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90화 (90/265)
  • 마왕의 씨앗(1)

    * * *

    에냐와 클리오나 일행이 아카데미 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던전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트리아 역시 카테리나를 구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은 카테리나의 실종으로 심각해진 것이었으니까. 마스터가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빨리 구출해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마스터는 과거와 다르게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이상합니다, 신께서 알려주신 것과 반응이 다릅니다.’

    유피테르는 카테리나가 다른 아카데미 생들과는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말하며 특정한 위치를 짚어주었다. 그는 엘프의 비밀정원처럼 아래 델포이 지역 어딘가에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모든 계획을 세울 수 있게 정보를 수집해온 정령의 힘은 대단했다. 자신보다 마나를 더욱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듯 보였고 결국 예상 위치를 찾아내 왔으니까.

    은발의 마스터는 여동생을 찾기 위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아티팩트를 주었다. 나침반처럼 생긴 그 아티팩트는 미리 입력된 마나를 찾을 수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트리아는 그 아티팩트의 인도를 따르고 있었다.

    “이곳은 에냐가 향했던 곳 같습니다만. 대체 왜 이곳으로 인도한 것입니까. 아티팩트?”

    조금씩 흔들리던 나침반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바늘의 떨림이 멈추었다. 목적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려오던 트리아는 도착한 곳이 다른 팀의 목적지와 겹친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상했다. 이렇게 겹칠 리 없었다.

    마족에게 붙잡혔다 구해진 세이드가 카테리나는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고 이야기했으니까.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마스터는 카테리나를 데려간 목적이 다르다고 확신했다. 유피테르의 추론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기에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에냐가 온 곳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던전 밖에서부터 그녀의 마나 잔향이 남아있어 모를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의 마나도 어렵지 않게 탐지하는 트리아가 아는 사람의 것을 헷갈릴 일은 절대로 없었다.

    “역시 던전 안까지 통신 마법이 닿지는 않습니까. 그럼 일단 들어가 보도록 하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을 해봐야겠습니다.”

    산 중턱에 뜬금없이 던전이 있는 건 웃기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던전을 돌파한 그녀에게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으니까. 아티팩트가 고장이 났을 리는 없었으니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했다.

    고작 지하 3층 정도로밖에 되지 않는 던전이었고 도중에 에냐 일행과 만나 힘을 합친다면 공략 시간을 더욱 단축할 가능성도 높을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유피테르가 말했다. 믿음의 증거를 보여준 마스터께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활짝 열려있는 던전의 입구가 유혹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던전이 공략되기 전에 다른 팀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불문율 따위 지금의 그녀에게 아무 소용없었다.

    어차피 던전의 보상인 아티팩트 같은 게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던전 입구에서 연결된 로비도 지하 1층도 아무것도 없이 조용했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다고 느끼며 그녀는 빠르게 2층까지 내려갔다. 위층들과 마찬가지로 2층도 조용했다. 다만, 2층에는 확실히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바람이 새는 게 느껴질 정도의 큰 구멍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에냐의 짓으로 보이는군요. 마스터께서 아무리 시간을 강조하셨다고 해도…. 옆에는 클리오나 양도 있었을 텐데.”

    거대한 구멍은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심지어 강제로 바닥을 부순 듯한 흔적마저 남아있었다. 아카데미 생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기에, 빠를수록 좋다고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막 나갈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게이트를 찾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클리오나를 옆에 두고도 이런 일을 만들어서 혼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에냐일 거였기에.

    트리아가 구멍을 통해 폴짝 뛰어내리려는 그 순간.

    엄청난 마나의 압력과 함께 고유 결계가 펼쳐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2층에 있었기에 그 영역에 끌려들어 가지는 않았다. 트리아는 특유의 마나 감지로 이게 에냐의 고유 결계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고유 결계를 사용했다면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일반적인 마족을 사냥하는 데에는 기본적인 마법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녀들은 좋은 의미로도, 안 좋은 의미로도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들이었다.

    지하 3층으로 트리아는 밖에서는 진입할 수 없는 고유 결계가 쳐져 있어 부수고 들어갈까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마법이 해제되어 안에서 싸우던 두 명의 얼굴이 보였고, 트리아는 동료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괜찮습니까? 에냐, 클리오나.”

    “트리아 언니?”

    “트리아 님? 당신은 카리나를 구출하러 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상상치도 못한 트리아가 등장하자 에냐와 클리오나는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랐다. 그녀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아카데미 생을 구하는 것만큼 카테리나 아르테미스를 구하는 임무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걸 보도록.”

    트리아는 자신을 보는 시선을 눈치채고 나침반의 형태를 띠고 있는 아티팩트를 보여주었다. 나침반은 이 던전에 카테리나가 있다는 게 맞다는 듯 엄청난 속도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어… 이건 마스터가 주신 아티팩트죠? 마나를 쫓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도네요?”

    “엄청나게 돌고 있습니다. 이러면 고장이 난 게 아닙니까?”

    에냐 그리고 클리오나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티팩트를 보며 각자의 의견을 내놓았다. 서열 윗 순위인 트리아의 등장에 에냐는 공손해졌다. 클리오나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트리아 때문에 말투가 원래대로 바뀌었다.

    “리오나 말투 원래대로 돌아갔네. 역시 트리아는 무서워?”

    “신께서 계시지 않으면 평상시대로 말해도 된다. 작전 중에는 쓸모없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마라.”

    트리아 역시 존경하는 유피테르처럼 합리적인 성격이었다. 누구보다 규율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음에도 긴장하고 있는 두 명에게 임무 중에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을 중요시하라고 말해주었다.

    “고마워. 역시 트리아 언니야. 아, 이모리엣이라는 새로운 마족이 있었고 지금은 도망간 거 같아.”

    “감사해요. 아티팩트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이곳이 마지막이에요. 그럼 이곳에 카리나를 포함한 모든 아카데미 생들이 있는 걸까요?”

    상황이 정리되자 두 사람은 트리아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전달했다. 고위 마족 이모리엣은 고유 결계가 해체되자 뒷맛이 좋지 않은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피아쿠스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마족은 첫 등장부터 사라질 때까지 의문점투성이였다.

    “씨앗을 심어두었다…라.”

    씨앗. 흔히 말하자면 농사를 위한 밀이나 꽃의 씨앗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말을 남긴 자가 마족이라면 180도 다르게 생각하는 게 맞았다. 심지어, 이모리엣은 타르타로스에서 탈출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았는가.

    아카데미 생. 카테리나 아르테미스. 옴팔로스 그리고 씨앗.

    4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트리아는 생각의 속도를 올렸다. 현 마스터 유피테르가 나오기 전까지 참모의 역할을 맡은 게 바로 그녀였다. 그러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았다.

    그 결과.

    “마왕의 씨앗인가…. 역시 오흐트를 데려왔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 통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게 분합니다.”

    그녀는 방대한 서고 같은 지식을 이용해서 결국 정답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유피테르가 알려주었던 정보에 씨앗이라는 키워드가 더해지자 마족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확실히 보였다.

    “마왕의 씨앗? 그게 뭐야 처음 들어보는 건데 불길한 느낌이 드네. 리오나 넌 알아?”

    “아뇨. 성국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마왕의 씨앗이라는 불길한 단어에도 에냐와 클리오나는 전혀 짚이는 곳이 없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초의 마왕 티폰은 잊혀진 시대부터 죽지 않고 살아왔던 마왕이었으니까. 마왕과 씨앗이라는 말은 도저히 연결되지 않았다.

    “마왕의 씨앗은 후대 마왕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물건이다. 공포와 마나를 흡수해서 점점 커지지. 그 씨앗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그곳에서 새로운 마왕이 탄생한다. 그건 비밀 정보니 성국의 일반 신관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하다.”

    시대를 지배할 신 마왕의 탄생. 이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마왕의 태도에 따라서 대륙 전쟁이 한 번 더 발생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이번에야말로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티폰 이후에 새로운 마왕이 나온다고? 단순히 공작급 마왕을 소환하려는 게 아니었단 말야?”

    같은 칼리스토 자매의 일원인 에냐는 믿을 수 없었다. 마왕의 씨앗이라는 단어도 처음 들었고, 간단하게 생각했던 미션이 이런 식으로 심화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세한 건 오흐트가 알고 있을 거다. 신께서도 이 모든 걸 예측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착각일 것 같은데 말이지.”

    트리아의 말에 에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지나친 생각이었다. 에냐 역시 유피테르를 엄청난 마스터로 존경하고 있었으나 신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실패도 하고 절망도 겪기도 했으니까.

    “그렇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클리오나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물었다. 마족과 수호자가 없어졌으니 이곳을 수색하기만 하면 임무는 끝일 것이었다. 그러나 마왕의 씨앗이라는 이야기가 정말이라면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아카데미 실종자와 카테리나 님을 찾기로 한다. 지하 3층에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서로 흩어지자.”

    트리아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말없이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트리아 역시 지체하지 않고 바로 마나 감지를 사용하며 돌아다녔다. 단 한 사람이 늘었을 뿐인데 마나 감지의 범위와 속도는 차원이 달라졌다.

    “클리오나입니다. 실종된 아카데미 생들을 발견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아카데미 생들이 정신을 잃고 구속당해 있는 것을 클리오나가 발견했다. 던전 내에서는 통신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칼리스토 두 명에게 현재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실종자들이 모여있는 방 안에 모두가 모였다.

    “실종자 명단을 모두 외우고 있다고 했지? 확인해줘 리오나.”

    “두 분이 오기 전에 마나 패턴을 통해 모두 확인했습니다. 학생회장 카테리나 아르테미스를 제외하고 실종된 모두가 이곳에 있습니다. 다만, 이 가면 같은 것을 벗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에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리오나가 대답했다. 두 사람이 오기 전에 그 정도는 모두 확인해보았다. 부회장의 권한 중 하나가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지급받는 것이기에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에 있는 아카데미 생들은 그녀가 외우고 있던 명단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문제는 그들을 팔을 억압하고 있는 사슬과 얼굴에 씌여진 마족을 형상화한 듯한 가면이었다. 보기만 해도 마족의 더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성국 출신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펜던트는 없고 이상한 가면만 쓰고 있네. 이쯤 되면 티아나와 세이드의 발언이 정말로 거짓말인 게 아닌가 생각되는 수준인걸.”

    “기억을 조작당했을 확률도 있습니다. 저 가면에서 마족의 마나가 나오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클리오나?”

    에냐의 말에 트리아는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기상천외한 마족의 마법이라면 기억 조작쯤은 쉽게 할 수도 있었다. 고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족들에게 이는 혼돈과 파괴를 일삼을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질문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클리오나는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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