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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87화 (87/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13)

    * * *

    “골골골골…!”

    첫 번째 해골은 리치에 말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였다.

    평생 기사도를 지키며 살아봤자 뭐하는가. 마족한테 붙잡혀 던전이나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 채 기사 노릇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번 죽었던 기사라도 엄연히 사람이었다.

    살아있을 때는 연봉도 높았고 편안한 노후와 사람들의 존경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뭐가 남아있는가. 던전에 있어봤자 돈도 못 벌고 따스한 음식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타락한 기사라고 해도 전투광은 아니었다.

    피를 보는 게 이제는 지겨웠다.

    이 해골은 앞서가는 저 해골과는 다르게 죽어서까지 기사도를 지키고 싶지는 않았다. 앞에 있는 저 해골 기사야말로 흔치 않은 타입의 언데드였다. 그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 저렇게 열심히 살아봤자 데스나이트로 진급할 수 없다고. 바보 같군.”

    리치 역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 던전의 수호자급이었던 그들은 계약을 통해 이곳으로 소환되는 것이었다.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일반 몬스터와는 급과 대우가 달랐다.

    “골골. 골골고르골골.”

    “하아…. 어쩔 수 없나. 저 녀석 성격대로라면 그대로 마족에게 일러바칠 테니 가야 하나.”

    스켈레톤 나이트와 리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선 해골 기사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저 나이트는 맹목적으로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같은 해골이었다.

    그래도 각개 행동을 할 수는 없기에 앞서간 나이트를 따라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지금 뒤를 쫓으면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대화가 생각보다….”

    “재밌지? 저기도 일종의 사회를 만들고 있으니까 비슷한 게 당연하지.”

    몬스터의 대화를 들은 에냐와 클리오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특히,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리오나는 어이가 없어 순간적으로 힘이 빠질 정도였다.

    마법사 아니, 인간에게 있어 몬스터와 던전 수호자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인간의 마나를 탐하는 ‘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저런 태도를 보일 줄 꿈에도 몰랐다.

    “그럼 더 깊이 들어가자.”

    “결계가 깨진 걸 알면 저들이 바로 돌아올 텐데? 구하고 돌아올 때 양쪽에서 협공당할 수도 있어.”

    “맞는 말이네. 그래도 아마 쉽게 되돌아오지는 못할걸?”

    에냐식 바람 마법 ― 매의 눈

    “그건 무슨 마법이야?”

    “일종의 탐지 마법이자 덫이라고 생각하면 돼. 여기에 환상 마법을 쓸 수 있는 다른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말야.”

    클리오나가 걱정하는 부분을 에냐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몬스터와 수호자들을 격파하는 건 불가능헀다.

    마스터의 허락이 없으면 칼리스토의 힘은 제한되어 있었으니까.

    “마족의 위치가 잡히나 확인해볼게.”

    클리오나 식 신성 마법 ― 빛 쫓기

    그녀는 마나를 주위에 넓게 퍼트리며 마법을 전개했다. 단순한 마나 감지야 에냐가 훨씬 위겠지만, 상대방이 마족이라는 게 주효했다. 마족을 때려잡는 데 최적화되어 있는 게 신성 마법이었으니까.

    신성 마법사들은 대부분 치유와 축복 계열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마족이 나타났을 경우 그들은 누구보다 공격적인 전투 마법사로 탈바꿈했다. 바로, 크레이타의 마법사들이 신성시하는 레아의 힘 덕분이었다.

    대륙 전쟁에서 마족을 손쉽게 제압한 창조신 레아의 힘은 마족에게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무언가 느껴져? 이 정도 크기의 던전이라면 반응이 제대로 잡혀야 정상인데.”

    리오나가 마법을 사용하는 걸 지켜본 에냐가 기대감에 차서 물었다. 솔직히 아카데미생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지금까지 만나보았던 성국 출신의 마법사는 다들 숨겨진 한 수가 있었다. 마스터가 선택한 자라면 충분히 찾아내야만 했다.

    “지하 2층에서 잡혀. 몬스터의 반응과는 확연히 달라. 분명히 마족이라고 생각해.”

    “3층이 마지막인데 2층에서 마족의 반응이 잡힌 다라. 그거 재미있네. 혹시 더미가 아닐까.”

    에냐의 생각대로였다. 신성 기관 출신이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보통 수호자는 최하층이나 최상층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형 던전이라고 해도 중간쯤에 마족의 반응이 나타나는 건 이상했다. 굳이 중간에 있을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 위치에 있는 마족의 반응이 잘 꾸며진 함정이라는 것.

    “어차피 여기서는 알 수 없으니 내려가자. 신속할수록 실종자들이 안전해질 확률이 높아.”

    상황을 판단을 마친 에냐는 마족이 있는 곳으로 당장 움직이자고 했다.

    가보지 않고 진실을 알 방법은 없었다. 엘프가 쓰는 정령술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필요로 해봤자 시간 낭비였다.

    “방금 마법으로 던전의 구조를 대충 파악했어. 이쪽이야.”

    리오나는 신성 마법으로 마족의 반응을 쫓으며 던전의 구조도 어느 정도 확인했다. 그러자 자신감이 차올라 앞장서겠다고 했다.

    “잠깐…. 마스터가 너 길치라고 하던데. 괜찮겠어?”

    에냐는 이곳으로 오기 전 유피테르가 짧게 덧붙인 말을 기억해냈다. 헤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그녀의 뇌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언젠가 클리오나가 지도를 갖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해 물어보자, 마스터는 그녀가 길치라는 사실을 조용히 전해주었다.

    “아…. 맞아. 나 길치였지.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그럼 에냐 너에게 맡길게.”

    아카데미생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마족을 상대한다는 고양감

    이 두 개의 감정이 자신이 길치였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에냐의 걱정을 들어주기 위해 리오나는 키를 잡는 역할에서 사퇴했다. 그 대신, 후방에서 지원하는 일에 집중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저쪽에 게이트가 있네. 가서 내려가자.”

    에냐와 클리오나는 결정을 내리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동했다.

    신기했던 점은 던전에 가득해야 할 몬스터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쉽게 이동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고, 지하 1층까지 문제없이 도착했다.

    기이한 현상은 지하 1층에서도 계속되었다.

    “왜 몬스터가 하나도 없지? 혹시 이런 경험 해본 적 있어 에냐?”

    겉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난 힘을 지닌 칼리스토 자매의 일원이라면 답을 알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클리오나의 물음은 그저 허공을 메아리쳤을 뿐이었다.

    에냐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마족이 고도의 심리전을 거는 게 틀림없었다.

    “나도 이런 형식의 던전은 처음 보는데. 이건 그냥 던전의 형태를 띤 저택 수준이잖아. 마족의 생각이란 건 정말 알 수가 없네.”

    “정령으로 교수님에게 연락을 드려봐야 할까?”

    “아직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해본 적 없잖아? 봐. 곧 2층으로 향하는 게이트야. 내려가서 상황을 보고 나서 연락해도 늦지 않아.”

    “이런 거로 교수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긴 하지.”

    “어차피 패스가 이어져 있어서 대략적인 상황은 마스터도 아실 거야”

    칼리스토 자매들과 마스터 사이에는 ‘패스’가 연결되어 있었다.

    패스는 칼리스토의 일원이라는 증거이자 일종의 구속 장치였다. 물론, 이 패스를 그가 만들지는 않았다. 전대 마스터인 ‘그녀’의 계약을 유피테르가 이어받은 것뿐이었다.

    마스터와 칼리스토는 패스를 통해 서로의 대략적인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서로 떨어져서 임무를 수행할 때 유용했다.

    “알았어. 네 판단을 믿을게.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또 한 층 내려갔다.

    지하 1층에 더 이상 확인해볼 게 전혀 없었기에. 마나 반응도 약했고, 몬스터도 없었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준비되지 않았다. 지하 2층에서 느껴졌던 마족 반응을 확인해야만 했다.

    비록, 그것이 함정일지라도 말이다.

    “이제 좀 던전 같네. 안 그래?”

    게이트를 넘어 지하 2층에 도달하자 어둠 속 붉은색 안광들이 그들을 반겼다. 마족과 같은 두려운 눈동자는 아니었다. 단지 사악함에 물들어 있는 몬스터들의 번뜩거리는 눈동자였다.

    마족의 눈동자에서는 본능적인 광기가 느껴진다면 던전 속 잡졸들에게서는 학습된 사악함만 존재했다. 그들은 침입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수호자급 몬스터가 아니라면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지지도 못하고 명령에만 충실히 따랐다.

    “몬스터들을 보고 오히려 안심했다면 내 정신이 이상해진 걸까? 에냐.”

    수없이 많은 해골들이 기괴하게 고개를 비틀며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수호자급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보다는 안심이 되었다.

    “설마. 넌 아직 아카데미생이니까 팔팔하겠지. 혹시라도 걱정된다면 나중에 오흐트에게 가서 치료받아. 그래 보여도 성능은 확실하니까.”

    “건강은 젊어서 챙겨야 한다던데 말이지.”

    에나의 말에 클리오나 역시 농담으로 받아쳤다.

    대화가 끝나자 에냐의 기세가 무서운 속도로 변했다. 전투에 있어서 한순간의 방심은 금물이었다. 제아무리 몬스터를 순식간에 다진 고기로 만들 힘이있다고 해도 말이다.

    “쉽게쉽게 가자고. 아직 실종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까.”

    에냐 식 바람 마법 ― 매의 발톱

    선공은 에냐의 몫이었다.

    그녀는 바람 마법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만들었다. 맹수의 무기를 닮은 마법은 일직 선상으로 날아가며 사선 상의 해골을 부위별로 해체했다.

    “성녀님보다 강한 사람을 이렇게 많이 볼 줄이야. 운이 좋네! 역시 세상 밖으로 나와봐야 한다는 말이 맞았어.”

    클리오나 식 신성 마법 ― 신성한 빛의 줄기

    에냐의 활약에 감명을 받은 클리오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델포이 랭킹전과 다양한 퀘스트로 단련된 몸을 움직이며 마법을 사방에 뿌려댔다.

    번쩍.

    클리오나가 펼친 마법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해골 한 마리에 직격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빛의 줄기는 마치 스프링처럼 이리저리 튕기며 다른 해골을 노렸다. 신성 마법이었기에 언데드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나 어머니였을 텐데…라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에냐와 클리오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마법을 쏘아내었다.

    단 한 종류의 마법에도 해골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해골 병사의 조합이 굉장히 단순했으니까. 아쳐와 나이트 그리고 워리어 정도로 되어 있어 큰 위력을 지니지 못했다.

    간간이 스켈레톤 메이지를 섞어놨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고대 마법을 상대하는 건 골치가 아팠으니까. 그러나 아쳐의 화살은 메이지의 마법과는 달랐다. 충분히 뛰어서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던전이라고 하기에는 몬스터들이 너무 약한데. 리오나. 마족의 반응이 여기서 느껴지지 않았어?”

    “잠시만. 다 정리하고 이야기하자!”

    에냐는 손쉽게 해골들을 요리하며 계획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아카데미생이었던 클리오나에게 집중력을 나누는 건 힘든 일이었다.

    마나 감지야 기본적인 마법이었으나 전투 중에 동시에 쓸 만큼 여유를 가지지는 못했다.

    신성 기관 출신의 엘리트 마법사라고 해도 아직 퍼스트 서클이었다. 심지어, 카테리나처럼 유피테르에게 집중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에냐가 항상 함께하던 유피테르나 칼리스토 자매들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에냐 식 바람 마법 ― 독수리의 포효

    리오나에게 숨 쉴 틈을 주기 위해 에냐는 다른 마법을 전개했다. 2층에 있었다는 마족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골들을 빨리 정리해야 했다.

    던전 안의 공기가 무거워질 정도의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흐름은 곧 모든 걸 삼켜버릴 거대한 바람이 되어 그녀의 적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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