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사냥의 밤(14)
* * *
에냐의 마법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해골들을 그대로 분쇄해버렸다.
빠르게 진동하는 바람의 칼날은 무자비했다. 애초에 그녀에게 몬스터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전장에서 그런 건 사치였다.
그녀는 몬스터를 악(惡)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먼지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대충 정리했네. 이제 더는 해골들을 만들지 않는 건가?”
“칼리스토는 모두 굉장하네. 저번에 봤던 바람 마법사는 그냥 그랬는데.”
툭툭.
에냐는 무의식적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환기도 잘되지 않는 지하 감옥은 당연히 먼지로 자욱했다. 그 와중에도 에냐의 제복에는 몬스터의 피가 하나도 묻지 않았다.
칼리스토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상식을 지닌 그녀는 결벽증이 있었다. 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몬스터의 피를 피한 것이었다. 그녀의 병은 인간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고 몬스터나 마족 등에게만 반응했다.
인간은 ‘그녀’가 사랑했던 존재였으니.
전투를 가장한 일방적인 폭력의 시간이 끝나고 에냐와 클리오나는 몬스터가 새로 소환되나 기다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여유가 생겼다고 판단한 에냐는 마족의 반응을 확인하자고 말했다.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와. 리오나. 마족이나 아카데미 생들의 반응에 집중해 봐.”
스르륵ㅡ.
리오나는 두 눈을 천천히 감고서 마나를 모았다. 시야를 어둠이 덮어버리자 오히려 감각이 확장되는 게 느껴졌다.
‘저것도 그리고 이것도 지금은 필요 없어.’
단 두 개.
그녀가 필요한 건 빌어먹을 마족과 아카데미의 동료들이었다.
성국 출신의 그녀에게 마나 감지는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건 마법사의 기본이었다. 마나는 클리오나의 눈이 되어 던전 지하 2층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1층에서 확실히 느껴지던 마족의 잔향이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아카데미 생들의 마나 역시 응답하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마. 다시 한번 찾아보자.’
마나 감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마음이 절로 급해졌다. 어떻게든 진정하고 정신을 집중하려고 해도 옆에서 에냐가 쳐다보고 있어 잘되지 않았다. 이런 변명이나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찰싹.
그래서 양손을 들어 뺨을 세게 쳤다.
빠르지는 않지만, 손에 꽤 힘을 주었기에 뺨이 얼얼해졌다. 생생한 아픔이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들이 보였다.
“찾았어. 마족도 그리고 아카데미 생들도. 정확히 이 밑에 있어.”
“2층이 아니라 3층이라. 그렇단 말이지….”
지하 2층에서 느껴지던 마족의 반응은 사라졌다. 대신에 3층으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들을 놀리는 것처럼.
에냐는 어떻게 행동할까 고민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함정에 들어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칼리스토는 강력한 힘을 지닌 거지 멍청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클리오나에게 트리아와 같은 능력을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트리아의 감지는 칼리스토 중에서도 압도적이었으니까.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에냐는 전대 마스터의 방법을 이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힘이 부족하니 머리에 의존하게 되는 거야. 복잡한 고민이 있을 때는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하렴.”
언젠가 그녀의 마스터가 해주었던 이 말은 딱 지금 상황에 적절했다.
그건 게이트를 통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방법이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강력한 힘으로 바닥을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자격도 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에냐 식 특제 마법 ― 폭풍의 검
에냐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폭풍이 순식간에 만들어져서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폭풍으로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폭풍은 점점 압축되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검…?”
시동어 그대로 폭풍으로 이루어진 검을 보고서 클리오나는 중얼거렸다. 저 검을 이루고 있는 마나 하나하나가 흉포한 기운을 담고 있다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그녀가 동료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몸이 떨렸다.
에냐는 폭풍의 검을 양손으로 잡고서 바닥을 직선으로 베었다. 그 작은 날갯짓은 폭풍이라는 이름의 걸맞은 위력을 보여주었다. 절대로 부술 수 없다는 던전의 바닥을 그대로 부숴버렸으니까.
“던전의 벽이나 바닥은 절대로 부술 수 없는 거 아니었어…?”
클리오나의 의문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던전의 벽을 저 정도로 부술 수 있으면 조난당해서 죽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니까. 그건 마법사들 사회에서 당연한 상식이었다. 아카데미에서도 던전에서 조난당하지 않도록 여러 팁을 주고 있었다.
“여기서 본 건 둘만의 비밀로 해줘. 이거 마스터한테 들키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칼리스토 자매들은 분명 어디인가 어긋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세상의 인식을 바꿔놓을 수 있었기에 일종의 리미터 역시 걸려있었다. 그래서 일정 이상의 힘을 낼 때는 같은 자매들이나 마스터가 있어야 했다.
언니들이나 마스터 둘 다 없는 상황에서 이런 무지막지한 일을 벌였다면 혼날 게 당연했다.
“으응. 알았어. 칼리스토의 상식 아니었어. 너? 그런 식으로 소개받았던 것 같은데.”
“이 정도는 상식 아니야? 농담이야. 농담. 지금은 급하니까 잠시 이런 방법을 쓴 것뿐이라고. 길이 생겼으니 내려가시죠 성국의 마법사님.”
“지금은 아카데미 부회장이라고 해주면 고맙겠어. 그래. 내려가자.”
스켈레톤 군단과 싸우며 쌓인 전투의 피로는 잠깐의 농담으로 인해 확실하게 풀렸다.
‘네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거 다 알아. 조금만 더 힘내.’
에냐는 마족과의 싸움을 앞두고 클리오나에게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라도 클리오나가 웃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실종된 아카데미 생과 마족이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 지하 3층.
“정말 스켈레톤 하나 없이 조용하네.”
클리오나는 아무것도 없어 무언가 마법에 걸린 게 아닌가 확인했지만, 두 사람은 확실하게 정상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눈이 아니라 마나 감지를 의지해야 했다. 눈은 불필요한 정보를 너무 많이 보고 있었다.
눈을 감고서 마나를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자.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자신의 마나는 분명히 이곳에 적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 못 돌아가고 있었다.
“환상 결계라니 귀찮은 짓을 잘도 해줬네. 예상보다 강한 마족이 델포이에 숨어들었나 본데.”
“이 현상이 뭔지 아는 거야?”
눈과 마나의 부조화.
에냐는 이 현상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듯했다. 클리오나는 자연스럽게 이 현상에 관해서 물으려고 했지만, 에냐는 그런 그녀를 제지했다.
“나중에 알려줄게.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걸?”
“호오. 역시 소문이 자자한 칼리스토 출신답군요. 당신은 딱히 본 적이 없는 얼굴이지만 말이죠. 이쪽은 레아의 개인가요?”
회색 올백 머리의 늙은 집사 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뚜벅뚜벅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인자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은 마족의 붉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분을 소환할 제물들이 제 발로 걸어올 줄이야. 오늘의 저는 꽤 행운아군요.”
마족은 굉장히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가 아니라 추잡스럽고 징그러운 웃음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역겨울 정도여서 왜 마족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미소가 징그러운 거 보니 어디 파벌인지 확실히 알겠네.”
“이모리엣이라고 합니다.”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너 자의식 과잉이라는 소리 안 들어? 게다가 네 모습 왠지 낯이 익은걸.”
“당돌한 아가씨군요. 그분께서 정말로 좋아하시겠어요. 그리고 아가씨의 애정 가득한 대쉬를 받기엔 제가 나이가 좀 그렇습니다만?”
에냐와 이모리엣이라고 이름을 밝힌 마족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보통 신경전을 벌인다면 마나도 같이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두 존재의 마나는 봄바람처럼 따스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이야기하듯이.
“아카데미 생들을 납치한 게 당신인가요? 대체 뭘 위해서!’
“다 알고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마왕 살해자의 동료이신 분들께서 고작 이 정도라면 실망이군요.”
이모리엣은 인상적인 턱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까지도 역겨운 미소가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은 새로운 제물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만 쳐다봐. 그 눈 다시는 못 뜨게 해주기 전에.”
“호오. 입이 거치시군요. 바르고 고운 말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한창 자라나는 꿈나무 마법사가 있는데.”
“그 꿈나무들을 짓밟은 게 당신이잖아?”
에냐는 웃기는 소리 말라며 으르렁거렸다.
먹여주고 재워주려고 아카데미 생들을 납치한 건 아니라는 게 분명했으니까. 심지어 이미 ‘제물’들이 왔다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공작님을 소환하는 제물이 된다면 그건 꿈나무로서 최고의 행운 아닙니까?”
희열에 젖은 노집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 행동만으로도 모시는 공작급 마족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공작급 마족은 전부 제멋대로인 자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어나 보자. 왜 타르타로스에서 나오려고 하는 거야. 거기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내라고 좀.”
“어차피 마족과 인간은 하나가 아닙니까. 강해지겠다는 욕망 하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종족은 이 세계에 둘밖에 없으니까요. 카르멘 비제가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
이모리엣의 말에 에냐는 물론 이 자리에서 인간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클리오나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디악의 일원이었던 카르멘의 배신은 그만큼 아팠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말이 많네. 그냥 죽어줘,”
에냐 식 바람 마법 ― 매의 날갯짓
마족의 헛소리를 더는 들어줄 수 없었던 그녀는 바람 마법을 전개하며 이모리엣을 공격했다. 바람은 그녀의 소원대로 거대한 매의 형태를 만들었다. 매는 매섭게 날갯짓하며 마족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공격을 한다던데. 칼리스토인 당신도 마찬가지군요.”
이모리엣은 매의 날갯짓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맞았다.
쾅ㅡ.
“흠. 30점 정도로군요.”
던전을 부숴버렸던 전적이 있는 그녀의 마법을 직통으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역시 고위 마족은 이렇게 강한 건가요….”
인간 중에서는 마족에 대해 꽤 잘 알고 있었던 클리오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한 마리의 마족만 나타나도 인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고위 마족으로 보이는 이모리엣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꽤 강력한 마법을 쓰시는군요. 점점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계획을 앞당길 수 있겠군요.”
이모리엣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는 에냐와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이는 클리오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매의 날갯짓을 가뿐하게 막아낸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레아 님 저를 지켜봐 주세요!”
클리오나 식 신성 마법 ― 빛의 흐름 : 연발
어차피 마법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성국의 마법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었다. 클리오나는 스켈레톤 무리를 압도했던 빛의 흐름을 펼쳐 마족을 공격했다.
성스러운 빛이 여러 줄기로 흩어지며 이모리엣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창조신 레아를 믿지 않더라도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할 법한 색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모리엣은 작은 충격도 받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럼에도 신성 마법은 확실히 마족과 극악의 상성을 가지고 있는 게 맞았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마법을 파훼했는지 보였으니까.
“재롱잔치는 이제 끝났나 보군요. 그럼 이제 제가 공격하도록 하죠. 다들 나와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