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77화 (77/265)

고요한 밤, 사냥의 밤(3)

* * *

유알라냐는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유피테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트리아의 말은 그 정도로 높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옴팔로스를 만나고 온 후, 다시는 그런 일을 벌이지 말라고 트리아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고.

저 은발의 교수는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박살을 내서 주동자를 잡은 후, 갑자기 개심해서 자수했다고 말하게 하는 게 더욱 어울리는 그런 존재였다.

“걱정하지 마. 오빠가 여동생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옴팔로스에는 개인적인 볼 일도 있으니 일석이조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꼭 좋은 정보를 얻어오시길 바랄게요.”

엘프의 비밀공간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유알라냐를 두고서 유피테르는 옴팔로스가 있던 곳으로 공간 이동했다. 사실, 공간 이동을 하는데 시동어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건 명확한 이미지였으니까.

유알라냐의 비밀 공간에서는 눈치를 보면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그녀 역시 반쯤은 관계자였고, 입도 무거운 편이었으니까. 목적지인 파르니소스 산 정상 역시 아무도 없는 곳이어서 공간 이동하기에 적절했다.

“산 정상의 경치는 나쁘지 않네. 그래서 옴팔로스 군.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맞혀야만 하는 걸까?”

델포이를 둘러싼 파르니소스 산 정상에서 유피테르는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기척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소년은 전에 보았던 아티팩트 옴팔로스였다. 소년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하핫. 오랜만이네! 유피테르 특별 교수.”

“정말 인간 같군? 아니, 옴팔로스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마족이야 너?”

유피테르는 고개를 돌려서 소년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리에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속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던 저번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마족이라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네? 교수. 대답을 해주자면 그건 정답이 아니야. 이곳에 온 목적이 뭐야? 교수는 찌릿찌릿해서 무섭다고.”

“다시 보게 될 거라고 한 건 네 녀석 아니었나?”

“음…. 그랬었나? 잘 기억이 안 나네. 이곳에서 참 오래 있다 보니 깜빡깜빡한다고. 이해해줘”

정말로 모른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소년의 모습은 정말 인간 같았다. 아티팩트의 에고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아티팩트의 에고가 저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 가지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그녀’를 되찾기 위한 두 번째 열쇠일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

“카테리나는 어디 있나? 네가 마지막으로 봤다고 학장이 말하던데.”

그럼에도 그는 카테리나를 우선시했다. 카테리나를 찾고 나서 소년을 추궁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목숨까지는 위험하지 않았지만, 여동생은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유피테르는 속으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옴팔로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카테리나, 아… 학생회장? 봤지. 본 것 맞는데.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왜 나한테 물어? 내가 범인인 것처럼 이야기하네?”

“지금 네 모습을 한 번 보기나 하지? 그 상태로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정말 실망인데.”

“아, 이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다니길래 말야.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모습부터 바꾸라고 하더라고?”

흑요석을 연상케 하는 검은 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 그건… 마족이라고 불리는 종족의 특징이었다. 각각의 특징을 가진 자들은 많았지만, 두 개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건 마족밖에 없었다.

“네 주인은 피티아 학장이 아닌가? 대대로 델포이의 학장이 옴팔로스를 관리했다고 알고 있는데.”

유피테르는 옴팔로스의 말을 듣고 이상함을 느꼈다. 델포이를 전반적으로 지탱하는 옴팔로스는 델포이라는 교육 도시가 완성되기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다양한 책에 쓰여 있었다. 험한 산이 있는 이곳에 아카데미가 조성된 이유가 바로 저 옴팔로스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의 특징상 엄청난 건물들과 에너지 그리고 안전을 위한 결계가 필요했다. 옴팔로스의 존재는 이 모든 걸 한 번에 만족시키는 신의 한 수였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를 놓칠 수 없어 초대 델포이 학장이 직접 옴팔로스와 계약을 맺고 아카데미를 완성했다.

“주인…? 그런 표현을 사용하면 좀 슬픈데. 난 완전 독립형 개체라고? 유피테르 교수. 나도 꿈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단 말야.”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이 툴툴거렸다. 화가 난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태도였다. 유피테르는 몰랐지만, 소년에게 있어 주인이라는 단어는 그리 듣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완전 독립형 개체? 아티팩트에 그런 기준도 있었나 처음 듣는군.”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모를 만하지. 너희가 어떤 기록을 갖고 있던 난 자유의 몸이야. 주인 따위는 없어.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주인이라는 말을 싫어하는 거군? 그럼 너의 추리를 들어볼까. 카테리나와 실종된 아카데미 생들은 어디 있을 것 같지?”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걸? 유피테르 교수. 거봐 할 수 있잖아.”

유피테르가 말을 바꿔서 질문하자 소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바로 일종의 가설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내 결계를 통과한 마족은 두 명이야. 그중 한 명은 너도 알다시피 저주를 거는 마족이지. 그 다른 쪽이 이번 일을 주도한 것 같은걸.”

“세 명이 아니라 두 명이라고?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피테르는 목소리를 높이며 반문했다. 트리아의 보고서는 마족의 반응을 가진 게 세 채라고 말했다. 학장의 경우에는 마족 세 명이 델포이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결계를 관리하는 자는 두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아. 피티아가 또 세 명이라고 말했어? 요즘 들어서 피티아랑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고생이라고.”

이 불일치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피테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애초에 트리아의 정보력이 틀린다는 가설은 말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 딱 한 가지였다.

“마족 두 명과 계약자 한 명인가? 계약자가 마족으로 의심받을 정도면 보통 상황은 아니군.”

“역시 특별 교수야. 대충 말해도 알아서 해석하잖아? 대화하기가 쉬워서 좋아 좋아.”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자 소년은 그야말로 순수한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 모습에는 단 한 방울의 거짓도 녹아있지 않았다.

“계약자가 있는 마족이 아카데미 생을 납치했다면…. 소환 의식이라도 하려는 건가.”

“브라보. 계속해봐 교수. 당신의 한계는 여기가 아니잖아?”

소환 의식. 그건 원하는 장소로 마족을 부르는 마법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족이라고 해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은 아니었고 세아니아 대륙 북쪽 끝에 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경계선에 신이 만든 마법 장벽이 있어 원하는 대로 넘어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파벌에 속해있는 연약한 마족을 침투시키고 계약자를 만들어 고위 마족을 소환하는 진을 만드는 게 일반적인 마족의 방식이었다.

“소환 의식에 필요한 건 마나뿐이지. 그것도 엄청난 양의 마나가 있어야 원하는 마족을 부를 테니.”

“맞아. 유피테르 교수 당신은 마음에 들으니 힌트 하나를 줄게. 교만을 멀리하고 분노를 조심해. 그럼 잘 찾아봐. 응원하도록 할게.”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피테르는 소년이 고대 마법을 사용해서 사라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저번에도 다양한 고대 마법을 숨 쉬듯 사용했었으니까.

혼자 어차피 이곳에 더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유피테르는 다시 유알라냐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무언가 괜찮은 정보라도 얻으셨나요?”

카테리나 실종 사건에 관한 정보를 가져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던 유알라냐는 첫 등장부터 좋지 않은 표정의 유피테르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골치 아파졌어. 분노의 공작 시트시거가 연관된 것 같으니까.”

“공작이라면? 일곱 명의 마족 공작을 말씀하시는 거네요. 전설로만 들어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마족이 사는 땅 타르타로스를 지배하는 건 절대 권력을 지닌 마왕이었다. 그리고 그 마왕을 보좌하는 게 일곱 명의 공작이었다. 7명의 공작은 창조신 레아가 금지한 7가지의 죄를 칭호로 가지고 있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마왕 티폰 리벨리온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시트시거는 단순한 성격이라 이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신기하긴 하네. 뭐 다른 마족이 방법을 알려줄 가능성도 있으니 속단하면 안 되겠지.”

“그래요? 아카데미 생 실종 사건과 마족은 무슨 관계에 있는 거예요?”

“타르타로스에서 잘 살아 있는 공작을 이곳에 소환이라도 하려는 것 같은데.”

“네…?”

유피테르가 던진 말의 파장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마무시했다. 하이 엘프인 유알라냐가 생각하기에 마족도 무서운 존재였는데 공작급이 나타난다는 말은 절망의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잊혀진 시대에 마족은 신의 사자들을 무참히 도륙할 정도로 강했으니까. 지금의 마족은 그때와 같은 위용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나 엘프가 그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단독으로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마족은 그야말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그그그그거, 큰일이잖아요. 어어어어어 어떡하죠?”

“그렇게 떨지 마. 소환 의식이 제대로 성공해야 불러올 수 있어. 지금까지 데려간 아카데미 생들의 마력으로는 턱도 없어. 뭔가 큰 게 벌어지겠지. 그걸 막으면 우리의 승리고.”

“역시,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저 무섭게만 보였던 유피테르가 엘프가 모시는 정령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정령왕께는 정말로 죄송한 말이지만, 유피테르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나무와도 같았다. 처음에는 인간 같지 않은 모습에 공포감을 느껴 괜히 도발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라는 사람은 같은 편일 때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일 수가 없었다.

“계획 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누가 마족의 계약자인지 이제 확인해봐야지. 재미있는 술래잡기의 시작이야.”

“술래잡기…인가요?”

델포이의 관계자 속에 숨어 있는 마족의 계약자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수수께끼는 풀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술래가 여러 명인데도 불구하고 도망가는 한 명을 쉽게 잡지 못한다는 점이 특별했다.

“그래. 혹시 마족의 계약자에 관련된 소문을 듣거나, 어두운 느낌의 마나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통신 마법으로 알려줘.”

“알겠어요. 정령들에게도 도움을 받아볼게요.”

카테리나의 실종에 무언가 도울 게 없을까 고민하던 유알라냐는 즉답했다. 좁고 깊은 사회성을 지닌 엘프들에게 소중한 사람의 실종은 그만큼 슬픈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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