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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82화 (82/265)
  • 고요한 밤, 사냥의 밤(8)

    * * *

    “리나의 상태는 어떤 식이었지. 다른 점을 생각나는 대로 말해 봐.”

    유피테르는 세이드가 당시 상황을 편안히 떠올릴 수 있도록 얼음 마법으로 앉을 곳을 만들어주었다. 몸이 회복되었고, 제정신이라고 판명 난 이상 맨바닥에 서 있게 할 수는 없었다.

    이건 심문이 아니었다.

    다들 앉아있는데 세이드만 서 있는 건 공평하지 않았다. 같은 이치에서 뒤늦게 들어온 다른 이들의 자리도 만들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유피테르 교수님.”

    세이드는 감사를 표하며 그의 마법에 탄성을 내질렀다. 얼음으로 만들었는데도 하나도 차갑지 않고, 오히려 은은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마법을 쓸 수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에 대한 복수라도 하는 건가?’

    유피테르는 세이드의 말 중 카테리나만 다른 취급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혹시라도 마왕 살해자인 자신에 대한 복수로 여동생을 잡아간 것일 수도 있었다. 카테리나가 그의 여동생이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곳에 숨어있는 마족들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또, 카테리나와 다른 실종된 아카데미 생을 비교해보면 마족이 노리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마족들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거짓 정보를 분간할 수 있어야만 했다. 평범한 마법사가 무식하게 힘만을 사용해서 그들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에게 벌을 받은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은 건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이상한 펜던트를 차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펜던트를 차고 있었구요.”

    “펜던트…. 티아나가 찼었다는 그건가. 하지만 널 봤을 때부터 그런 게 걸려있지 않았는데. 리오나 혹시 기억나나?”

    유피테르가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세이드의 목에 펜던트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클리오나에게 혹시 당시의 상황이 기억이 나는지 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아뇨. 저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클리오나의 기억도 유피테르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억의 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런 이름을 가진 책은 없었다. 아카데미 생 전체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애초에 사실이 아니었다.

    “그 펜던트를 끼고 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거두어갔어요. 그 이후에는 더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마치, 방금까지의 저처럼요.”

    유피테르와 클리오나의 기억이 맞았다는 걸 세이드가 증명해주었다. 그는 허전하다는 듯 목을 주물렀다.

    티아나의 목에 걸려있던 펜던트는 아무래도 마족의 마나가 들어있는 듯했다. 마족의 마나가 마법사의 몸에 흡수되어 반―반 마족을 만들어냈다.

    ‘생각보다 상황이 위험하다.’

    유피테르는 퍼즐이 하나둘 맞춰져 간다고 생각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이 뭘 노리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모든 걸 파괴하는 마법사는 그야말로 인간 병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마족조차 반마족을 수치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방법으로 시간을 끌려 한다고 보는 게 맞았다.

    “대체 그들의 목적이 뭘까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시트시거란 자를 소환하는 걸까요?”

    궁금증이 생긴 유알라냐가 유피테르에게 질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반-반 마족을 만드는 목적을 알 수가 없었다. 성국에서 배운 지식도 이번만큼은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

    아카데미 생의 마나를 이용해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를 소환하는 것.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델포이에 마족들이 잠입한 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공작급의 마족이 나타난다면 그들이 원하는 절망과 공포가 세상에 퍼져나갈 테니까. 유망주의 요람이 무덤으로 바뀌는 순간 인류의 희망은 사라져버릴 게 분명했다.

    “반―반 마족을 만드는 이유가 계약자를 늘려 효율을 늘리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이드가 눈을 돌리게 만드는 버림 패라고 하고 싶은 거야?”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피아쿠스가 나타났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됩니다. 허풍을 떨면서 자신이 모든 걸 했다고 해서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 것입니다.”

    트리아는 계약자를 늘린다면 소환의 효율이 올라간다는 정보를 십분 활용했다. 일 더하기 일이 하나라는 건 아직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걸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졌다,

    “제가 버림 패라니 조금 충격이네요. 마블링 대표로 나갈 정도로 꽤 강한 마법사라고 자신했는데 말이죠.”

    “어차피 마족 앞에서는 어떤 마법사라도 거기서 거기다. 조디악 급이라도 정말로 마족을 이길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대륙 최강 아카데미에서 손꼽히는 마법사라고 생각했던 세이드는 길게 탄식했다.

    그걸 들은 유피테르는 나름대로 위로를 해주었다. 그 말대로 조디악이라고 해서 무조건 마족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마족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고 알려진 카르멘 비제는 마족의 협력자로 밝혀졌으니까. 그가 마족을 죽이고 가져왔다던 증거 역시 마족과 협력해서 만든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컸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그는 감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신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예외였다.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운이 좀 나네요.”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어. 가서 네 여동생 사리아에게 안부나 전해주렴.”

    “그러고 보니 사리아와 마리안느는 친구였죠. 그걸 까먹고 있었네요.”

    비상 상황을 선포한 이후, 피티아는 실종된 아카데미 생들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델포이 아카데미를 믿었던 가족들은 그녀를 욕하며 난리를 쳤다.

    그렇게 탄탄하던 명성이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세이드 아폴론의 실종 이후 여동생이었던 사리아는 밤잠을 설쳤다. 그러다 마리안느의 도움으로 유피테르에게 통신을 보내 꼭 오라버니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유피테르는 돌아가는 즉시 가족에게 연락하라고 말한 것이었다. 이제야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알겠습니다.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교수님. 그리고 다른 분들도. 어 그러고 보니… 엘프 씨가 계시네요?”

    유피테르, 클리오나 그리고 오흐트를 제외하면 전부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이드는 고개를 돌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마주치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러던 도중 인간이 아닌 엘프를 보게 되어 깜짝 놀랐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엘프가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난 엘프 유알라냐라고 해. 너도 이곳을 알게 되었으니 종종 들려주렴. 아, 비밀로 해주는 거 알지?”

    유알라냐는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비장의 무기인 윙크를 꺼내며 세이드에게 부탁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엘프의 모습에 리오나가 살짝 비틀거렸다. 그녀가 생각하던 고귀한 엘프의 환상이 살짝 무너졌기에.

    위태위태한 리오나를 트리아가 뒤에서 지탱해주었다. 덕분에 리오나는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타이밍 좋게 잡아준 트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트리아. 라냐 님이 저런 식으로 행동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이렇게 실종 사건에 대한 두 번째 수사는 나름의 성과를 내고서 끝이 났다. 카테리나에 대한 단서와 시트시거 소환이라는 적의 목표를 알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이번에는 그래도 성과가 좀 있었네. 일단은 여기서 마무리하자. 다들 경계 철저히 해주길 바래.”

    섣부르게 마족을 자극하면 실종된 인질들이 전부 죽을 수도 있었기에 잠시 쉬어가는 것을 제안했고, 다른 일행들도 동의했다.

    이 정도의 성과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직, 마족과 실종자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으니까. 옴팔로스의 도움이라도 받는지 트리아의 힘으로도 확실히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에는 무언가 비밀이 더 있는 것만 같았다.

    * * *

    세이드가 난리를 피운 후 치료된 지 딱 하루가 지났다.

    유피테르의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족들은 델포이 아카데미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유피테르 일행이 세이드를 구출한 바로 그 시각 다른 아카데미 생의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심지어 한 번에 세 명이었다. 실종될 때도 한 명씩이었고, 죽임을 당한 것도 한 명씩이었는데 갑자기 급박해진 사건에 모두가 말을 잇지 못했다.

    최악의 상황에 피티아는 강의 중지를 내리고 아카데미 생들을 기숙사에서 나오지 말라고 공지했다.

    또, 지금껏 비밀로 숨겨왔던 마족이 범인으로 의심된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미리 알고 있었던 교수들과 달리 아카데미 생들의 공포는 높을 줄을 모르고 솟구쳤다. 달의 몰락 사건의 생존자들이 마족의 힘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현역 마법사들도 이기지 못했던 존재들을 고작 아카데미 생에 불과한 그들이 대적할 수 없었다.

    유망주는 아직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별이었다.

    “세이드가 있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시트시거를 소환하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신이시여 당신의 말씀이 언제나 옳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옴팔로스는 신이 찾고 계신 열쇠가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강의가 일시 중지되어 조용했던 오전.

    갑자기 유피테르의 기숙사로 찾아온 트리아는 뜬금없이 열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옴팔로스가 4개의 열쇠 중 두 번째 열쇠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지. 자세히 말해 봐.”

    “그분은 누구보다 조화를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건 신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옴팔로스가 하고 있는 건 그저 장난과 파괴뿐입니다. 그래선 마치….”

    “그래, 옴팔로스의 행동은 너무나도 마족 같지.”

    그 점은 유피테르도 깨닫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있는 아티팩트들은 대부분 잊혀진 시대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에고가 생길 수 있는 건 당연했다.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에고가 만들어질 확률은 높았으니까.

    그러나 ‘그녀’를 찾는 열쇠가 정반대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건 이상했다. 얼음성의 결계석 역시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이었지 분란을 만들지는 않았다. 에키드나가 그걸 빼앗기 위해 사건을 발생시킨 것일 뿐.

    “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수가 없지. 솔직히 증거가 확실하지는 않아. 델포이의 교수로 움직이는 이상 확실한 이유가 필요해. 카테리나까지 인질로 잡혀있어서 말이지.”

    유피테르의 말처럼 옴팔로스는 마나 공학자들의 꿈인 무한 동력이 실현된 아티팩트였다. 델포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에너지원이면서 굳건한 결계를 만들고 유지했다. 게다가 에고까지 있어 심판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심지어 에고 본인이 다양한 고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유피테르가 직접 확인하지 않았는가.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고대 마법의 위엄을 온몸으로 맛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신이시여.”

    “확인해봐야겠지. 그 놈이 아티팩트인지 아닌지. 마족을 쫓다 보면 그걸 알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어.”

    유피테르는 마족을 추적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는 모두 모였고, 부서진 조각들 역시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마스터. 나 왔어요. 트리아 언니도 와있었네?”

    “일단 여기 내 전용 기숙사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거지. 너희들?”

    마치, 자기 집 드나들듯 하는 칼리스토들을 보며 유피테르는 어이가 없었다. 미행을 달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지만, 이건 좀 심했다.

    “마스터 건 내 거, 내 건 내 거죠! 이거야말로 전대 마스터 때로부터 이어져 내오는 법칙.”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흐트?”

    “전혀요?”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미는 오흐트의 표정은 천사와도 같았다. 그 속은 장난기로 가득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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