? 아니, 학장에게 심으려는 게 원래 계획이었잖아. 왜 하필 저 녀석의 동생에게. 아니, 아니다. 뭔가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

    상상을 초월하는 옴팔로스의 행동에 시트시거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절대로 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일을 이 아티팩트는 두려움도 없이 해버렸다. 그래서 유피테르가 듣고 있다는 걸 잊고서 계획의 일부를 말해버렸다.

    분노(Ira)의 이름에 맞게 옴팔로스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아티팩트는 그가 타르타로스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소중한 계약자였다. 그래서 한 번은 참았다.

    옴팔로스가 자신을 이곳으로 소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희생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이미 저지른 건 어쩔 수 없지. 미안하다 유피테르. 이래 보여도 옴팔로스는 내 계약자니까. 얘의 실수는 곧 내가 한 것과 마찬가지지.”

    단순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시트시거는 사과도 빨랐다.

    “미, 미안해요 아빠.”

    옴팔로스는 아직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그래도 아빠가 화를 많이 참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게다가 유피테르 교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래? 그걸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빠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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