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8화 (68/265)

인간과 마족 사이(5)

* * *

“그런 방법이 있었나.”

조급함은 모든 문제 해결의 적이라는 말을 증명해주는 한 마디였다. 평소의 유피테르라면 이 정도는 쉽게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의 능력을 제한했다.

지금 유피테르가 이렇게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있는 동안에도 갇혀 있는 그녀는 아파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걱정하면 할수록 괜찮으니까 그러지 말라며 웃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네요. 대지의 정령의 힘을 빌리면 옴팔로스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정령의 힘은 위대하니까요.”

유알라냐는 클리오나의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령의 힘이란 엘프들에게서 있어서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티팩트 하나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또, 저 괴물 같은 인간이 왜 옴팔로스를 찾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뭔가 도움을 주면 잊어버리지 않고 위기 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현재의 대륙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았다. 한심한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정령들은 누구보다 전쟁과 싸움에 민감했다. 그런 정령들이 거대한 암운이 다가온다고 매일같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럼 옴팔로스를 찾는 걸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다만 나중에 제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주실 수 있나요? 대단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유알라냐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유피테르에게 교환 조건이라는 미끼를 던져보았다. 그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조건은 문제없이 받아들일 테니까.

그녀가 본 유피테르는 누구보다 차갑지만 동시에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그 정도야 뭐 문제없어. 트리아의 아는 동생이기도 하니.”

“감사해요. 그럼 바로 찾아보도록 할게요.”

유알라냐 식 정령술 ― 노에스

그녀는 편안한 자세로 정령술을 펼쳤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는 정령술을 사용하는 것을 처음 봤기에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엘프는 하나하나가 전설이었고 동시에 공부가 되었으니까.

역사 전공 서적에는 단 몇 줄로 설명되어 있는 걸 실제로 볼 기회는 흔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유알라냐는 엘프 중에서도 극히 소수인 하이 엘프였으니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역사의 숨겨진 부분 그 자체였다.

“불렀는가. 계약자.”

유피테르와 싸울 때와 다르게 이번 대지의 정령은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크기도 훨씬 컸고 느껴지는 존재감 역시 묵직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돌멩이와 거대한 암석의 차이라고나 할까?

“대지의 상급 정령 노에스라…. 생각보다 능력이 있는 편이었네. 하이 엘프가 허풍은 아니었나 봐?”

정령술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는 유피테르가 감탄했다. 상급 정령부터는 쉽게 소환할 수 없었다. 중급 정령까지는 노력으로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상급 이상부터는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었으니.

“오랜만이에요 노에스. 이분이 부탁하셔서 불렀어요. 이 주변에서 가장 강대한 기운을 지닌 아티팩트를 찾아주실 수 있을까요?”

은근히 놀리는 듯한 어조의 유피테르를 무시하고서, 라냐는 대지의 상급 정령에게 소환 목적을 말해주었다. 정령과 계약자는 의외로 정령이 우위에 있는 관계였으니까.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형식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가장 강력한 반응을 내뿜는 건 이곳에 있는데. 대지가 떨고 있는 게 들리지 않는가.”

노에스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리킨 것은 유피테르였다. 정확히는 유피테르가 차고 있던 펜던트였다. 가족들이 선물해주었던 아르테미스 가주의 목걸이는 그의 생각보다 대단한 아티팩트인 듯했다.

“이게 그렇게 강해…?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아니 내가 찾는 건 다른 거다. 대지의 정령.”

가주의 증표를 가르치는 노에스를 보며 유피테르는 살짝 놀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아티팩트들은 마법사들에게 꿈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몇 개 있었으니까. 그중에서 고작 이 펜던트가 가장 큰 마나를 발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옴팔로스라고 하는 아티팩트. 이 델포이 지역의 중추석이에요. 강하면서도 동시에 넓은 곳을 지탱하는 느낌의 마나이지 않을까 싶어요.”

단서가 부족한 유피테르의 말을 유알라냐가 보충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옴팔로스의 느낌을 비슷하게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런 건가. 잠시만 기다려보게.”

노에스는 눈을 감으며 감지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대지와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정령의 감지 능력은 마법사의 것을 쉽게 상회했다. 마법사의 감지는 한계가 분명했으니까. 이것이 정령이 위대한 존재인 이유 중 하나였다.

“찾았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에 있군. 라냐 네가 부를 때마다 즐겁구나.”

잠시동안 집중하던 노에스는 옴팔로스가 있는 곳을 듣자마자 눈을 떴다. 그리고는 재미있다는 웃음을 지으며 계약자를 칭찬했다. 영생을 살아가는 정령에게 있어 부탁을 들어주는 건 무료함을 때울 수 있는 유희와도 같았다.

이 어린 계약자가 부를 때마다 신기한 일이 생겼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유알라냐는 정령계에서 유명한 엘프였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려 이 대륙에 발을 내디딜 때면 사건이 벌어졌으니까.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이 자는 아마 말로만 들었던 ‘후계자’일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령들 모두가 그를 만나고 싶어 했다.

“찾은 게 사실이라면 그곳으로 안내해주겠어?”

“어렵지 않지. 따라오게나.”

순식간에 유피테르는 노에스가 안내하는 대로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마족의 일은 믿을 수 있는 트리아에게 맡겨 놨으니 지금은 아티팩트에 집중해도 될 시간이었으니까. 정령의 말이라면 신뢰도 할 수 있었기도 했고.

“자, 잠시만요, 오라버니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교수님. 저희도 데려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옴팔로스에 대해서 너무나 궁금합니다. 델포이 전설을 눈으로 직접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유피테르가 정령과 함께 이동할 준비를 하자 학생회의 두 명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을 데려갈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유피테르가 정령과 그 계약자인 유알라냐에게만 마법을 걸어주려고 하려는 게 뻔히 보였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 역시 옴팔로스를 보고 싶었다. 유피테르처럼 특별한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도 새로운 것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보내는 마법사였을 뿐이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드래곤이 나타난다 해도 당연히 보러 가는 게 마법사의 심리였으니까.

“위험할지도…. 아니다 같이 가자. 너희도 이리 오렴.”

그는 처음에는 아직 어디인지 듣지 못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여동생과 그 친구가 강해봤자 아카데미 수준이었으니까. 파르니소스 산에 위험한 몬스터는 살지 않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지의 상급 정령까지 소환할 수 있는 엘프와 정령 그리고 자신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강해진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운 카테리나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어 마음을 바꿨다.

“위치는?”

“지도가 있는가? 아, 고맙네. 바로 이곳이네.”

인원들을 모아 이동하려는 유피테르의 질문에 노에스는 위치를 알려주려고 했지만, 지도가 없었다. 그걸 빠르게 눈치챈 클리오나가 지도를 품에서 꺼내 펼쳤다. 노에스는 그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지도상에서 한 점을 가리켰다.

“지도를 대체 왜 가지고 다녀? 리오나.”

“그러게요. 지도를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학생회 부회장의 난데없는 물품 자랑에 카테리나와 유알라냐가 당황했다. 리오나는 여행자도 아니었고 아카데미 생으로 델포이 소속이 된 지 몇 년이 지났기에 지도를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제가 조금 길치랍니다. 그래서 지도가 있는 거랍니다.”

범인이 자백해서 해답은 쉽게 풀렸다. 클리오나가 지도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델포이가 워낙 거대해서 길을 외우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심각한 길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늘 가는 길이 아니면 불안했다.

“정말이야? 길치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카테리나는 신입생 시절부터 클리오나와 친해졌다. 입학시험 수석과 차석이라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나 서로 질투할 수도 있는 관계이기도 했다. 게다가 입학시험 시절의 카테리나는 ‘폭군’으로 유명했다.

흉흉한 얼음 여제의 곁에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그걸 처음으로 깬 사람이 바로 클리오나였다. 그녀는 친근한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서 다가가 카테리나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 후, 시도 때도 없이 같이 다녔음에도 지도를 펼치는걸 카테리나는 본 적이 없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일단 이동하자. 눈을 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야.”

유피테르는 대화가 이탈하는 걸 막고서 손에 끼고 있던 반지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러자 엄청난 마나가 모여들었다. 순간적으로 모이는 마나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흠칫했다. 인간의 한계를 가뿐하게 넘어버린 양이었으니까.

“역시, 자네는… 군.”

노에스의 말과 함께 그들은 옴팔로스가 있는 것 같은 위치로 이동했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빛이 사라지고서 그들을 반긴 건 파르니소스 산 정상의 제단 같은 곳이었다. 제단은 결계처럼 보이는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어 내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척 보기에도 결계는 굉장히 복잡한 마법식으로 짜여 있었다.

“단독으로 공간 이동을 하다니 정말 인간이긴 한 거야…?”

유알라냐는 어지러운지 비틀거리면서도 세 명의 인간과 엘프 그리고 정령을 공간 이동시킨 유피테르의 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잊혀진 시대 이후로 공간 이동은 아티팩트가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정령의 힘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공간 이동은 쉬운 게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이동하거나, 대지의 힘을 빌려서 빠르게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뭐. 어느 정도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서 한 거니까. 그렇게 놀라지들 마 다들. 난 엄연한 인간이라고?”

유피테르는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다며 별거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이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클리오나는 이게 환상이 아닌가 확인 먼저 해보았다. 그녀가 살았던 곳에서는 그게 당연한 상식이었으니까. 마법은 이게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짜라고 대답해주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는 엘프와 함께 공간 이동을 한 건 그야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라버니. 저게 옴팔로스인가요?”

마족을 쫓아내는 걸 보았던 카테리나에게는 유피테르가 신과도 같았다. 그래서 공간 이동에 놀랐다기보다는 제단에 집중했다. 옴팔로스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비밀을 파헤쳐 볼 생각을 못 한 아티팩트이었기에 신기했으니까.

“환영해. 유피테르 특별 교수. 카테리나 회장. 클리오나 부회장. 그리고 당신은 엘프 유알라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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