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9화 (69/265)

인간과 마족 사이(6)

* * *

결계 투성이인 이곳에서 절대로 들릴 리 없는 남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피테르 일행은 모두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목소리가 주변에서 들린 것 치고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 유피테르 아르테미스만이 한 곳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바보들. 마법사라는 사람들이 그딴 식으로 움직이니 날 찾을 수가 없지. 이거 봐라? 괜찮은 마법사도 한 명 있었네.”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일행들을 순간적으로 솟구쳐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는 델포이의 최강 듀오였고, 하이 엘프인 유알라냐와 그녀가 소환한 대지의 정령 역시 어디 가서 무시당할 취급을 받을 리 없었다.

그 목소리는 오로지 유피테르만을 진정한 마법사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엘프 중에서도 최고로 고귀한 핏줄인 하이 엘프를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요?”

카테리나와 클리오나 앞에서는 상냥한 모습을 유지하던 유알라냐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오며 소리쳤다. 어디 있는지도 몰랐지만, 엘프 전체를 욕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옆에서 든든한 대지의 정령이 보조를 맞춰줘 더욱 용기가 났다.

“엘프라고 해봤자. 고작 인간보다 조금 더 살고 귀만 길뿐인 거 아닐까. 귀가 길어서 장점이 있어? 푸흐흡.”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정말로 가만히 두지 않겠어요?”

사실, 그녀는 아직 목소리 주인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다. 하이 엘프임에도 그녀는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정령의 생각대로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귀쟁이 씨. 내가 어디 있는지는 아시고 그런 말을 하시나?”

“그, 그건….”

어린아이의 모욕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최대한 화를 참던 유알라냐도 참을 수 없는 듯 긴 귀가 붉어졌다. 흰 피부와 붉은 귀의 대비는 점점 더 심해져서 다른 이들도 알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엘프와 두 학생회 임원은 아직도 어디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옴팔로스가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제단을 보호하는 결계가 마나 감지를 흩트렸으니까.

“비겁하게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세요!”

유알라냐가 모욕당함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만 있자 다음으로 나선 건 학생회 부회장 클리오나였다. 평소에 라냐 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기도 했고, 인간들 중에서 그녀가 지위가 제일 낮았으니까.

“성국 출신의 마법사인가…. 레아를 모시는 기특한 아이들이긴 하지만 너무 약해. 이런 식이면 자랑스러운 아이들이라고 할 수 없잖아?”

일반적으로 성국 출신의 마법사들은 전부 신관이라고 불리는데, 비웃음 단긴 목소리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클리오나가 델포이에서 ‘마법사’라는 말을 자주 들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크레이타의 일반적인 신관이었다면 곧바로 화를 냈을 게 분명했다.

“화를 내게 하려는 시도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회 부회장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엘프보다 뛰어난 인내심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런 부류의 놀림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내성이 생겨서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어…?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재미없네. 그럼 넌 어떨까?”

생각만큼 불타오르지 않는 클리오나의 모습에 목소리의 주인은 흥미가 식은 듯 보였다. 오로지 침입자들을 놀리려고 하는 악의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잠시 침묵하던 목소리의 주인은 클리오나를 내버려 두고 다음 표적을 골랐다.

“어머 이제서야 나를 봐주는 걸까? 보는 눈이 없다는 게 너무 빤히 보여서 재미없는걸?”

오라버니의 앞에서는 항상 절제하려고 노력하던 카테리나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델포이 아카데미의 폭군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성격이 말투에 그대로 흘러나왔다. 사실, 이게 그녀의 원래 모습이었을지도 몰랐다.

아르테미스 가문의 철저함과 카르멘의 냉혹함 그리고 유피테르의 자상함을 모두 배운 게 카테리나 아르테미스라는 마법사였으니까 말이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기에 그녀의 성격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 누나는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네. 재미없을 것 같아서 패스. 그럼 다음은….”

폭군으로서 면모를 보인 카테리나에게 순간적으로 위압을 당한 것일까?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기는 싫은 듯, 목소리는 카테리나를 가뿐하게 뛰어넘었다. 순서를 뛰어넘어버리자 그녀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의 주인과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기에.

소중한 친구 두 명이 괴롭힘당했다는 걸 지켜보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순서대로라면 마지막은 나군.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나?”

“어, 그러니까…. 당신은 인간이, 정말로 인간이 맞아?”

목소리의 주인은 유피테르에게 무엇을 말해야 충격을 줄 수 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물었다. 은발의 두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말문이 막혀버린 건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이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그에게 물어보았던 질문이었다. 유피테르가 ‘그녀’의 후계자로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항상 유피테르를 인간이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그는 아직까지는 인간임이 틀림없었다.

“인간이 아니면 뭐로 보이는데?”

“신.”

유피테르는 은근히 즐거워하며 목소리의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받아쳤다. 그는 이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지 예상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고 있었던 유일한 마법사였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은 오롯이 신이야. 인간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그래도 당신에게서는 신의 존재감과 비슷한 게 느껴지는 걸 어쩌라는 거야! 마법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저 한심한 녀석들과 귀쟁이는 모르겠지. 신과 가장 비슷한 마나가 당신에게서 느껴진다는 걸.”

유피테르는 목소리의 주인이 말한 내용 중 신의 마나라는 부분을 듣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카테리나 일행과 대지의 정령이 의아해하며 쳐다보았음에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신은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나는 오로지 창조된 자들의 것이었다. 신의 힘은 고작 마나라는 틀로 가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나를 탄생시킨 특별한 힘을 마나와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과 마나를 만들었다.

크레이타의 레아교 경전 첫 문단을 장식한 문구이다. 이 말대로 마나란 결국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힘이었을 뿐이었다.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신의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의 마나라는 표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아티팩트 옴팔로스.”

유피테르는 그 말을 듣고 목소리의 주인이 아티팩트 라는 걸 확신했다. 그가 찾고 있는 열쇠라면 에고를 가질 수도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고, 잊혀진 시대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신의 모습을 아는 건 당연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한 4개의 열쇠는 잊혀진 시대나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었으니까.

“오, 옴팔로스라고요? 에고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유피테르의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가 조금씩 삭히고 있던 유알라냐였다. 오래 살았어도 저 정도로 뛰어난 아티팩트는 처음 봤기에 놀랐다. 그녀의 세계에서 아티팩트는 고작 사용자와 이야기하는 수준이었으니까.

델포이 전체에 마나 발전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에고를 통해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델포이 전설의 일부가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카리나.”

“리오나. 학장님을 제외한다면 최초로 옴팔로스가 어떤 아티팩트인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거구나.”

클리오나와 카테리나 역시 옴팔로스라는 이름에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전설로만 내려왔던 아티팩트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순간을 맞이했기에.

옴팔로스가 대체 어떤 아티팩트이길래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토론까지 벌어졌었다. 그러나 아무도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했고, 감히 학장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토론은 지지부진해졌고 전설로만 남아버렸었다.

만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아티팩트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순간이었기에, 델포이의 아카데미 생으로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역시, 당신은 다르네. 맞출 수 알았어.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만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닌걸.”

목소리의 주인. 옴팔로스는 정체가 들킬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피테르의 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드디어 두 번째 열쇠로 추정되는 아티팩트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옴팔로스의 말에 유피테르는 대답을 요구했다. 행운이 겹쳐서 옴팔로스를 찾아냈는데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옴팔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에 남자아이의 모습을 나타내며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모자를 푹 눌러 쓴 얼굴은 끝까지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 뭔가 사정이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엄청난 수의 마법진이 하늘을 뒤덮었다. 잊혀진 시대에서 사용되었던 고대의 마법들이 눈이 어지러울 만큼 펼쳐졌다. 그중에는 고대 마법 강의에서도 보지 못한 유실된 마법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건 고대 마법 전공 서적에서 봤던 그 마법이잖아. 그 이름이 뭐더라. 리오나?”

“융해 마법 인시너레이트라고 기억합니다.”

“그럼, 우리 진짜 위험한 거네? 저 정도 수의 마법진에서 나온 마법들을 다 쳐낼 수 없을 거 같은데.”

“거기 친구들 위험할 것 같은데 공부는 그만하지요. 막을 방법은 있는 건가요?”

두 델포이의 아카데미 생은 수석과 차석에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의에서 보았던 마법진이 맞는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도 학구열이 불타는 건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걸 지켜보고 있던 엘프는 어떻게 대응할지가 먼저였다.

그래서 아껴두려고 마음먹었던 소원권을 지금 사용하기로 했다. 저 아티팩트도 인정한 그가 이 정도를 위기라고 생각할 리 없을 거라고 믿으며.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지금 저희를 여기서 살려서 보내주세요!”

“이 정도로 소원을 쓰기 아깝지 않아? 무려 나한테 소원을 빌 수 있는 권리인데.”

“이대로 가다간 저희는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저만이라면 모를까. 카리나와 리오나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될 애들이라고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도 여유로운 그를 보며 유알라냐는 답답했다. 지금 당장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쳐 도망가더라도 이미 늦었다고 느꼈기에. 하늘을 뒤덮은 저 마법진들을 피할 방법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악을 지르며 뭐든 상관없으니 지금 당장 구해달라고 소리쳤다. 이곳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학생회의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일분일초가 급했다.

“그 마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어. 이번에는 특별 보너스로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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