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사냥의 밤(7)
* * *
“피아쿠스…?”
그 이름을 들은 트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인가 한 번 들어보았던 이름이었으니까. 바로 생각이 나지를 않아 어떻게든 기억을 해내려 머리를 쥐어짜 냈지만, 그게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를 하지.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 님을 모시고 있는 피아쿠스라고 하네.”
“그런 정보는 좀 오지랖 아닐까.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정보인데?”
“당신만 그런 겁니다. 뒤에 계신 분들의 표정을 한 번 보십시오.”
너털웃음을 짓는 피아쿠스의 말에 유피테르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일행들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트리아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있었고, 오흐트는 마족에 대한 반감으로 으르렁거렸다.
하이 엘프인 유알라냐는 공포의 바다에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때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아는 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너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인가 보네?”
마족이 무섭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냐고 충분히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유일한 인간인 유피테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직 마족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게 마족은 ‘그녀’의 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흠흠. 이렇게 나타난 건 다름이 아니라.”
피아쿠스는 유피테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발의 마법사의 태도가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보는 듯했기에.
피아쿠스는 애써 그를 무시하려고 노력하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뿐이었으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 말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 건 하이엘프였다. 유알라냐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마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린 시절 하이 엘프들에게 지겹게 들었던 전쟁 이야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이 바로 마족 피아쿠스에 대한 것이었다. 고대 마족이 지닌 힘은 전설적이었었다. 피아쿠스는 가증스러운 마족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다.
“자네들이 길을 잘못 잡고 있어서 너무나 답답했다네. 그래서 굳이 온 거라네.”
“길을 잘 못 잡아? 그게 무슨 소리지?”
유피테르는 피아쿠스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피아쿠스는 델포이에 숨어든 마족 중 한 명 일 게 분명했다. 티아나의 마나를 구속하던 자가 바로 그였다. 그렇다면 일련의 실종 사태와 무관할 리 없었다.
세 명이 마족들로 이루어졌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범인이 직접 힌트를 주려고 나타났다는 건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선택지였다. 다만, 범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였지만.
“자네들은 상황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네. 옛이야기에도 있지 않은가. 파랑새는 우리의 곁에 있어. 그 노래는 감미롭지만 원하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네.”
마치 노래를 부르듯,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마족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기립 박수를 받을 정도로. 물론, 그 노래에는 놀리려는 마음 따위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확연한 진심이 느껴졌다.
“마족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불안과 증오를 키우는 게 마족의 습성인데?”
성국만큼이나 마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던 오흐트가 소리쳤다. 마족은 절대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공포는 마족의 근원이자 본성이었고 삶의 목적이었으니까. 공포를 위해서 마족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불안과 증오 그리고 공포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감정이지. 그러나 나는 좀 다르다네.”
“분노의 파벌에 속해있어서? 분명, 공작 파벌에 있는 자들은 공작의 성향에 따르게 되는 게 맞아.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잖아?”
유피테르가 피아쿠스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마족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마족이 없었다면 ‘그녀’를 잃을 일도 없었을 게 분명했으니까.
“정답입니다. 그야말로 마왕 살해자다우십니다. 소문으로 듣던 그대로시군요.”
피아쿠스는 말하려는 내용을 정확하게 대신해준 유피테르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애초에 그는 유피테르를 상대할 때는 말투부터 정중해졌다. 우는 몬스터도 잡아간다는 마족들에게도 무서운 것 정도는 있었다.
“그럼 빨리 힌트나 주고 사라져. 이곳에 나타난 게 본체가 아니라는 걸 감사해하면서 말야.”
“파랑새로는 부족하셨나 보군요. 들은 것보다 욕심쟁이시네요?”
파랑새라는 큰 힌트를 얻었음에도 유피테르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기보다 마족의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타인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아르테미스의 성격을 어느 정도는 물려받았으니까.
‘그녀’의 영향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유피테르. 그 역시도 아르테미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오직 마리안느만이 이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도 단서를 드리죠. 일 더 하기 일은 일.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대의 힌트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럼? 교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아쉽게도 오늘 예정된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죠”
피아쿠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힌트를 던져주고서 사라져버렸다. 아니, 마족의 마나가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오흐트의 치유 마법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해버렸으니까.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족은 사라지는 방식도 똑같았다. 덕분에 유피테르의 심리전은 어이없이 끝이 나버렸다.
“일 더 하기 일은…. 숫자 2 아닌가요?”
마족이 사라지고 나서 처음으로 말을 꺼낸 건 유알라냐였다. 어린 시절 이야기로만 들었던 피아쿠스의 등장에 두려웠긴 했지만, 이곳에는 유피테르가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그 무엇도 적이 될 수 없었다.
“그건 당연한 상식이 아닐까 하는데. 마스터는 답을 알고 있어?”
일 더 하기 일의 해답이 하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대해 생각하자 짜증이 솟구쳤는지 오흐트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세이드의 상태를 계속해서 확인했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서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대충 예상가는 게 하나 정도는 있어.”
“정말? 정말이지? 역시 마스터라니까. 빨리 알려줘!”
역시 칼리스토의 마스터는 무언가 달랐다.
유알라냐를 비롯해 오흐트 그리고 트리아까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황.
짙은 안개 속에서도 유피테르는 벌써 실마리를 붙잡고 있었다. 작은 힌트를 가지고 사건의 윤곽을 유추하는 건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 더하기 일은 일.
마족. 아니 적의 숫자는 세 명. 피티아와 옴팔로스 그리고 트리아의 세부적인 의견이 갈리는 상황. 힌트는 꽤나 도움이 되었다.
‘마족은 여러 명의 계약자를 둘 수 있다 이건가.’
답답했던 오흐트는 정답을 알려달라고 칭얼거렸다. 칼리스토 들은 대부분 무력과 지력 양쪽에서 초월적인 존재였다. 다만, 오흐트는 머리를 쓰는 일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신에 가까운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직은 안 돼. 조금 더 확실해지면 그때 설명해줄게. 일단 세이드라는 친구를 깨워서 정보를 더 얻어보자.”
그러나 아직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한 발자국이 부족했다.
“으음…. 여, 여기는 어디죠?”
때마침 오흐트의 치료를 받고 있던 세이드가 정신을 차렸다. 마족의 마나가 전부 빠져나갔기 때문인지 아까와는 다르게 캬오 투성이의 말투가 아니었다. 제대로 대륙 공용어를 사용해 이해할 수 있었다.
“세이드 아폴론, 정신이 드나.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나?”
“은발의…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한 명뿐이죠. 유피테르 교수님. 여긴 어디죠?”
역시 유피테르의 특징은 은안과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본인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만요. 앞이 잘 보이지가 않고, 왠지 으슬으슬 춥네요.”
세이드 아폴론은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시야가 뿌옇게 가리는 느낌이었다.
깜빡, 깜빡.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뜨자 그제야 이곳이 난생처음 보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간신히 상황을 정리하고 왔습니다. 유피테르 교수님 세이드는 깨어났습니까?”
“클리오나 부회장?”
얼떨떨한 세이드에게 구원의 빛이 쏟아졌다. 클리오나가 비밀 공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는 얼굴이 하나 더 늘어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교수와 가까이서 이야기하는 건 그에게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어라. 이번에는 캬오 하면서 울지는 않습니까? 그 모습 꽤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클리오나는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딱딱한 말투와는 다르게 그녀는 귀여운 걸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부회장 특권으로 받은 일인용 기숙사는 사랑스러운 인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건…. 잊어주길 바래. 이렇게 부탁할 테니까.”
“그 이야기는 마족의 마나를 사용하는 상태에서도 이성은 있었다는 이야기로군? 내 말이 틀린가?”
“맞습니다. 제가 같은 델포이의 동료들에게 살상력 높은 마법을 사용한 것도 마족에게 육체를 빼앗겼던 것도 전부 기억합니다.”
세이드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마블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같은 아카데미의 친구들에게 마법을 쓴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설령, 그게 마족의 수작에 놀아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황제를 포함한 황가를 호위하는 마법사를 많이 배출한 아폴론 가문으로서의 자존심이 그걸 용서하지 못했다.
“그….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화가 났습니다. 화는 맹렬하게 불타올랐고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시트시거의 마법 중 하나인가. 그 파벌에 속한 마족도 사용할 수 있을 줄 몰랐는데.”
“죄송하지만, 그 시트시거란 게 뭔가요? 들어보니 누군가의 이름 같은데 저는 처음 들어봐서요.”
“분노 파벌의 수장이자, 일곱 명밖에 없는 칭호를 받은 마족 중 하나지. 아마 실종 사건과 가장 연관된 자의 이름이니 기억하는 게 좋아.”
유피테르의 자세한 설명에도 세이드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마족은 세상 멀게만 느껴졌었다. 마족이 인류 앞에 공공연히 나타난 것은 역사 전공에서나 배우는 이야기이니 당연했다. 마족을 눈으로 똑똑히 본 지금도 믿을 수 없었다.
“아… 맞아. 교수님의 동생도 그곳에 있었어요! 학생회장도 잡혀 왔던 걸 똑똑히 기억해요.”
드디어 카테리나의 정보가 세이드의 입에서 나왔다. 마족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그가 말한 것이기에 꽤나 신뢰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기억마저 조작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
마족을 학살한 경험이 있던 유피테르만이 아주 작은 의심의 씨앗을 품었다. 트리아 역시 그녀의 마스터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 후, 세이드의 기억과 일행이 모았던 정보를 비교해보니 대부분 일치했다. 유피테르는 세이드의 말을 들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마스터의 여동생에 대한 정보도 나왔네. 축하해.”
환자의 상태가 괜찮아진 걸 확인한 오흐트가 유피테르에게 오도도 달려가서 안겨들었다. 그녀는 유피테르가 얼마나 참고 또 참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가지고 있는 힘을 전부 내보일 수 없었으니까. 그게 전대 마스터와의 약속이었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왕 티폰을 압도한 자가 현 마스터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였다.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당하기만 하는 일은 애초에 있을 수 없었다.
“카, 카리나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그래요. 설마 카리나도 당신처럼 반마족화가 되어버렸나요? 제발 그러지 않기를 정령들께 기도했는데.”
카테리나의 정보를 기다려왔던 건 유피테르뿐만이 아니었다. 클리오나와 유알라냐 역시 소중한 사람이 제발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회장은 창조신 레아에게 엘프는 정령들에게 카테리나의 안전을 기도했다.
“그런데 말이죠.….”
“뭐지? 끌지 말고 말해 봐.”
모두가 카테리나의 소식에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 세이드가 입을 열었다.
“카테리나 회장의 경우는 뭔가 좀 달랐어요. 혹시 반마족이라는 게 아까 전까지의 제 모습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래. 정확히는 반―반 마족이지만 말이야. 아무도 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네. 슬퍼.”
오흐트는 지금 델포이의 학생들이 겪고 있는 병이 반마족과는 다르다고 몇 번이나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바뀔 생각을 하지 않자 조금은 기운이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