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의 씨앗(5)
* * *
“맞아. 유피테르 교수. 당신의 여동생인 카테리나 아르테미스야. 이 정도라면 놀라운 선물이 되었을까? 준비하느라 애를 좀 먹었단 말야.”
“그래? 힘들었겠네. 저항이 거세기라도 했나 봐.”
힘들었다고 칭얼거리는 옴팔로스에게 유피테르는 달콤한 함정을 던졌다. 그야말로 오후의 티파티에 나오는 달콤한 케이크처럼. 살이 찐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야무지게 포크를 쥔 손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그래그래, 얼마나 드셌는지 알아? 여리여리하게 생긴 거랑은 다르더라구. 제압하다가 힘들어서 죽을 뻔했다고. 어?”
옴팔로스는 유피테르가 공감해주자 기쁜 나머지 제 발로 함정 속에 걸어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눈치를 채지 못했다.
유피테르가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을 다물고서 여동생을 지켜보고 있는 유피테르.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작품과도 같았다. 남매가 모두 일반인과는 다른 수준의 외모를 갖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카테리나를 쳐다본 유피테르는 메마르게 웃었다. 여동생은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으나, 무슨 짓을 당한 게 틀림없었다.
혹시, 이 모든 사건은 애초에 카테리나를 노리기 위한 연막이 아닐까?
세이드 아폴론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실종자들 사이에서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누굴 잡아가도 상관이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가설은 공교롭게도 이치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애초에 고위 마족이 타르타로스를 빠져나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결계를 부족한 자식이 쉽게 뚫을 수는 없었다.
또, 두 마족이 한 공간에서 활동하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설령 같은 파벌에 있는 마족이라도 말이다. 각자가 추구하는 광기가 다른 만큼 협력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한 명의 마족과 두 명의 계약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닿자, 모든 의문이 한 번에 해소되기 시작했다.
‘스위치를 잘못 누른 걸지도. 아직 그게 완성되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옴팔로스는 유피테르가 두려웠다.
화를 내는 것보다 감정이 하나도 없는 가식적인 미소가 더 무섭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유피테르가 웃을 때마다 공기가 얼어붙어 숨이 막히는 듯했으니까. 자신은 호흡할 필요가 없는 에고에 불과한데도.
정말이지 이 교수와 만날 때마다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카테리나 씨 그럼 유피테르 교수를 부탁해. 나는 못마친 일이 있어서 말이지.”
옴팔로스는 그 말을 남기고는 결계 속으로 도망가버렸다. 유피테르의 살기를 맨몸으로 받다가는 정말로 기능이 정지될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꼭 이뤄야 할 꿈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일단 살아있어야만 했다.
역시, 마왕 살해자를 한낱 아티팩트인 자신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전문가를 부르면 되었다.
“알겠습니다, 옴팔로스. 이곳을 넘어가실 수는 없겠네요. 아쉽지만 그렇게 되었어요. 오라버니.”
“이성까지 잃은 건 아닌가 보네?”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여동생을 보며 유피테르는 안도했다.
카테리나가 정신 조작이라도 당했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걸지도 몰랐다. 물론, 체스말처럼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직 의심을 풀 수는 없었다.
다친 정신 쪽을 치료하는 건 자신 없는 분야였다. 화려한 과거를 지닌 오흐트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상처받은 마음은 마법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다름 아닌 산 증인이었다.
“그럼요. 오라버니를 늘 응원했던 여동생 리나에요. 몸에서 힘이 넘치는 게 모의 전투의 후반전을 이어서 해보고 싶어지는걸요.”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의 모습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긴 앞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두 눈동자의 색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본래 그곳에는 아름다운 은색이 눈동자가 있어야만 했다.
“계약자… 아니 조금 다른 걸지도 모르겠네. 느낌이 달라.”
“뭐가 되었든 중요한 건 오라버니를 이기는 거니까요. 상대해 주실 거죠? 설마, 여기서 저를 버리고 에고를 따라가시지는 않으시리라 믿어요.”
차라리 꼭두각시라면 빠르게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유피테르가 한탄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기합이 들어간 카테리나는 만족할 때까지 피투성이가 되도록 덤벼들었다. 얼음성에서 대련할 때 질릴 정도로 많이 봐서 이미 익숙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천재였다.
“어쩔 수 없네. 덤벼봐. 격의 차이가 뭔지 알게 해줄게.”
유피테르는 옴팔로스가 결계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여동생이 쉽게 길을 비켜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발목을 잡을 게 분명했다.
그럴 바에는 빠르게 여동생을 쓰러트리고, 옴팔로스를 쫓는 게 나았다.
“좋아요. 좋아.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붉은 눈으로 변하며 마족의 광기를 어느 정도 나누어 받은 것일까.
카테리나는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이었다. 친애하는 오라버니 앞에서는 숨겨왔던 ‘폭군’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성이 있는 것 같기는 했으나,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얼음 창 & 얼음 화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듯, 카테리나는 처음부터 듀얼 캐스팅을 선보였다. 카르멘이 인정한 천재는 역시 두 번 실수하지 않았다. 수십이 넘는 얼음 창과 얼음 화살은 유피테르의 근처에서 생성되어 그의 빈틈을 노려왔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아직도 어설퍼.”
유피테르는 여동생이라고 해도 가차 없었다. 아니, 이건 여동생이 부탁했던 것이었다. 카테리나는 싸울 때 봐주는 걸 원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유피테르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그녀’와 칼리스토 자매들을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카테리나는 카르멘이 떠난 이후 진심으로 맞부딪칠 수 있었던 상대가 업었다. 유피테르의 강함을 깨닫고 누구보다 좋아하던 게 바로 여동생이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는 유피테르는 절대로 손대중을 둘 수 없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해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독수리의 행진
유피테르의 마나가 산 정상에 퍼져나갔다. 그러자, 당당한 모습의 얼음 독수리가 셀 수 없을 만큼 만들어졌다. 독수리들은 유피테르에게 날아오는 창과 화살을 그대로 상쇄시켰다. 두 개의 얼음 마법이 만나자 대기도 얼어붙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롭게 나타난 독수리들은 모든 방향에서 카테리나를 노렸다. 동시에 위, 아래, 왼쪽, 오른쪽을 노리는 건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여러 곳의 마법을 정확하게 제어하는 건 대륙 마법사들의 꿈이었다. 고대와 다르게 현대의 마법은 전술과 출력으로 이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허를 찌르지 않으면, 마법사는 무능력해졌다.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얼음집
‘저건 반칙이잖아.’
카테리나는 푸른 독수리들을 전부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수리의 궤도는 그녀라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방어 마법을 펼쳤다.
차가운 북극 지방 전통집의 형태를 한 마법이 그녀를 안전하게 숨겨주었다.
독수리들의 맹공에 집은 곳곳이 얼어붙으면서도 끝까지 제 역할을 다했다. 덕분에 카테리나는 상처 없이 유피테르의 첫 공격을 받아넘길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전력을 확인하는 방법조차 다른 이들과 달랐다. 망설일 틈 하나 주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시네요. 오라버니. 아직도 손이 떨려요.”
“엄살은. 네 눈은 오히려 불타오르고 있는데.”
“들켜버렸나요. 그렇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보도록 할게요.”
아카데미생들과 교수들은 모의전에서 보여주었던 두 사람의 마법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러나 그건 얼음성에서 계속되었던 대련 수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들의 시선이 있는 공간에서 실력 전부를 보여준다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냉혹의 끝판왕, 카르멘의 가르침을 받은 카테리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본 실력의 30% 아니, 10%만 보여주라는 카르멘의 가르침은 마법사들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기대가 되는걸.”
유피테르는 마나가 넘실거리는 카테리나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여동생이 내뿜는 마나의 색은 순수한 푸른색이 아니었다. 마족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색 마나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자 카테리나는 항상 소중하게 걸고 다녔던 목걸이를 뜯어내었다. 펜던트에 마나를 불어넣자 그건 고급스러운 장식을 지닌 스태프의 형태로 변했다.
카드세우스.
황제가 직접 선물한 고대의 아티팩트가 진정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었다.
카테리나 식 얼음 마법 ― 빙결 지옥
그녀가 가장 아끼면서 자주 사용하는 마법이 스태프의 힘을 빌려 발휘되었다. 카드세우스가 가진 능력은 마나를 증폭시켜주는 것이었다. 한정된 마나를 가지고 벌어지는 전투에서 그 어떠한 무기보다 도움이 되었다.
파스스.
푸른색과 검은색이 섞인 그녀의 마나는 강력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파르니소스 산 정상 부분을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산 정상임에도 곧게 뻗어있던 나무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서리에 제대로 대항해보지도 못했다.
나무뿐만이 아니었다. 돌도, 꽃도 그리고 잡초들까지. 산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단지, 제단을 보호하고 있는 결계만이 간신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혹한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유피테르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녀’에게 받은 아티팩트들 덕분이었다. 그녀의 선물들은 현대 마법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신들의 숨결이 닿은 물건들이라고 칭할 만했다.
당연히 카테리나의 마법들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마나는 퍼스트 서클에 마족의 힘을 섞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죄가 없는 초목들을 괴롭히는 건 옳지 못한 일이란다.”
유피테르 식 화염 마법 ― 불 독수리의 행진
‘새 형태로 마법을 구축하는 게 생각보다 연습이 되는군. 다음에 가르쳐줄까?’
유피테르는 불 속성을 마나를 통해 활활 타오르는 새를 만들었다. 유피테르의 마나와 지배력이 카테리나보다 월등히 높아, 독수리들은 얼음 마법 속에서도 끄떡없었다.
불타는 독수리들은 거대한 행렬을 만들며 사방을 불태웠다. 얼음의 숨결이 닿은 대지에 불의 강이 흐르자 봄바람을 맞은 겨울 바다처럼 녹아내렸다. 유피테르의 마법 제어는 완벽해서 카테리나가 얼린 것들만 정확히 노렸다.
그래서 나무가 불타고 산불로 번지는 그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처럼 행동하시게 되셨나요? 아, 라냐가 곁에 있어서 영향을 받으신 건가요. 아르테미스의 가주는 그런 걸 신경 쓰시면 안 된다구요.”
카테리나는 평소와 다르게 반격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산을 원래대로 돌리는 오라버니의 행동을 조롱했다. 인간과 마족들은 주변 환경을 걱정하면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사는 엘프들만 그렇게 움직일 뿐이었다.
“강한 마법사가 되려고 노력하면서도 절대로 마법이라는 강한 힘에 휘둘리지 마라. 그게 내가 네가 전해준 가르침 아니었어?”
“그렇게만 살다 보니 지치더라구요. 저도 다른 천재들처럼 강함에 취해서 살고 싶어요.”
마족의 마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인지 카테리나는 울분을 터트렸다. 카테리나는 많은 것을 참으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는 카르멘의 폭력과 폭언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고, 오라버니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마음의 짐까지 가지고 있었다.
거대한 가문의 공작 작위를 잇기 위해서 카테리나는 많은 것들을 강요받았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재능은 가만히 둔다고 적당히 발휘되는 게 아니었다.
델포이 아카데미에서 ‘폭군’이라고 불리긴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먼저 시비를 건 적은 없었다. 그건 그저 그녀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