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마족 사이(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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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나 리스테인이 울먹이며 상담한 내용은 유피테르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마족화가 꽤 진행되었음에도 마족을 모르는 눈치였으니. 그의 눈에 티아나의 행동이 연기 같지는 않아 보였다.
만약 그게 연기라면 어디서 배웠는지 알아내어서 칼리스토와 얼음성의 마법사단 모두를 유학시키고 싶을 정도였다. 티아나의 표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말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더비의 파론의 경우 본인이 마족과 만났다는 게 분명했다. 본인이 자랑스럽게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할 정도였으니.
반마족이라는 애매한 존재는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족과 계약을 한다고 무조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계약자 모르게 그렇게 만들려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반마족이라니 그 불길한 존재가 아직도 남아있었습니까?”
트리아가 이쁜 얼굴을 찡그리며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트리아는 하이 엘프 출신답게 마족을 혐오했다. 정령들을 섬기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조화를 사랑하는 엘프에게 마족은 강렬하면서도 싫은 존재였다.
반마족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건 어떠한 존재가 마족으로 되려다가 실패한 모습이었으니까.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아카데미 생이고, 본인이 원하지도 않던 일이야. 구해줘야지.”
“알겠습니다.”
트리아는 아무 의문 없이 유피테르의 말에 따랐다. 칼리스토가 되어 그전에 있던 하이 엘프로 사는 삶은 이미 버렸기에. 게다가 그는 엘프만큼이나 조화와 균형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마스터. 혹시 나도 할 일이 있을까?”
케이크를 다 먹고 배가 부른 오흐트가 유피테르에게 물었다. 모든 칼리스토들이 임무를 받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그녀는 명령도 받지 못하고 한없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칼리스토가 사는 저택에서는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많이 심심한가 보군 오흐트.”
“마스터가 마스터가 된 이후 대기만 하고 있으니까. 저택에서 노는 것도 이제 지겹다구. 에나스 님도 트리아, 펜데 언니도 모두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게 부러워.”
오흐트는 유피테르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칼리스토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광은 단독 임무를 받는 것이었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게 여러 명이 투입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저 뒹굴뒹굴하며 저택을 돌아다니는 오흐트는 뭐라도 좋으니 임무를 받고 싶었다. 그녀가 칼리스토가 된 건 전대 마스터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현 마스터는 전대 마스터를 구출하려고 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전대 마스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럼 일단 내 호위로 있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네 마법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정말이죠? 나중 가서 뭐라고 해도 안 들을 거야?”
칼리스토 회복 지원 담당. 오흐트. 티아나의 현재 상태를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족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녀가 있다면 어중간한 암살은 다 막을 수도 있었다.
“맞습니다. 오흐트가 가진 치유 능력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트리아 역시 오흐트의 능력을 인정했다. 오흐트는 자매들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약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지원 및 회복 마법은 성녀와 비견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성녀보다 더 위라고 봐도 문제가 없었다.
자매들은 쉽게 쓰러지는 존재들이 아니었으나 최악의 경우 오흐트가 있어서 나중 일을 걱정하지 않고 싸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케이크를 좋아하는 소녀는 죽은 게 아니라면 충분히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티아나를 불러서 현 상태를 확인해보도록 하지. 네 마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럼요. 마스터. 무엇이든지 말만 해주세요. 시체만 아니라면 살아 숨 쉬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정말 오랜만에 받는 임무를 거절할 리 없었다.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하는 임무라면 더욱 기다려왔던 일이기도 했다.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오흐트였지만, 누군가를 살려내는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치유사였기에
“오흐트는 일단 학장에게 외부 조교를 데려올 수 있는지 물어보고 확답을 주도록 하지. 트리아는 마족의 동향을 계속 감시해. 사소한 일이라도 통신 마법을 허가한다.”
“알겠습니다.”
“야호, 고마워요. 마스터.”
두 명의 칼리스토에게 명령을 내린 유피테르는 바로 피티아에게 통신 마법을 걸어 외부 조교를 데려올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델포이의 전권을 쥐고 있는 건 학장 피티아였으니까 말이다. 이곳에서 생활을 시키려면 알맞은 직책이 필요했다.
“이제 와서 외부 조교? 그런 건 처음 계약을 할 때 미리미리 말해야지. 불가능해. 조교를 외부에서 뽑다니 전례도 없는 일이야. 보통 델포이 내부에서 뽑아서 키운다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시급한 일입니다. 아카데미 생 한 명의 목숨이 걸려있습니다.”
유피테르의 말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는지 학장은 고민하면서 대답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아카데미 생을 누구보다 위하는 그녀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피티아는 델포이와 아카데미 생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오명도 뒤집어쓸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원을 바란다면 구체적인 정보를 말해. 어떤 아카데미 생이지.”
“티아나 리스테인 양입니다. 저라면 그녀의 병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치유사의 존재가 자신감을 더욱 높여주었기에. 오흐트만 있다면 반마족이 되어가는 티아나를 마법사의 세계로 돌려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티아나 양인가…. 정말로 고칠 수 있는 건가? 델포이는 물론 크레이타의 신관들도 혀를 내둘렀던 병인데?”
“교수직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 달 안에 원래 상태로 돌려보도록 하죠.”
유피테르의 말에 피티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티아나를 고칠 수 있다면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독 마법은 희소하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티아나는 절망할 것이 분명했다.
델포이의 최고 결정권자로서 그녀의 책임은 막중했다. 그래도 피티아는 치료를 허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특별 유학생 같은 것으로 아이를 넣어주도록 하지. 고치지 못한다면 아르테미스 가문도 같이 책임질 준비를 해야 할 거야. 나중에 찾아와.”
“감사합니다. 학장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유피테르는 통신 마법을 종료했다. 그의 뒤에서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하고 있던 오흐트는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흘러간 것을 깨닫고 환호성을 질렀다.
“좋아요! 바로 준비하면 되나요?”
“오흐트 넌 특별 유학생의 신분을 가진 아카데미 생으로 이곳에 오게 될 거야. 사고를 치지 않을 거라고 믿어도 되는 거지?”
“당연하죠. 마스터. 바로 준비하고 다시 올게요. 꼭 기다려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오흐트는 대기하고 있던 트리아와 함께 빛 속으로 사라졌다. 공간 이동 마법은 일반 마법사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유피테르는 그들을 두고서 다시 리포트 채점에 집중했다. 아직 그는 조교도 없는 초짜 교수여서 모든 걸 혼자서 해야 했기에. 그는 혼자였고 강의를 듣는 아카데미 생은 60명에 육박했다.
다른 거로 한눈을 팔 시간은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자세히 리포트를 검사한 유피테르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체크하며 중간중간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지만, 그걸로 배를 채우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정리하고서 연구실과 톨로스의 밖으로 나왔다.
학기 초와 다르게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제 때문에 위 델포이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아카데미 생들이 많았다. 유피테르 역시 배고프기는 했지만 오흐트에 관련된 서류를 받으러 학장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위 델포이의 음식점에서 식사하려고 마음을 먹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알아보고 여러 아카데미 생들이 인사를 해왔다. 유피테르는 델포이에서 꽤 유명한 교수가 되었기에.
“유피테르 교수님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 보내세요.”
“교수님 나중에 찾아가 보아도 될까요? 강의해주신 부분 중 이해가 안 되는 곳이 있어요.”
“그럼요. 제 연구실은 언제나 여러분을 환영해요. 그럼 이만.”
다른 교수라면 몰라도 유피테르에게 말을 거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교수의 눈에 띄어 이름이 기억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지만, 그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아카데미 생들이 긴장된 상태로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그들의 관점에서 내용을 천천히 설명해주었으니까. 모르면 알 때까지 눈높이에 맞춘 교육은 그 어떤 교수도 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델포이의 교수들은 말도 안 되는 과제의 양을 빼면 다들 괜찮은 인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피테르는 격이 달랐다.
심지어 그는 탁월한 마나 지배력을 사용해서 아카데미 생들이 다양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 후, 유피테르는 에메리아 교수처럼 팬클럽도 생기게 되었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저녁을 때운 그는 학장을 찾아갔다. 교수가 된 뒤로 이곳은 몇 번을 와도 편해지지 않는 곳이었다. 여동생이 왜 피티아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학장실에 도착한 그는 거대한 문을 두드려서 도착했다는 걸 알렸다.
“학장님. 유피테르입니다.”
“들어와. 유피테르 특별 교수. 기다리고 있었어.”
피티아는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라고 대답했고 유피테르 역시 무서워하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공간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뿐 피티아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가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게 많은 교수였다.
다른 아카데미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선 특별한 대우를 해줘도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왜 델포이로 외부인을 부르려는 거지? 자네가 가진 그 힘으로도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건가? 자네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는 사람 중 뛰어난 치유사가 있습니다. 티아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꼭 필요합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면 티아나 양의 병명을 내게 말해줄 수 있겠나.”
“그녀의 병명은 기본적으로 마나 감소증이 맞습니다. 다만 그 원인이 다른 존재 때문이라는 게 문제죠.”
유피테르는 직접적으로 마족이라고 말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학생을 누구보다 생각하는 그녀에게 범인이 마족이라고 말해봤자 믿을 것 같지 않았기에. 옴팔로스의 힘을 보고 왔기에 더욱 그 생각은 강해졌다.
옴팔로스라는 아티팩트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뭔가 사정이 있어 보였긴 했지만, 그게 가지고 있는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이 엘프를 가볍게 압도했으니까. 유알라냐가 부족하긴 해도 그녀의 정령술은 꽤 강력했다.
“다른 존재? 그게 어떤 거고,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신관들도 그것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는데.”
그의 예상대로 피티아는 다른 존재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마나 감소증 자체가 흔한 병도 아니었는데 다른 존재가 그런 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큰 문제였으니까.
이는 델포이의 위명에 큰 흠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