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7화 (67/265)

인간과 마족 사이(4)

* * *

유알라냐의 목소리는 은근히 떨리고 있었지만, 거리가 있는 주방에 있었기에 카테리나가 그걸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방에 들어갈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기에 의심하지도 않았고.

“라냐 님의 음식은 맛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아마 교수님도 먹어보신 후에 엄청 맛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주방 근처 원형의 식탁에 앉아 있던 클리오나가 유피테르에게 자랑했다. 이곳에 자주 와본 카테리나의 안내에 따라 자리를 옮긴 그들은 요리하고 있는 라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설과는 다르게 엘프라고 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천진난만하게만 보였던 태도를 잊게 할 정도로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라냐의 모습은 멋졌다. 숙련된 셰프 그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주었으니까.

동시에 여러 개의 요리를 하는 기술은 아무나 선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손이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절도가 있었다. 마치, 순서를 미리 정해놓은 것처럼.

“카리나, 리오나 이것들 좀 옮겨줄래요?”

요리가 하나, 둘씩 완성되기 시작하자 그녀는 학생회의 소녀들을 불러 테이블로 날라 달라고 부탁했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는 배가 고팠는지 군말 없이 빠르게 이동하며 음식들을 날랐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설마 엘프들은 고기를 안 먹는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믿고 있는 건 아니죠? 언니랑 친하시면 모를 수가 없는데….”

마지막 요리로 스테이크가 나오자 유피테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유알라냐에게로 향했다. ‘그녀’에게 들었고 트리아의 요리를 먹어 전설이 사실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유명한 책에는 아직도 엘프가 채식을 즐겨한다고 쓰여 있었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엘프가 고기를 요리하는 모습이 신기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피테르의 시선을 눈치챈 유알라냐는 웃으며 물었다. 그녀 역시 인간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을 들은 적이 있었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가 우연히 이곳에 왔을 때, 경악하는 표정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했고.

“트리아와 아는 사이인데 설마 그런 전설을 믿겠어?”

“역시 오라버니세요. 저희와는 반응이 다르시네요.”

유알라냐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바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말에 카테리나는 큰 의심을 두지 않았다. 클리오나 역시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엘프의 촉은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하. 딱 걸리셨네요. 그런 표정으로 아니라고 하셔봤자. 다 안다고요. 뭐. 음식이 식어서는 안 되니 어서 먹죠.”

아무리 어린아이 같은 그녀라고 해도 유알라냐는 유피테르보다 훨씬 나이를 먹은 엘프였다. 나이에서 나오는 감이란 건 쉽게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걸 핑계로 아까의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앞에서 기다리는 배고픈 두 어린 양의 모습을 보니 상관이 없어졌기에.

“잘 먹을게요. 라냐.”

“라냐 님. 감사합니다. 남김없이 먹겠습니다.”

“엘프의 음식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호사를 누리는군. 벌써부터 맛있어서 군침이 돌 정도야.”

카테리나, 클리오나 그리고 유피테르는 요리해준 유알라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서 취향대로 음식을 골라 먹기 시작했다.

네 명이 앉기에 커 보이는 테이블은 다양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스프, 샐러드, 파스타, 스테이크 그리고 디저트로 보이는 푸딩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진미들의 뷔페였다. 카테리나는 파스타를 골랐고, 클리오나는 의외로 샐러드를 골랐다. 유피테르는 스테이크를 썰었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어서 정말 기쁘네요.”

유알라냐는 음식을 남김없이 해치우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요리에 관련될 때 한해 그녀의 천진난만함은 성숙함으로 바뀌는 듯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의 나이를 합쳐도 다른 한 사람을 넘지 못했으니까.

“아, 오늘은 오랜만에 오라버니의 차도 마셔보고 싶어요.”

디저트로 나와 있던 푸딩과 케이크를 완전히 비우고서 카테리나가 의견을 냈다. 이미 유알라냐가 차를 한 잔씩 타 준 상황이었음에도 그녀는 거침없었다. 가문을 떠나오고 그의 차를 마셔보지 못해 아쉬웠으니까.

“맞아요. 저도 카리나 회장이 그렇게 극찬했던 교수님의 차를 마셔보고 싶네요.”

“미식가에다가 입이 짧은 카리나가 인정한 차라면 엘프 비전의 차와 좋은 승부가 될지도 모르겠네.”

클리오나 역시 학생회 활동을 하며 유피테르가 타준 차에 대해 들어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엘프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의 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알라냐 역시 흥미를 나타냈다. 유피테르라는 인간은 무엇을 해도 상상 그 이상이어서 재미있었으니까.

“제대로 한 번 솜씨를 보여주도록 할까. 찻주전자랑 찻잎은 어디에 있나?”

“저기 보이시나요? 그곳을 열어보시면 여기 있는 것들을 제외한 전부가 있을 거예요.”

차에 관해서는 엘프만큼 까다로운 유피테르는 여동생의 요청을 그대로 수락했다. 유알라냐가 만들어 준 요리들은 돈을 주고도 사 먹지 못할 정도로 맛있었기에. 무언가를 받았으면 보답해야 하는 게 당연한 예의였다.

등가교환. 잊혀진 시대의 어떤 연금술사가 항상 입에 담았다고 책은 말했다.

유피테르의 물음에 유알라냐는 흔쾌히 대답해주었다. 물론,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비장의 컬렉션을 제외한 평범한 찻잎들이 모여져 있었다. 그것마저도 인간들 세상에서는 특등품이라고 불리겠지만 말이다.

유피테르는 테이블에서 벗어나 안내해준 곳으로 가서 여기저기 열어보며 필요한 것을 꺼냈다. 찻잎부터 티포트 그리고 우유까지 필요한 건 그곳에 다 있었다. 찻잎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다 바로 차를 우려낼 준비를 했다.

“유피테르 교수님의 차는 어떤 맛일까? 궁금해. 라냐 님의 차를 마신 이후로 밖의 차는 맛이 없어져 버렸으니까.”

실제로 클리오나는 이곳의 음식과 홍차를 마시고 나서는 카페를 잘 안 가게 되었다. 어떤 유명한 곳을 가보아도 엘프의 차에 비견될 수는 없었으니까. 차로 유명한 데메테르의 찻잎도 이미 고급화되어버린 그녀의 혀를 만족시켜줄 수 없었다.

“어머. 그렇게 칭찬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나올지 지금은 지켜보자구요.”

요리와 차. 이 두 가지에 엘프로서의 자존심을 담은 그녀에게 있어 클리오나의 칭찬은 다른 어떤 말보다 기뻤다.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고 유피테르가 어떤 차를 가져올지 기대해보자고 말했다.

“이 향은…. 아마 밀크티인 것 같네. 마들렌이 남아있는 걸 신경 쓰신 걸까?”

카테리나의 말대로 세아니아 대륙에서는 마들렌과 가장 어울리는 차로 밀크티가 가장 유명했다. 마들렌의 말랑말랑함을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차로 조화시키는 게 상식이었다.

몇 분이 지나자 유피테르는 찻잔과 티포트를 가지고 오더니 한 사람씩 차를 따라주었다. 조금 특이한 점은 티포트가 두 개였다는 점과 사람마다 섞는 비율이 달랐다는 것이었다.

“어, 살짝 씁쓸하지만 끝 맛이 굉장히 달콤하네요. 딱 제 취향이에요.”

“마, 말도 안 돼. 고작 저 정도 찻잎으로 이런 맛을….”

유피테르가 타주는 밀크티를 반신반의하고 있던 클리오나와 유알라냐는 한 모금을 마시고서 충격을 받았다. 차 자체로도 취향을 그대로 저격했는데 남았던 마들렌과도 잘 어울렸으니까.

특히, 유알라냐는 공포를 느끼기까지 했다. 비장의 찻잎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차보다 낫다고밖에 평가할 수밖에 없었기에. 희한하게도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가 타주었던 그리운 맛이 났다.

두 사람이 밀크티의 신세계에 빠져있을 때, 카테리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냐. 델포이의 주요 아티팩트라고 불리는 옴팔로스에 대해서 잘 알아?”

엘프의 비밀 공간에 있는 모든 이가 다른 방식으로 디저트 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 유피테르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델포이에 오래 있었던 그녀라면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에.

“옴팔로스. 그건 델포이의 중추잖아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잠깐 관심이 생겨서. 여기서 델포이 아카데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너잖아?”

연구실에서 있던 책도 유피테르의 의문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했다. 드워프가 파르니소스 산에 델포이 아카데미를 만들 때부터 옴팔로스는 존재했다고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옴팔로스의 정확한 위치는 학장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진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옴팔로스가 ‘그녀’를 찾기 위한 두 번째 아티팩트일지 확신을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의문을 풀어줄지도 모를 엘프가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저 바보였다.

“옴팔로스…. 그건 델포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델포이의 시스템과 소비되는 모든 에너지가 거기서 나온다고 들었으니까요.”

“랭킹전의 심판을 맡을 에고도 아티팩트의 능력 중 하나라고 학장에게 들었어.”

그냥 넘어가는 소리였지만, 단서가 될지도 모를 말을 유피테르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그가 살아가는 이유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라버니 그게 사실이에요? 항상 보던 에고가 아티팩트였다고요…? 저는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요.”

“너와 모의전 했을 당시에 그런 식으로 말했어. 그러니 틀림없겠지.”

유피테르는 카테리나에게 대답을 해준 후, 다시 유알라냐에게 질문했다. 모든 해답의 열쇠를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옴팔로스의 위치를 알아?”

“아, 아니요. 모르는데요. 애초에 여기서 오래 살았어도 제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소수라고요. 학장이나 몇몇 교수들 그리고 학생회 정도밖에 모르니까요.”

단서가 여기서 결국 끊겨버리는 건가 하는 생각에 유피테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첫 번째 열쇠야 ‘그녀’가 알려줘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너무나도 막막했다.

무언가를 닥치는 대로 부수거나 제국을 멸망시키는 일이 훨씬 쉬웠다. 아티팩트라는 단서 하나 가지고 열쇠를 찾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 라냐 님 엘프들은 정령을 다루지 않나요?”

“맞아요. 정령들을 모시고 사는 게 엘프의 사명이죠. 무슨 일이에요 리오나?”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회 부회장 클리오나가 무언가 생각이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알라냐는 리오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정령 마법을 쓰는 것 자체는 비밀이 아니었기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학생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소중한 친구였기도 했고.

“그 정령 마법에서는 물건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방법도 있다고 예전에 배운 것 같아요. 교수님이 무언가 찾으시는 게 있으시다면 그 방법을 사용하면 어떨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