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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72화 (72/265)
  • 인간과 마족 사이(9)

    * * *

    작년 마블링에서 델포이는 간발의 차이로 종합 우승을 놓쳤다. 그럼에도 이곳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교육의 장이었다. 당연히 아카데미 생의 기본적인 생명도 책임져주지 못하는 일은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더는 최고의 아카데미라고 칭할 수 없을 테니까.

    “달의 몰락이라는 사건을 학장님께서도 들어보셨겠지요. 범인은 마족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제게도 믿음직한 연줄이 있으니까요.”

    유피테르는 거짓을 섞지 않고 진실 그대로를 피티아에게 전했다. 진실 속에 애매한 거짓을 섞는 건 그녀에게 통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가 느낀 학장이란 오히려 아픈 진실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넌 그 사건의 당사자였지. 마족을 눈으로 직접 봐서 알 수 있었던 건가. 그럴듯한 이야기네.”

    예상대로 피티아는 마족이라는 말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꺼풀이 살짝 파르르 떨렸을 뿐이었다. 그리고서 유피테르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크레이타를 제외한다면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 마족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마족이라면 인간이 상식이라고 그어놓은 선을 서슴지 않고 넘을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때 느꼈던 마나와 흡사합니다. 달의 몰락 때 얻었던 단서와 필요한 마법을 사용하는 치유사가 있다면 티아나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런가….”

    유피테르의 말에 피티아는 책상을 톡톡 리듬감 있게 치며 머리를 굴렸다. 다른 시기였다면 고민하지 않고 승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였다. 아카데미 대항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문제였다.

    마블링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뛰어난 교수와 유망주를 데려왔다고 다른 아카데미의 의심을 살 수 있었으니까. 이미 유피테르를 특별 교수로 초빙한 것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이 상태에서 특별 유학생을 데려온다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고민은 짧았다. 티아나 역시 소중한 아카데미의 유망주였다. 게다가 다른 아카데미의 학장들이 뭐라고 한다면 그만큼의 리스크를 지고서 싸우면 될 것이었다. 델포이는 그 정도로 무너질 만큼 허술하게 운영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 은발의 특별 교수가 참가한다면 올해 마블링은 사상 최고급으로 흥미진진해질 게 분명했다. 그를 회유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져줘야 했다.

    “좋아. 특별 유학생으로 그 치유사를 데려오는 걸 허락하지. 아카데미 생으로 들어오는 데 지장은 없나?”

    “조교로도 아카데미 생으로도 델포이에서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오흐트의 외모는 칼리스토 중에서 가장 동안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딱 아카데미 생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실제 나이를 묻는다면 그녀의 원샷 원힐 치유 펀치를 맞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후. 유피테르는 학장의 지시에 따라 특별 유학생으로 오는 데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다. 특별이라는 이름에 맞게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씩 묵묵하게 채워 나갔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그가 돌아가려고 하자, 피티아가 그를 멈춰 세우고서 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옴팔로스에 침입한 게 자네인가? 어제 잠깐 결계가 술렁거리던데.”

    혹시나 하고 의심했던 건 역시나라는 말로 돌아왔다.

    유피테르와 유알라냐 일행이 옴팔로스를 찾아갔을 때, 결계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적대적인 건 분명해 보였지만,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고대의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가 고작 위협만 한 건 이상했다.

    아티팩트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 않아도 접근한 자를 분쇄해버리는 게 그들의 사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엄중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 제단에 침입하려고 하는 수상한 자들이었는데도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옴팔로스는 대대로 델포이의 학장이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옴팔로스의 태도는 피티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확실했다.

    “옴팔로스라면 그 모의전 때 말씀하셨던 델포이의 기둥 아닌가요. 티아나의 병을 치료하고 리포트 채점하느라 바빠서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만.”

    거짓말을 간파하는 아티팩트가 있을까 염려해서 유피테르는 사실만을 말했다. 학장은 절대로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신관들이 만들어서 팔고 있는 아티팩트 정도는 구비했을 수도 있었다.

    옴팔로스가 델포이의 기둥이라는 생각과 그가 요 며칠간 정말로 바빴다는 말에는 거짓 하나 없었다. 마족이 연관된 건 성녀의 부탁도 있었기에 잠을 자지도 않고 집중했다.

    “알았네. 이만 돌아가 보게.”

    이 방법이 통했는지 그녀는 유피테르를 무죄 방면해주었다. 의심을 풀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증거가 없었다. 유피테르가 오기 전까지 아무 문제 없던 옴팔로스에 갑자기 소란이 생겼으니 정황 증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를 몰아세울 준비가 부족했다. 어중간하게 공격한다면 델포이는 특별 교수라는 자산을 잃을 것이었다. 유피테르가 가진 카리스마와 마나에 대한 이해는 아카데미 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유피테르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안도했다. 그리고서는 피티아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며 학장실 밖으로 나왔다.

    “마족의 잔향이나 그런 게 느껴지지는 않네. 트리아를 불렀어야 했나.”

    학장의 귀에는 들리지 않게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학장이 그를 의심하는 것처럼, 그 역시 피티아를 마족의 협력자 중 하나로 의심하고 있었다.

    피티아의 도움이 없다면 마족들이 고대 마법으로 만들어진 결계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침입할 수는 없었으니까.

    달의 몰락 사건에서 결계의 소유주 카르멘이 배신했기에 에키드나가 제집 드나들듯이 얼음성에서 여러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초대 가주가 남긴 결계석을 돌려받긴 했지만, 원래 그건 에키드나의 손에 있어야 정상이었다.

    또, 하이 엘프 출신 트리아가 마족의 마나를 잘 못 느낄 리는 없었다. 그러나 피티아는 마족의 계약자라고 보기 어려웠다. 계약자 특유의 변질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애매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마족에 대한 트리아의 조사를 기다리자고 결정을 내렸다. ‘그녀’를 구할 아티팩트의 문제 역시 옴팔로스가 직접 곧 보게 될 거라고 했으니 초조할 필요는 없었다. 이 두 개의 문제는 왠지 복잡하게 얽혀있을 기분이 들었다.

    이제 오흐트와 함께 티아나의 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면 되었다.

    다음 날, 오흐트는 특별 유학생으로 델포이에 소개되었다. 유피테르가 강의하는 마나의 이해 강의에 참여한 그녀는 뛰어난 마나 제어 능력으로 학생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 예상지도 못 하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온 것이다.

    강의가 끝난 오후 유피테르는 연구실에서 오흐트와 함께 티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마족화는 언제 어떤 상황이 될지 모르는 위험한 것이기에 한시가 급했으니까.

    “유피테르 교수님. 제 마나 감소증을 치료할 방법을 찾으신 게 정말인가요?”

    유피테르의 메시지를 받고서 헐레벌떡 뛰어온 티아나는 연구실에 노크도 없이 들이닥쳤다. 평소라면 예의 없는 태도를 보일 리 없었지만, 이 믿을 수 없는 희소식에 그녀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단다. 이 친구가 네 병을 치료하는 걸 도와줄 거야.”

    “아까 강의에서 한 번 봤지? 치유 마법을 사용하는 오흐트라고 해. 잘 부탁해.”

    오흐트를 본 티아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별 유학생이 흔치 않은 치유 마법을 사용하고 엄청난 제어력을 가지고 있는 건 눈으로 봐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작 아카데미 생이지 않은가.

    “이 아이는 네 병을 치료하기 위해 특별히 데려온 마법사야. 지금은 의심하지 말고 믿어주렴. 오흐트가 있다면 충분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

    유피테르는 티아나를 안심시키고자 오흐트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녀를 돕기 위해 특별 유학제도를 이용해 오흐트를 데려온 것이라고.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유피테르가 신과 같은 힘을 지녔어도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마나 감소증의 네 병은 저주와 비슷해. 일반적인 저주 마법과 다른 점은 매개체를 알 수 없다는 점 정도일까? 일단, 저주는 해제할 수 있을 듯싶으니. 그것부터 해보자.”

    오흐트 역시 티아나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진지하게 치료 과정을 설명했다. 먹보로만 보이는 그녀 역시 어엿한 치유사였다. 오흐트의 말은 조금 돌려서 말하고 다는 걸 제외하고 전부 사실이었다.

    한 존재가 반마족이 되어 타락하는 건 마족에 의한 저주라고 할 수 있었다. 마족의 마나가 육체를 점령하는 것이었으니. 만약, 저주를 해제하는 데 성공한다면 회복기를 거쳐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나 마스터와 함께라면 오흐트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으니 교수님을 믿어보도록 할게요.”

    티아나에게 남아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신관들은 아직까지도 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저 유피테르의 혜안이 틀리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문제를 상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해서 의심이 가기는 했다. 비슷한 말을 했던 다른 교수에게 속았던 전력도 있어 사실은 무서웠다. 그 교수 때문에 완전히 마나를 잃었으니까.

    학장 역시 유피테르 교수에 대해 신뢰해도 좋다고 말하기도 했고, 강의 때 보여준 마나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마법사를 부른 노력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얼음 나비의 꿈

    티아나를 연구실 한쪽의 쇼파로 안내한 그는 결계 마법을 펼쳤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얼음 나비의 결계였다. 반마족화를 해제할 때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결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잠시 후면 자신을 괴롭히던 병과 작별인사를 할 테니까.

    “바로 시작해도 될까. 오흐트?”

    “네.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 마….”

    유피테르를 마스터라고 부르려고 했던 오흐트는 간신히 멈추었다. 지금의 자신은 유피테르의 요청에 따라 이곳에 온 특별 유학생에 불과했다. 마스터라고 부른다면 간신히 없앤 의심의 씨앗이 자라날 게 분명했다.

    “치료를 시작해주세요. 교수님.”

    다행히 티아나는 그 점에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정말로 치료될까 하는 마음으로 다른 무엇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나비를 바라보고 있자 마음이 편안해져서 치료를 시작해달라고 부탁했다.

    오흐트 식 치료 마법 ― 원상복귀

    티아나의 말을 들은 유피테르가 눈짓하자 오흐트가 시동어를 외쳤다.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 중에서도 난이도 높은 마법이었다. 단순히 저주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를 원래대로 돌리는 기적이었다.

    오흐트의 마법이 티아나에게 닿자. 마족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어둠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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