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6화 (66/265)
  • 인간과 마족 사이(3)

    * * *

    “꽤나 무섭게 이야기하시네요. 유피테르 씨. 전 엘프라고요? 당신은 아마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은방울꽃은….”

    엘프는 느긋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분명히 힘 싸움을 하려는 마음이 잔뜩 담겨있었다. 애초부터 엘프와 드워프는 인간보다 강한 존재였다. 대륙 전쟁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강할 거라고 이종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 꽃은 엘프 중에서 통치자의 일족의 별칭이지. 자신이 하이 엘프니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말하고 싶었나?”

    유피테르는 거침없었다. 아니, 이게 ‘그녀’에게 교육받은 그가 갖춰야 할 원래의 자세였다. 가족이나 필요에 따라서 과거의 모습을 꺼내 들었지만, 현재의 그는 이 정도의 자신감을 가져도 되었다.

    ‘그녀’의 후계자란 그런 위치였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를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었다.

    “고작 연약하다 못해 부러질 것처럼 보이는 인간 주제에 당돌한 태도네요?”

    “할머니 대접이라도 받고 싶은 건가? 엘프에게 있어 그 정도 모습이라면 몇백 살은 된 거 아닌가?”

    엘프와 드워프가 인간보다 소수임에도 강한 이유는 생명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오래 살았다. 대륙 전쟁 이후의 인류가 최대 120살 정도까지 산다고 한다면 드워프는 200 엘프는 300 이상까지도 거뜬하게 살아갔으니까.

    그들과 인간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보고 느끼는 것 자체가 달랐다.

    “하하…. 역시 당신은 특별하군요. 그분이 후계자로서 당신을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가요.”

    “그녀를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게 됐는지 좀 물어봐야겠는데. 그 사실은 아무나 알아서는 안 되니까 말이야.”

    은근슬쩍 던진 라냐의 말은 유피테르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나 다름없었기에. ‘그녀’를 기억하는 자들은 대부분 후계자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웃고 있는 하이 엘프는 ‘그녀’가 준 명단에는 없었다.

    ‘그녀’를 구하기 전까지 비밀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동료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를 되찾는 일은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어떠한 것보다 어려웠으니까.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얼음 나비의 꿈

    여러 번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줘 특기 마법이라고 해도 문제없어 보이는 결계를 펼친 유피테르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엘프에게 쇄도했다.

    “어머, 그렇게 정열적으로 절 노리시면…. 나이 차가 좀 걸리는데요? 당신은 엘프의 기준에서도 아름다우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유알라냐 식 정령술 ― 노움

    “도와줘요. 노움. 나쁜 아저씨가 저를 보쌈해가려고 해요!”

    라냐는 유피테르가 다가오는 걸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땅의 마법과는 다른 기묘한 생명체가 대지에서 솟아 나와 유피테르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봐 할머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마법이 다발로 날아올걸?”

    유피테르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참고서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노움을 힘으로 떨쳐냈다. 그가 자주 사용하던 육체 강화 마법 메르카르트를 이미 무영창으로 더블 캐스팅을 해놓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불쌍한 엘프에게 있어 노움이 발길질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령은 엘프에게 있어 신앙의 존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신관들 앞에서 신성 마법을 검으로 갈라버린 것보다 더욱 충격이었다.

    고작 인간이 마법도 아니고 발길질로 정령을 때리다니.

    “무, 무슨 힘이 저렇게…. 정령님을 발로 차다니 너무 무엄해!”

    유알라냐 식 정령술 ― 카사

    믿을 수 없는 상황에도 엘프의 꺾이지 않는 정신력을 보여주듯 그녀는 두 번째 정령을 불러내었다. 새롭게 나타난 정령은 불의 정령이었다. 드래곤을 닮은 도마뱀은 라냐를 지키고 서서 뜨거운 불을 내뿜었다.

    “솔직히. 하급 정령술로 날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면 많이 실망인데.”

    “정령술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거야…? 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그가 말한 대로 카사와 노움은 전부 하급 정령이었다. 정령은 마법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난, 엘프에게 주어진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엘프가 활과 검 그리고 정령술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역사서에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정령술의 정확한 단계에 대해 인간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엘프와의 교류는 드워프보다 적었으니까. 건축과 무기를 만드는 것에 푹 빠진 드워프는 가끔 인간의 영역에 찾아왔다. 그들에게는 세계에 이름을 남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었다.

    반면에 엘프는 그저 비밀이란 이름을 가진 숲에 사는 존재일 뿐이었다.

    쾅.

    라냐의 코앞까지 다가간 유피테르는 뿜어져 오는 카사의 불을 손으로 쳐내버렸다. 마나로 강화된 육체에 그 정도 불은 따뜻할 뿐이었으니까. 그리고서는 미리 만들어 낸 얼음의 화살을 넓게 펼쳐 엘프를 포위했다.

    희대의 천재 카테리나 아르테미스가 실패했던 더블 캐스팅을 넘어 트리플 캐스팅을 한 것이었다. 그중 두 마법은 시동어도 없이 말이다.

    “말도 안 돼. 인간이 영창은커녕 시동어도 없이 마법을 쓴다니. 그건 마치… 같잖아?”

    라냐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경악했다. 그녀가 알아챌 수 있었던 건 결계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과 시동어도 없이 얼음 마법을 펼쳤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협하고 있는 얼음의 화살을 믿을 수 없는지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확인했다.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럼 내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분명히 알 텐데.”

    “그… 그건.”

    순식간에 몰린 상황 여기서 말을 잘 못 한다면 목숨은 위험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상처 없이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꼬이고 또 꼬여 라냐는 어떤 말을 해야 이 위기에서 벗어날지 몰랐다.

    “그건? 왜 말을 하다 말지?”

    상황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유피테르에게서는 인간미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조금은 화가 나 있었다. ‘그녀’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작 하급 정령술로 자신을 겁박했으니까.

    그건 ‘그녀’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 같았다. 자신을 모욕하거나 하는 일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절대로 그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들었으니까… 당신이 후계자라고.”

    라냐는 고작 인간에게 겁을 먹어 떨고 있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럼에도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 엘프라고 해서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명백하게 저 인간이 자신보다 훨씬 위였다.

    “누구에게?”

    화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듯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전혀 없었다. 그가 추궁할수록 얼음 화살은 목표물에 점점 더 다가갔다. 살짝 닿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 같은 시린 냉기가 방 안을 채웠다.

    결계를 미리 만들지 않았다면 카테리나가 이변을 눈치채고 저 방 밖으로 나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얼음 나비의 결계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냉기가 주변을 얼리더라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조용하게 했다.

    “그건….”

    얼음 화살을 맞지도 않았는데도 냉기가 전해져 이미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추위에 이빨이 계속 딱딱 부딪쳐서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아이에게는 제가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냐를 구해준 건 연구실에서 빛과 함께 모습을 나타냈던 발키리. 트리아였다.

    “네가? 그녀에 대한 사실은 함구하라고 했을 텐데. 너희 칼리스토의 현 주인은 나라는 걸 잊었어? 그리고 칼리스토의 이름을 계승받을 때, 과거의 인연을 모두 버리는 것 아니었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트리아가 무릎을 꿇고서 용서를 비는데도 얼음 같은 유피테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칼리스토의 이름 역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믿었던 트리아가 저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다.

    “죄, 죄송해요. 그래도 모두 제 잘못이에요. 언니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칭찬하던 사람이라서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트리아의 등장으로 몸을 구속하는 냉기가 조금은 편해졌는지 라냐가 울먹이며 유피테르에게 말했다.

    “트리아. 라냐라는 하이 엘프가 네 여동생인가?”

    “여동생은 맞지만, 같은 마을에서 소꿉친구 같은 관계입니다. 가족은 아닙니다.”

    트리아가 라냐와 무슨 사이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은방울꽃 마을에서 트리아와 라냐는 몇 안 되는 비슷한 나이의 친구였다. 트리아는 어려서부터 어른스러웠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반면에 라냐는 천진난만한 성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트리아는 ‘그녀’의 선택을 받아 칼리스토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제일 친한 친구를 잃은 라냐는 방황하며 숲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이 엘프 마을의 밖은 생각보다 무서웠고 그리 강하지 않았던 라냐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삶이었다.

    마을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트리아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라냐를 찾아내 델포이의 비밀 공간을 만든 후 그곳에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드문드문 찾아오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고생했어도 라냐의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정확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네게 들어서 아는 척만 하는 거였고.”

    “그렇습니다.”

    트리아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유피테르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그들을 용서했다. 그 증거로 얼음 마법을 풀고 여기저기 얼어붙은 곳들을 되돌렸다.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간 걸 확인하고 결계까지도 풀었다.

    “그렇다면 편히 쉬어도 좋다. 라냐 다음부터는 사람을 봐가면서 장난을 치도록.”

    “감사합니다. 그럼 임무를 수행하러 돌아가겠습니다.”

    “고… 고마워요.”

    트리아는 묵묵하게 인사를 하고서 다시 빛 속으로 사라졌다. 라냐는 사라져가는 언니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은 허공을 붙잡았을 뿐이었다. 지금 그녀들의 격차는 예전보다 더욱 커졌으니까.

    “그래서. 궁금한 건 해결이 되었나?”

    “뭐, 엄청나게 멋있고 강하다는 것만은 알겠네요. 어차피 점심시간이기도 하니 같이 드실 거죠?. 제가 준비할 거예요.”

    유피테르는 대답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가끔 트리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요리를 선보였다. 미식가를 자청하는 그에게 또 다른 엘프의 요리는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의 긍정적인 태도를 보고 유알라냐는 주방으로 가며 다른 방에 있던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를 불렀다.

    “카리나, 리오나 일이 다 끝났어요. 배고프죠? 바로 점심 식사를 준비해 줄게요.”

    그녀의 생각보다 유피테르는 더욱 무서운 존재였지만,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신했는지 카테리나 일행을 부르는 그녀의 말투는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그리고 차는 역시 오라버니의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방에서 밖으로 나온 카테리나는 뜬금없이 유피테르의 차 실력을 칭찬했다. 아마, 클리오나가 타준 차가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딱히, 별일은 없었단다. 저기서 요리하고 있는 라냐라는 엘프가 내가 아는 사람의 동생이라고 해서 말이지. 안 그래?”

    “그, 그래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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