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89화 (89/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15)

    * * *

    짝짝.

    이모리엣이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환상 결계가 해제되며 던전 지하 3층의 위용이 그대로 나타났다. 음습한 지하 감옥의 분위기는 에냐와 클리오나를 단숨에 압도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모리엣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수호자급 몬스터들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왔다. 척 봐도, 10명 정도 되어 보이는 그들은 이모리엣을 수호하는듯한 자세를 취했다.

    “골골….”

    “해고르로로고르골!”

    “레엠 렘….”

    “고르 렘렘!”

    가장 앞선에 선 건 8체의 든든한 전위들이었다.

    챔피언 스켈레톤 워리어 한 체와 나이트 두 체, 파이어 골렘 세 체와 스피릿 골렘 두 체.

    하나하나가 던전 수호자급으로 이루어진 1진은 그야말로 철벽과도 같았다. 방어력은 물론 공격력까지 갖춘 최고의 조합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있던 게 평범한 마법사라면 당장이라도 도망가는 걸 포기할 정도였다.

    “이거야. 영 장관이지 않은가. 챔피언급 몬스터들이 나를 지켜주다니.”

    챔피언 스켈레톤 워리어 100체도 손쉽게 제압한다는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

    죽음을 거슬러 오른 기사는 검사 계열 언데드의 황제였다. 데스나이트의 주변에는 검은색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항시 데스 오라가 펼쳐져 있었다.

    “이런 이런, 마지막은 나잖아. 위대하신 마족님께서 대신 처리해주면 안 되나.”

    가장 뒷 선에는 아까 전의 리치가 어느새 자리하고 있었다.

    리치는 여전히 귀차니즘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있는 듯 보였다. 마족에게 불려왔음에도 그에게 일을 맡기고 싶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동시에, 리치는 언데드 최강의 마법사라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고대 마법사 특유의 마법진이 주위에 가득했으니까. 마법진들은 언제라도 명에 따라서 마법을 쏘아낼 수 있었다.

    “이런 전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에냐는 던전 수호자급이 다수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분명, 아카데미생의 마나는 확인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까지는 아직 정보가 없었다. 고작 저런 것들에게 시간이 낭비되는 거라고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다른 무엇보다도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이번 마스터는 전대 마스터와 다르게 나긋나긋한 편이었다. 설령, 몇몇의 자매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어떻게 할 거야?”

    에냐에게 묻는 클리오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아카데미 최강 중 한 명이라고 해도 이곳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리오나는 저층 던전을 돌파할 정도의 실력밖에 없었다.

    델포이 아카데미 최상위 랭커는 현역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강력한 편이라는 건 분명히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던전에서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몰랐다. 다수의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돌파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던전 몬스터보다는 수호자급 몬스터 한 체가 문제였다.

    던전을 지키며 침입자들을 먹이로 삼는 수호자. 그들은 현재의 마법사들이 알지도 못하는 고대 마법들로 공격했다. 미지의 마법들이 쏟아지는 던전은 생각하기도 싫은 악몽이나 마찬가지였다.

    “트리아 언니나 하다못해 오흐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 시간은 미스릴보다 비싸다고.”

    에냐의 씁쓸한 목소리가 던전에 울려 퍼졌다. 마족이나 언데드가 상대라면 트리아나 오흐트는 일당백. 아니 일당백을 넘어 일당천 이상도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이었다.

    솔직히 에냐도 이들을 전부 때려잡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두뇌파라고 해도 그녀도 칼리스토의 일원이었다. 고위 마족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납치된 아카데미생들로 협박을 당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자신이 더 강한 존재였지만, 인질이 있는 이상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건 금물이었다.

    “카리나와 함께 했을 때, 수호자 한 체도 어렵게 공략했었는데. 이제 어떡하면 좋지?”

    클리오나는 여유로웠던 에냐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족도 모자라 10체의 수호자라니.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던전의 어두운 분위기가 마치 그들의 앞날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왕 살해자의 동료들이여.”

    입술을 깨무는 에냐와 어두워진 표정의 클리오나를 보며 이모리엣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칼리스토 자매가 강한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 수호자가 이 정도로 많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던전 안에서는 수호자들이 마족보다 성가시다는 걸 그 역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던전 수호자는 해당 던전 안에서는 거의 무적에 가까운 마나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수호자를 부르기 위해 무리했지만, 그런 건 나중의 일이었다.

    저 생생한 마나를 그분에게 바칠 수 있다면 이득이었다.

    “어쩌긴 박살 내야지. 덤벼, 깡그리 사신의 품으로 돌려보내 줄게.”

    에냐 식 고유 결계 ― 폭풍의 언덕

    칼리스토의 일원 중 하나인 에냐.

    그녀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은 고유 결계를 펼치는 것이었다. 무한한 마나를 지닌 수호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단시간이라도 결계 내부의 영역을 지배할 수 있었기에.

    “이게 세컨드 서클을 도달한 마도사만이 쓸 수 있다는 고유 결계야?”

    “음… 그 서클 개념으로 우리를 판단하는 건 좀 애매하긴 한데. 맞아. 마법사의 정신이 그대로 담긴 결계지.”

    폭풍 그리고 비와 바람으로 채워지는 세계를 보며 클리오나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퍼스트 서클인 그녀에게 고유 결계는 전설 속의 기술이었다.

    어린 시절 성녀의 고유 결계를 본 이후, 그녀는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세컨드 서클의 벽은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리나도 세컨드 서클의 벽을 돌파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멈춰있었으니까.

    “이게 마족이 극찬한 고유 결계라는 건가? 미래의 마법사들은 신기한 기술을 쓰네.”

    “흠…. 확실히 몸이 조금 둔해지긴 했군.”

    고대에는 없었던 고유 결계를 보고 리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마법에 대한 지식욕. 이것이야말로 리치가 된 이유였다. 당장이라도 저 마법을 분석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리치의 앞에 있던 데스나이트는 검을 꺼내 몸을 움직여보았다. 검의 궤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세를 몇 번이고 바꿨다. 간단히 상태를 확인한 것뿐인데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골골!”

    스켈레톤 워리어는 데스나이트의 자세를 보며 이빨을 부딪치며 칭찬했다. 해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같은 해골들과 데스나이트 그리고 리치뿐이었다.

    “워리어. 앞을 보고 적을 해치워라. 그게 네 일이니까.”

    데스나이트는 자신을 칭찬한 워리어에게 쓴소리를 날렸다. 그 말을 들은 워리어는 황급히 앞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표정에는 자신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워리어에게 있어 데스나이트는 단순한 상급자가 아니라 마음속 별이었으니까.

    “그만 떠들고 덤벼. 급의 차이란 게 뭔지 알게 해줄 게 해골 바가지들아.”

    마족에 대한 짜증과 귀찮음이 적절히 섞인 에냐는 폭발 직전이었다. 공작급이 아니라면 칼리스토들이 질 일은 없었다. 마족인 이모리엣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런 식으로 계속 기어오르는 걸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상식인이라며….”

    에냐의 폭주에 어쩔 줄을 모르는 클리오나. 슬프게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 대치 구도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극히 작았기에. 인간 마법사의 위치란 늘 그런 것이었다.

    에냐 식 특제 마법 ― 벼락

    고유 결계 속에서 그녀는 손대중하지 않았다.

    폭풍으로 인해 생겨 난 비바람으로 시야가 흐릿했다. 결계의 영역 안에서 그녀는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신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

    손짓 한 번으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수의 벼락.

    ‘자칫 잘못하면 전멸하겠군.’

    데스나이트는 검을 쥐고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에게 있어 방패란 불편한 물건이었다. 검 한 자루만 있으면 어떤 방패보다 뛰어난 방어를 할 수 있었다.

    ‘너무 재밌어.’

    리치 역시 벼락을 막기 위한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역사 속에 잠들었던 마법진이 흐드러지게 펼쳐지며 수호자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고대 마법이 위력을 선보일 일은 없었다. 고유 결계 속에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설령, 현재와 구동 방식이 다른 마법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인가요.’

    이모리엣은 이 모든 게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장 뒤편에서 에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번개 마법은 리투아 제국 황실의 인간 말고는 사용하지 못할 텐데?”

    흘러가는 상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건 클리오나뿐이었다. 번개 마법은 리투아 제국 황실의 혈계 마법이었다. 칼리스토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그녀의 의문은 당연했다.

    “나중에 설명해줄 게. 지금은 수호자랑 마족부터 잡자고.”

    “멍청하게 행동해서 미안.”

    “아직 아카데미생이잖아. 앞으로 나아가면 되지. 언제 마족과 수호자들을 이만큼이나 상대해보겠어.”

    “랭킹전을 앞두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네.”

    얼어있던 클리오나도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마족과 수호자 그리고 고유결계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헤맸었다, 하지만, 에냐의 도움으로 드디어 갈 길을 찾았다. 그녀는 성국의 신성 마법사가 사용하는 스태프를 꺼내 들고 전투 준비를 마쳤다.

    클리오나 식 신성 마법 ― 빛의 구슬

    마법사들에게 스태프나 무기는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집중력을 높여서 마법의 위력을 더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에냐의 고유 결계는 클리오나를 확실하게 아군으로 인지하고 있는지 그녀의 마법을 강제로 해제하지 않았다.

    클리오나가 만들어낸 열 개의 빛의 구슬은 폭풍의 도움을 받아 스켈레톤들을 덮쳤다. 그 위력은 클리오나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강해져서 스켈레톤을 그대로 관통해버렸다.

    마치, 사과를 향해 날아간 올곧은 화살처럼.

    “이게 무슨 위력이야. 이건 마치….”

    클리오나는 간단한 마법이 만들어낸 결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스태프를 잡고 마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이런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 일격에 세 마리의 챔피언을 잡다니. 이런 건 꿈에서도 불가능했다.

    “조화 마법 같지? 이게 고유 결계의 위력이야. 게다가 신성 마법은 조금 특별하니까 말이지. 우리와 합이 잘 맞는다고나 할까.”

    “그래? 내가 던전 수호자를 한 방에 물리칠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하지만 아직 리치와 데스나이트가….”

    아직, 클리오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에냐는 말할 틈조차 주지 않는 데스나이트를 감지하고서 마법을 펼쳐냈다. 그녀의 행동은 너무나도 빨라, 데스나이트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에냐 식 특제 마법 ― 번개 폭풍

    단순한 벼락이 아니었다.

    거대한 돌풍 속에서 뇌우(雷雨)가 거대하게 울렸다. 번개의 성질이 입혀진 폭풍은 위협적이었다. 탐욕스럽게 전진하며 결계 속의 에너지를 그대로 먹어치웠다.

    고유 결계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던전의 고농축 마나를 흡수한 마법은 더는 마법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번개 폭풍은 자연 현상 그 자체가 되어 데스나이트와 리치를 향해 나아갔다.

    “저건 벅찰지도 모르겠군.”

    “미래의 마법사가 전개하는 마법은 정말 신비하네. 뭐 우린 죽어도 죽은 게 아니지만. 우리 부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복수해줄 거란다?”

    두 명의 마지막 수호자들은 방어 자체를 포기했다. 저 마법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단 1%도 들지 않았기에. 이미 언데드들이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 버린 지 오래였다.

    담담히 마지막을 기다린 그들은 소멸했다. 최강의 언데드 기사와 마법사는 죽는 모습도 무언가 달랐다. 강자에게 죽는 것이 기쁜지 리치는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번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던전.

    에냐는 고유 결계를 해제하고 상황을 확인했다. 마족은 숨겨둔 비장의 패라도 있는지 상처하나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에냐는 이모리엣과 눈이 마주쳤다. 이모리엣은 네 생각쯤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고는 징그럽게 웃었다.

    “역시 마왕 살해자의 동료들인가요? 하지만 곧 씨앗이 봉오리를 맺을 겁니다. 이미 늦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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