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사냥의 밤(6)
* * *
“잘 얼었네.”
유피테르는 인간 아이스크림이 되어버린 세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유심히 상태를 확인했다. 그의 마법은 오차 없이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붉은 마법사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라냐 님에게 돌아가는 겁니까? 유피테르 교수님.”
클리오나가 그런 유피테르를 하엄엾이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몇 번이나 보아도 얼음 마법은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내었다. 얼음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오롯이 그만이 절대자였다. 그 모습이 눈에 각인되어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카테리나가 보여주었던 매혹적인 모습을 유피테르 역시 보여주었다.
클리오나는 학생회장의 그런 모습에 반해서 친구가 되자고 말을 걸었었다. 이는 카테리나는 모르는 소중한 비밀이었다. 만약 들킨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 어떻냐고 할 사람이었다.
‘카리나. 너무 보고싶다.’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학생회장이 그리워져 참을 수 없었다.
“유알라냐에게 돌아간 다음 이 친구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야겠지. 술래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이니까. 실마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걸 알잖아?”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제가 남아서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도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결계 때문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 않는 건 알고 있지? 나머지 아카데미 생의 기억이야 지워버리면 충분해.”
“예. 하지만 피티아 학장님마저 의심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행동을 늘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유피테르는 클리오나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그녀의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일련의 실종 사건 때문에 델포이의 치안 시스템은 최고 수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정보는 학장에게 직접 보고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자신이 유일한 정보원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 하나 없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압도적인 힘 때문에 가끔 상식적인 대응을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가 멍청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지간한 일은 마법으로 다 해결할 수 있었기에 생긴 불협화음이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네. 그럼 뒤는 잘 부탁해 리오나. 적당히 마치고서 엘프의 숲으로 돌아오렴.”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클리오나는 은발의 교수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일반적으로 교수와 아카데미 생의 관계는 이렇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부회장으로서 많은 교수를 만났었다. 그래서 지금의 유피테르가 얼마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교수라기보다는 제자에게 길을 알려주는 선배나 멘토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저 길을 걸어간 선구자라고나 할까.
유피테르는 결계에서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었다. 클리오나는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며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변명을 할지 큰 틀을 잡고 있었다.
“이만 돌아갈까.”
그는 얼음 동상 상태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세이드를 데리고서 유알라냐가 기다리는 비밀 공간으로 공간 이동했다.
유피테르와 세이드가 사라진 결계 속에서는 나비들만이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오셨어요? 그 아카데미 생이 문제의 마법사인 건가요?”
빛 속에서 유피테르가 나타나자 유알라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잘 풀린 것 같았으니까. 그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아카데미 생을 데리고 왔다. 조금 취급이 조금 너무한 것 같긴 했지만 말이다.
“세이드 아폴론. 뭐, 리투아 제국 출신이겠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름까지 파악하신 거예요? 역시 대단하시네요. 이름을 안다면 조사하기 한결 수월해지겠어요!”
유알라냐는 유피테르의 끝이 보이지 않는 능력을 칭찬했다. 아카데미 생을 잡으러 간다고 한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완벽하게 데려왔으니까.
심지어, 이름과 출신까지 알아 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냐. 이름과 다른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건 리오나였어. 너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나중에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지 그래?”
유피테르는 남의 공을 뺏어오지 않았다.
그는 리오나의 기억력과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엘프에게 전해주었다.
또, 리오나가 이 하이 엘프를 라냐 님이라고 부르며 사근사근하게 대했다는 것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때문에 적절한 보상이라도 한번 해주라고 권유했다.
“알았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도록 할게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 정보를 얻으실 거죠?”
유알라냐 역시 리오나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사실, 카테리나가 이상한 걸지도 몰랐다. 그냥 친한 언니처럼 자신을 대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엘프, 그것도 하이 엘프인데도 말이다.
나이 차를 넘어서 종족도 다른 데도 카테리나의 태도는 너무나도 살가웠다. 그게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놀라웠다. 그래서 이 남매를 상식대로 판단하면 절대로 안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흐트를 불러서 일단 치료부터 하지.”
“야호. 마스터 나 불렀어? 지금 여기 등장했다구!”
제대로 통신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오흐트가 비밀 공간에 나타났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오흐트의 오른손은 트리아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트리아의 표정으로 볼 때, 강제로 끌려온 게 분명했다.
“아직 부르지 않았어. 뭐 좋아. 이 아카데미 생 치료할 수 있어? 요령은 티아나 때와 비슷할 것 같아 보이는데.”
“잠시만 좀 볼게.”
장난스럽던 오흐트도 환자를 앞에 두고서는 진지해졌다.
얼음 동상이 된 세이드를 보고 그 누구도 환자라고 생각할 리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치유사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 원래 상태가 아닌 자들은 모두 환자였다.
오흐트는 마스터인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역시 언젠가는 치료해야 할 환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은발의 마스터는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몸 상태라는 걸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그녀의 치유 마법에 빈틈은 없었다.
“일단 이 얼음을 치워줄래. 마스터? 제대로 진찰을 할 수가 없어.”
유피테르는 말없이 세이드를 구속하던 얼음을 녹였다. 그 많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데도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갇혀 있던 세이드 역시 추위를 느끼지 않는 듯 보였다.
“캬오?”
이게 아르테미스의 비기라고 할 수 있는 시간 동결이었다.
“이 상태를 반마족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 같은데 마스터.”
“이건 아무리 보아도 반마족이라고 보이는데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한 세이드를 오흐트는 꼼꼼하게 검사했다. 모든 것을 확인한 후 그녀는 이게 반마족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뒤에 있던 트리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아무리 보아도 반마족의 증상과 똑같았으니까.
“반마족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두가 알 것 같으니 그만두고. 차이점만 이야기해줄게.”
그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반마족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마족과 이번 사건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오흐트는 필요 없는 설명을 시원하게 건너뛰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세이드의 피부를 잡아당겼다.
“티아나를 치료할 때도 살짝 고민하긴 했는데. 지금 델포이의 아카데미 생들은 완전한 반마족 상태가 아니야.”
“뭐?”
유피테르는 바로 반응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파론도 티아나도 그리고 세이드도 모두 반마족화의 증상과 같았으니까. 다른 질병이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반마족이 하프―마족 이라는 의미라면 반―반마족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은데?”
오흐트는 그런 유피테르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쿼터 마족 정도 된다는 말인가요?”
신기한 표현에 흥미를 보이며 유알라냐가 물었다.
하프와 쿼터 등의 개념은 보통 혼혈에만 사용되었다. 반마족은 혼혈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모호한 존재였다. 마족의 마나가 섞인 존재는 모두 반마족으로 추락했으니까. 심지어, 반마족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부모라고 할 수 있는 마족 역시 반마족을 버리는 패 정도로 생각했으니.
“으응. 뭐 그 정도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아. 진짜 반마족이라면 이렇게 쉽게 치료될 리도 없고 이성이 남아있을 수 없으니까.”
“확실한가요?”
“얘가 행동하는 거 보면 이성이 완전히 날아간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어.””
쿼터 마족이라는 표현은 신선했다. 그 말은 곧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과 같았다. 푼수 엘프의 말에 오흐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치료 방법은 티아나와 동일한가?”
유피테르에게 명칭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병을 고칠 가능성에만 집중했다. 지금까지의 흐름대로라면 여동생에게도 이 현상이 일어났을 확률이 농후했으니까. 만약, 오흐트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면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건, 인간 세계에 쉽사리 개입하지 않는 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일단 해볼게.”
오흐트가 티아나를 치료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마법을 쓰려고 했다. 이 치유법이 달갑지 않았는지 세이드가 포악하게 소리를 질렀다.
“캬오! 캬오오오오!
주제를 모르게 날뛰는 세이드.
퍽ㅡ.
오흐트는 제 정신이 아닌 환자를 보며 리드미컬 하면서도 묵직한 주먹 한 방을 날렸다.
“환자면. 환자답게. 가만히. 있으셔야지!”
얼마나 강력한 펀치였는지 흉악한 모습을 보여주던 세이드는 눈을 뜬 채로 기절해버렸다.
“오흐트의 치유 펀치는 생각보다 아프지. 그 맘 나도 이해해.”
유알라냐는 작은 체구의 오흐트가 발휘한 괴력에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유피테르가 정신을 잃은 세이드를 보며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에게서 칼리스토 마스터 자리를 이어받을 때 똑같이 당했었으니까.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흐트 식 치료 마법 ― 원상복귀
오흐트는 치료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서는 반마족 치료에 효과가 있었던 마법을 펼쳤다. 치유의 힘이 가득 담긴 마나가 세이드에게 깃들었다.
그러자 마족의 마나가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와 똑같이 마족의 마나는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 마족은 중절모를 쓴 늙은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번보다는 확실한 형상을 만든 그는 유피테르 일행에게 친한 듯 말을 걸었다.
“호오. 이번에도 다시 뵙는군. 여러분. 그 얼굴들을 잘 지내지는 못했나 보군?”
“그때의 그 마족인가. 다른 마족이 아니라 네가 이 모든 걸 일으킨 거야?”
“당신의 질문에는 대답해드리고 싶지만, 그 부분은 비밀로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왕을 살해한 전적이 있는 유피테르의 앞에서도 마족은 여유가 넘쳤다. 본체가 이곳에 등장한 게 아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저 형체를 몇천 번 죽인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었다.
“당신의그 얼굴…. 본 적이 있어요.”
이 이야기를 한 건 놀랍게도 마족과 가장 연관이 없다고 느껴졌던 유알라냐였다. 평화와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엘프가 마족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족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두 종족 사이에는 큰 접점이 없었으니까. 사는 곳부터 생활 양식까지 단 하나도 공통점이 없었다.
“호오? 하이 엘프 양.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가? 이거 유쾌하군.”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이 마족은 호탕하게 웃었다. 늙은 얼굴과 조화되지 않는 그 기묘함이 마족이라는 걸 더욱 느끼게 해주었다. 마족은 유알라냐를 바라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했다.
“피아쿠스. 분노의 공작 밑에서 일하는 늙은 집사.”
“이거, 정말로 놀랍군. 이 몸을 아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니, 사람이 아니라 엘프였군. 실례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