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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92화 (92/265)
  • 마왕의 씨앗(3)

    * * *

    피티아의 한마디는 트리아 일행을 경악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세 번째 마족의 존재 자체가 반칙이었으니까.

    체크메이트가 선언된 판을 구경하던 사람이 난입해 뒤집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피아쿠스, 이모리엣에 이어서 피티아 학장마저 마족이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지금 큰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족이 준비한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으니까.

    그렇다면 한시라도 빠르게 이 던전을 탈출해야만 했다. 계획이 어긋났다는 것을 유피테르에게 알려야만 했다. 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확실한 정보를 마다할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이 세 번째 마족이라는 거야? 그럴 리 없는데. 이곳엔 두….”

    에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유피테르 일행이 옴팔로스의 말을 그대로 믿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난 트리아가 직접 나서서 조사했다. 그 결과 델포이 아카데미에는 두 개의 이질적인 마나가 있었다. 그것과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을 주는 마나도 존재했다. 총 세 개의 반응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음습하고 끈적끈적한 느낌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세아니아 대륙에서 이런 마나를 보유한 건 타르타로스에 사는 마족들밖에 없었다.

    “두 명의 마족과 한 명의 계약자가 숨어있다고? 그 말을 한 건 옴팔로스겠지. 안 그래?”

    에냐의 말을 가로챈 피티아는 고혹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주변에서는 엄청난 밀도의 마나가 물결치고 있었다. 델포이의 학장은 퍼스트 서클의 마스터에 가까운 실력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 보여주는 기세는 분명히 그 이상이었다.

    “그. 그래 맞는데.”

    에냐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그대로 읊은 피티아의 대답을 엉겁결에 인정해버렸다.

    “옴팔로스의 계약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야. 그 말을 믿어버리다니 생각보다 형편없네.”

    “마족이라고 하기에는 당신은 붉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이번에 태클을 건 것은 성국 출신의 클리오나였다.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은 마족의 증표라는 건 상식이었다. 그러나 피티아는 날카로운 느낌의 갈색 눈을 지니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눈’이 중요했다.

    눈이야말로 그 사람의 마나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번개 마법을 사용하는 리투아 황실이 노란색에 가까운 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게 대표적이었다.

    “아아… 이 눈? 그러게 왜 붉은색이 아닐까? 맞춰보렴. 어리석은 아이들아.”

    피티아는 손을 들어서 자신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럼에도 갈색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당연했다. 눈동자의 색을 마음대로 변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미 첩자로 스카우트되었을 테니까. 그 마법사는 최고의 첩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뭘 잘난 척을 해. 넌 피티아의 육체에 빙의되어있을 뿐이잖아. 잘도 숨겨왔네. 기분 나쁘게.”

    그 행동을 아니꼽게 보던 오흐트가 정답을 한 방에 맞춰버렸다. 달콤한 케이크를 좋아하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가 아니었다. 냉랭한 표정에는 감정이 한 톨도 들어있지 않았다.

    피티아를 노려보는 그녀의 표정은 한겨울에 불어오는 찬 바람처럼 매서웠다.

    “아, 당신이 있었네? 하긴 초대 …인 당신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문제였을까?”

    “마족 주제에 별 걸 다 알고 있네. 정말 싫다.”

    피티아 아니, 피티아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마족은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마족은 오흐트의 숨겨진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유피테르와 칼리스토 자매들만 알고 있는 소중한 비밀을 말이다.

    동료가 되었던 클리오나와 유알라냐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사실이 대륙에 알려저서는 안 되었으니까. 어째서인지 마족이 알고 있자 오흐트의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더러운 마족에게 알려지기 싫어서 숨기고 있었던 것이기에.

    “전설로만 존재하는 당신의 존재를 눈으로 직접 봤으니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할까?.”

    “그딴 거 필요 없으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그건 곤란한 주문인걸.”

    “어째서?”

    지독한 냉대에도 마족은 싱글벙글했다.

    그녀가 정말로 마족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잔인하고 사람을 갖고 노는 걸 좋아한다는 흉흉한 소문과는 달랐다. 말만 들어보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친절한 이웃 같았다.

    마족은 오흐트의 말을 즉시 거절했다. 그러더니 마나를 넓게 흩트려 마법을 사용했다. 영창 없이 시동어만으로 사용한 마법치고는 꽤 대규모를 자랑했다.

    피티아 식 미궁 마법 ― 미궁 창조

    던전의 벽이 마족의 인도에 따라서 춤추듯 움직였다. 지면이 춤춘다는 표현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랬다. 던전의 벽은 거대해지고 단단해져서 트리아 일행을 갈라놓았다.

    “오흐트, 빙의하면 그 사람의 마법까지 쓸 수 있는 거야? 저런 건 처음 보는데?”

    “아니… 나도 저런 건 처음 보는데. 빙의해도 육체의 지배권만 갖는 게 보통이야. 쟤 진짜 마족인가 본데? 그것도 보통은 아닌 것 같네.”

    던전이 움직이자 에냐가 기겁하며 오흐트를 구해냈다. 작은 체구의 오흐트는 에냐의 옆구리에 딱 맞았다. 짐짝을 옮기는 것 같은 불편한 자세에서도 오흐트는 성실하게 답을 해주었다.

    클리오나 식 신성 마법 ― 빛의 방어막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클리오나는 방어막을 만들어냈다. 아카데미생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마족의 마법을 막을 수 있을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궁의 재료로 쓸려 들어갈 것만 같았기에.

    “어떻게든 다치는 건 면해서 다행입니다.”

    마족의 마법은 던전을 미궁 같은 구조로 바꾸는 것뿐이었다. 안전하다는 걸 몇 번이고 확인한 클리오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생들을 지키느라 세 명의 칼리스토들과 떨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내 말 들려 리오나?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에냐의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지하 3층을 하나의 층으로 만들어버리는 미궁 마법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벽은 끝을 모를 정도로 높았고, 부서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괜찮아! 그쪽은 어때.”

    “이쪽은 괜찮으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구하러 갈게.”

    클리오나의 목소리 역시 미궁에 울려 퍼졌다. 에냐 일행과는 꽤 거리가 있는지 말을 주고받는 데 오래 걸렸다. 트리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에냐보다 더 강하다고 했으니.

    자신이 해야 하는 건 간단했다. 구조가 올 때까지 아카데미생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테리나가 실종된 이후로부터 잠을 설쳤으니까.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가 없어진 게 이토록 마음이 아픈 일일 줄 몰랐다.

    어느새인가 클리오나의 눈은 늘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의 빈자리를 쫓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다르게 완전히 혼자였던 트리아는 마족과 같이 있었다. 그녀는 던전이 미궁으로 변하는 타이밍에 그저 원래 있던 자리를 지켰다. 트리아가 마족의 마나를 압도했기에 그곳에는 벽이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칼리스토 자매들 중 나를 상대로 고르다니 눈이 없습니까?”

    “아니, 당신이 제일 강한 것 같으니까. 고른 건데 뭐 문제 있을까? 이왕이면 재미있게 싸우고 싶거든.”

    마족은 역시나 마족이었다.

    7개의 파벌이 공유하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요소는 ‘광기’였다. 다들 무언가에 미쳐있었다. 그 중에서 자신과 맞는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마족의 경우에는 강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 후회하지 마시고 그 마음 끝까지 유지하시길.”

    트리아 식 중력 마법 ― 첫 번째 날

    그동안 정보원으로 혼자서 활동할 수 있었던 비밀이 드디어 밝혀졌다. 그녀만 사용할 수 있는 중력 마법. 그야말로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할 무게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

    중력 마법은 마족과 트리아가 있던 모든 존재가 받는 중력을 두 배로 늘려버렸다. 물론, 마법의 사용자인 트리아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의 마법이 사기적인 이유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마법을 사용하네? 역시 내 선택이 틀릴 리가 없다니까.”

    두 배의 중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피티아의 표정은 밝았다. 그건 트리아의 착각이었다. 피티아의 미소는 소름 끼치는 광기 어린 미소였다. 갑작스레 강해진 중력에도 마족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이게 다라면 정말 실망인데 말이지!”

    그리고서는 마법의 위력이 조금 실망스럽다는 기색으로 덧붙였다.

    피티아 식 미궁 마법 ― 골렘 창조

    미궁 마법은 피티아가 교육자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주변의 소재를 이용해 거대한 미궁을 만들어 시련을 부여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성장시키기에 딱 알맞았다.

    또, 소재에 맞게 다양한 속성의 골렘을 소환할 수도 있었다. 현재 미궁이 만들어진 기반은 던전의 흙이기에 그녀가 소환한 골렘은 자연스럽게 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다.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스톤 골렘 다섯 체. 이게 피티아의 몸을 지배하는 마족이 만든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트리아는 순식간에 골렘들에게 둘러쌓였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골렘의 주먹을 회피했다. 중력 마법의 영향이었다. 느려진 골렘들의 궤도는 예상하기 쉬웠다. 칼리스토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도 뛰어나서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있었다.

    “글쎄. 기분이 상해버려서 대답해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닌걸.”

    “대체 언제부터 학장의 몸을….”

    “대답해 주기 싫다니까!”

    골렘과 싸우면서도 트리아는 끈질기게 물었고 그때마다 마족은 칼같이 거절했다.

    마족과 관련이 없다면 피티아의 몸을 되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원리를 알 수 없으면 구하지 못했다. 가면과 마찬가지였다.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마족을 볼 때마다 짜증이 솟구쳤다.

    트리아 식 중력 마법 ― 중력 마법탄

    참다못한 트리아가 새롭게 공격에 나섰다. 그녀는 제로 서클 마법에 중력의 마나를 씌워 공격했다. 골렘 하나당 열 발의 마법탄. 총 오십의 마법탄이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트리아의 마법 역시 그녀의 주변이 아니라 골렘의 위에서 만들어졌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마법탄은 그대로 골렘들을 꿰뚫었다. 골렘들에게 그 공격을 피할 수단은 없었다. 육중한 몸에 두 배 이상의 중력이라는 상태 이상을 받고 있었으니까.

    “어머 어머…. 골렘 씨들이 바로 죽어버렸네.”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덤벼라. 네 본체가 아니라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확실히 중력을 바꾸는 마법은 상대하기 귀찮네.”

    골렘이 죽어버렸는데도 마족은 아직도 여유만만이었다. 애초에 퍼스트 서클 수준으로 칼리스토에게 이긴다는 전제 자체가 이상했다. 칼리스토는 인간, 아니 세계의 법칙에서 어긋난 존재들이었기에.

    “뭘 그렇게 여유를 부리십니까.”

    트리아 식 중력 마법 ― 두 번째 날

    트리아는 여유 부리는 마족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중력 마법의 다음 단계를 진행했다.

    두 번째 날이라는 시동어가 끝나자 주변을 지배하던 중력이 한 번 더 두 배가 되었다. 평상시보다 4배 가까이 높은 중력은 역시 견디기 힘든지 마족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마족은 이제는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 연약했다. 중력의 가호가 저주가 되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게 결정타는 아니겠지? 고작 이 정도로 날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이미 너희들은 늦었어. 씨앗은 싹을 틔우고 곧 열매를 맺을 거야. 그걸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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