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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86화 (86/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12)

    * * *

    에냐와 클리오나는 유피테르의 지시에 따라 파르니소스 산 중턱을 향하고 있었다.

    트리아의 조사결과 마족의 잔향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피아쿠스가 두 번이나 모습을 나타내 줘서 드디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유도당하는 것 같지만 말이지.’

    클리오나가 잘 따라오나 확인하며 에냐는 상황을 분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딱히, 공격하려는 것도 없이 정보를 주러 마족이 나타나다니. 그렇게 친절한 놈들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마족을 감시하는 일이 더 쉬워졌을 테니까.

    물론, 자신이 합류한 건 나중의 일이어서 판단하기 어렵긴 했다.

    “실종된 아카데미생들은 아마 이곳에 있을 거야. 마족 한 명 정도는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조심해야 해. 그리고 …를 조심하는 게 좋아.”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클리오나는 유피테르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임무 목표와 주의점을 확실히 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타이밍이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지도 위의 한 점을 찍으며 설명했다.

    에냐와 클리오나는 눈동자를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서 그의 말에 집중했었다. 작전 설명 중 한 마디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이곳에는 설명서를 잘 읽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는 바보는 없었다.

    “혹시라도 마족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에냐가 있으니까 일단 싸워봐도 될 거야. 아마, 조심하면서 싸우면 큰 상처 없이 물리칠 수 있겠지. 그렇지만 공작급 마족이 있으면 바로 도망치도록 해.”

    “마스터. 공작급이라도 싸워볼 수 있어요. 저희 자매들의 강함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

    클리오나는 마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살짝 고민했다. 칼리스토의 강함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싸우려니 다리가 후들거렸으니까. 그걸 본 유피테르는 에냐를 믿어보라고 말했다.

    물론, 공작급이 나오면 도망치는 게 좋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 말에 에냐가 자존심이 상한 듯 반발했다. 칼리스토 자매들의 힘이 마족 공작급만큼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건 알지만, 아카데미생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는 걸 잘 알잖아? 마족을 공략하는 것보다 실종자들을 구출하는 게 먼저야.”

    “그건…. 마스터의 말이 맞네요.”

    에냐―클리오나 팀은 마족을 격퇴하러 가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실종, 아니 납치되었다고 여겨지는 아카데미생들의 구출이었다. 마족을 만나지 않고 재빠르게 찾아 약속된 장소로 데려오면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생각의 숲에 빠진 클리오나를 깨운 건 에냐였다.

    마족이 친 결계가 그들을 맞이했기에,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보이는 동료를 일깨운 것이다. 결계 때문에 안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유피테르의 예측대로였다.

    “저기가 마족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아지트군요. 준비는 되었나요. 리오나?”

    그새 친해졌기에 에냐는 부회장을 애칭으로 불렀다. 클리오나 역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정대로 움직이죠.”

    에냐 식 바람 마법 ― 매의 날개짓

    에냐의 인도에 따라 마나가 회전하며 폭풍으로 변했다. 사나운 바람은 곧바로 결계에 부딪쳤다. 마족의 결계는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은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사삭.

    결계는 에냐의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깨져버렸다.

    퍼스트 서클 급 바람 마법에 부서져 버린 결계를 보며 에냐는 안경을 고쳤다. 그녀는 현실감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몇 번이고 깜빡였다. 마족들이 세운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구멍이 이곳저곳에 텅텅 뚫려있었다.

    “뭔가 찝찝하네. 그놈들이라면 허술하게 결계를 쳐놓을 리 없을 텐데.”

    너무나도 쉽게 출입을 허락한 결계를 보며 에냐가 경계심을 올렸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서 나아갑시다. 무슨 일이 발생하듯 저희가 충분히 경계하면 될 일입니다.”

    클리오나 역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자 경계를 올렸다. 성국에서 교육받았던 마족의 특징과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이건 아카데미생들 수준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알았어. 가볼까. 시간이 생명이라고 마스터가 말했으니.”

    “어떤 함정이 기다리든 에냐와 나라면 괜찮겠지.”

    심리전에 져서 도발에만 넘어가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었다. 다른 아카데미생들까지 반―반 마족화가 되기 전에 구출하는 게 작전의 핵심이었다.

    오흐트가 치유할 수는 있었지만, 어떤 후유증이 남을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전에 구하는 게 당연했다.

    둘은 부서진 결계 속으로 돌입했다.

    그 안에는 상상치도 못할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던전이 당당히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던전 식이라니, 준비를 많이 했네. 이 놈들.”

    에냐가 마나 감지를 해보자 유명한 던전들과 다른 점이 보였다. 던전의 크기가 본거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고작 지하 3층밖에 되지 않았다.

    “마족들이 던전을 만들다니 믿을 수가 없어.”

    “던전 전부를 마족이 만드는 건 아닙니다. 일부 마족들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트리아 언니께 물어보는 게 빠르겠네요.”

    마족들이 던전을 강제로 만들어 아지트로 삼은 것.

    이를 깨달은 클리오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던전이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는 아직도 논란이 있는 문제였다. 오늘 그 해답의 편린을 일부 엿본 것 같았다.

    델포이의 퀘스트를 수행하러 여러 던전에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싱싱한 던전은 처음이었다. 갓 만들어진 것인지 마나가 곳곳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조금만 마나를 잘못 배열해도 던전 째로 매장당할 게 훤히 보였다.

    “일단 아카데미생들의 마나가 바로 느껴지지는 않네.”

    에냐는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또 한 번 마나 감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불안정안 던전의 상태만 느껴졌을 뿐, 아카데미생들의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네.”

    “가죠. 최대한 정신을 또렷하게 하세요. 아카데미생인 당신에게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마스터가 믿음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알았어.”

    에냐의 말에 클리오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다니면서 느낀 유피테르라는 사람은 상냥하면서도 누구보다 합리적이었다. 지금은 그런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리오나는 자신을 믿어주는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두 사람이 발을 들인 던전은 을씨년스러웠다.

    곳곳에 놓여있는 횃불과 피 묻은 사슬, 멀리서 들려오는 음울한 몬스터의 울음소리까지. 그야말로 지하 감옥을 연상케 했다.

    “좀 으스스한데. 설마 마스터는 이걸 예상한 걸까?”

    지하 감옥 형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주로 언데드 종류였다. 언데드들에게 신성 마법은 극독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냐는 유피테르의 계획의 끝이 궁금해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그의 계획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레아님처럼 전지전능하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한 톨의 마나도 창조신 레아의 은혜라고 믿고 있는 그녀에게 그 발언은 살짝 위험한 것이었다. 유피테르가 대단한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었기에.

    ㄸ아무리 그라도 인간을 초월했을 뿐, 신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뭐. 마스터도 실수는 하니까. 쉿.”

    유피테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에냐는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숨겼다. 클리오나 역시 빠르게 벽 뒤로 이동했다. 순간적인 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반응은 빨랐다.

    “해ㅡ골골골?”

    “뭐라는 거야. 대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해. 하필 해골이 있는 던전을 만드신 거야. 직접 결계를 관리하는 건 너무 귀찮네.”

    “골골!”

    챔피언 스켈레톤 나이트 두 체가 리치를 보호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스켈레톤 나이트는 뼈다귀만 남은 몸에 검은색의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갑옷이 무겁지도 않은지 뚜벅뚜벅 잘 걷고 있었다. 리치는 마치 과거의 마법사를 연상시키는 망토와 거대한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챔피언 스켈레톤 나이트에 리치라니 어마어마하네. 다른 던전이라면 수호자를 맡아도 되는 수준인데….”

    데스나이트보다 딱 한 수 아래의 챔피언 스켈레톤 나이트 그리고 언데드 계열 최강의 마법사 리치의 조합.

    몬스터들에게서 풍기는 강력한 마나에 클리오나가 전율했다. 하나하나가 그녀가 보아왔던 던전의 수호자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챔피언이 붙은 개체들은 100개체를 합친 것만큼 강했다.

    리치는 던전 수호자로 만나기 싫은 몬스터 랭킹 1위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다양한 고대 마법은 파훼하기 힘들었고, 삐뚤어진 성격은 던전 공략자들에게 절망만을 선사했다.

    “그렇게 걱정하지는 마. 우리를 눈치 못 챈 것 같으니까. 그리고 쟤들이 아무리 강해봤자 마족보다는 약해.”

    에냐는 살짝 떠는 듯 보이는 클리오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용히 속삭였다. 침입자 탐색을 하러 온 몬스터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였다. 성국 출신에게 마족만큼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말은 없었으니까.

    “알겠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에냐의 목소리가 작아지자 덩달아 클리오나의 목소리도 더더욱 작아졌다. 그래도 에냐의 판단이 맞았는지 클리오나는 더는 떨지 않았다.

    저들은 카테리나와 아카데미생들을 납치한 자들이었으니까.

    “일단 무시하자. 불필요한 싸움을 안 할 수 있으면 그게 좋지. 아카데미생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먼저야.”

    다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에냐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언제 마족과 마주칠지 모르기에 저런 잡졸들로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일반 마법사들에게 저 몬스터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칼리스토 자매의 일원인 에냐에게는 식후 몸풀기용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아직 메인 디쉬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패를 보일 수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적의 눈이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을지 몰랐다.

    “아, 너무 귀찮은데. 너희끼리 결계가 안전한지 보러 갈래? 다른 동기들은 말이야. 어? 다 수호자급이라고 마족만 아니었다면 확 진짜.”

    리치는 왜 자신이 직접 결계를 확인하러 가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그는 던전의 끝에서 공략자들을 기다리는 보스급 몬스터여야만 했다. 그건 몬스터 사회에서 두말할 필요 없는 상식이었다.

    ‘마족만 아니었다면 콱 무시했을 텐데.’

    고대 마법의 끝을 보았다던 리치라도 마족은 무서웠다. 연말에 리치들의 행사에 가면 늘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가 마족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의 비밀을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골골!”

    “골, 해골골.”

    리치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 같은 해골들에게 대신할 영광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치,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시키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희들도 생각이란 걸 할 줄을 아는구나. 몰랐네? 귀찮으니 대충 여기서 돌아가자. 설마, 아카데미생 주제어 결계를 부수겠어?”

    “골골.”

    “해골고르골골.”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자는 리치의 말에 챔피언 나이트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첫 번째 나이트는 그 말대로 하자는 듯 엄청난 속도로 이빨을 딱딱거렸다. 그러나 두 번째 나이트는 리치에 말에 손짓, 발짓하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나이트가 누구인가.

    기사도 정신에 따라 타의 모범이 되는 자들이 아닌가. 안 좋게 말하면 고리타분함의 정점을 찍은 자들인 것이다. 스켈레톤 나이트 역시 이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죽은 자들이었기에, 이러한 정신이 뼛속까지 스며들어있었다.

    이 해골은 서로 좋게좋게 가자는 리치와 다른 나이트의 말을 사양하며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결계를 향해 나아갔다.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 모습이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하아…. 저것도 귀찮게 인생을 사네.”

    리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렇게 살면 피곤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뼈다귀 하나하나가 마법사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리치는 기사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과 마법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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