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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65화 (65/265)
  • 인간과 마족 사이(2)

    * * *

    “마나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라…. 그건 꽤 무겁고도 어려운 이야기네요.”

    그녀의 슬픈 이야기를 전부 들은 유피테르의 첫마디는 생각보다 해결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거였다. 티아나의 증상은 언뜻 보면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애초에 시작점이 달랐다.

    그에게는 한 줌의 마나 조차 없었으니까. 병을 앓기 전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저 건너편에 아직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지금 원하는 대로 마법을 사용하시잖아요. 게다가 모의전에서는 폭군 선배와 함께 엄청난 마법 대결을 보여주었다고 들었는데요.”

    “해결법에 관한 내용은 금기에 가까워서 어떤 식으로 고쳤는지 말해드릴 수는 없겠군요. 솔직히 이야기해드린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구요.”

    유피테르의 그 말에 티아나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이 교수야말로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 신관들이 1년 이상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음에도 딱히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신성 마법으로 치료를 받아도 마나는 끝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 주었다.

    “그렇게 눈에 띄게 실망하지는 마세요.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 그 말은….”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는지 유피테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도움을 줄 것 같은 그의 말에 티아나의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 부탁했던 일을 해결하면 어느 정도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바로 해결을 해줄 순 없겠지만, 도와드리도록 하죠.”

    “가, 감사해요. 유피테르 교수님.”

    그토록 기다려왔던 도와주겠다는 대답이 가장 필요했던 사람에게서 나왔다.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지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아픈지 확인했다. 아팠다.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출 수 없었다.

    다시 마법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든 생각을 집어삼켰으니까.

    “일단은 돌아가도록 하세요. 무언가 진척이 있으면 알려드리도록 하죠.”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그녀는 마음을 담아 깊이 인사하고는 연구실에서 나갔다. 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나의 이해를 가르치던 전 교수에게 배신당해 인간 불신에 걸렸지만, 선한 마음을 가진 신관들과 어울리며 조금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피테르 교수에게서는 신관들이 사용하는 마법처럼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이 기운을 사용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만약, 그렇다면 더는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식어버린 차 만이 티아나가 왔다 갔다는 걸 증명할 정도로 조용해져 버린 연구실 안. 티아나가 가진 병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하던 유피테르가 입을 열었다.

    “칼리스토 중 누가 대기하고 있나? 너희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신이시여 트리아가 대기 중입니다.”

    정신이 나간 버린 사람처럼 유피테르가 허공에 말하자, 곧바로 한 여성이 나타나 대답했다. 마치 빛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신의 전사라고 불리는 발키리처럼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네 차례구나. 트리아. 프레이야가 말한 것처럼 이곳에 마족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관련 정보를 찾아오도록.”

    “신의 뜻대로.”

    어떠한 반론이나 의문도 없이 트리아라는 여성은 유피테르의 말에 따르겠다고 한 후, 다시 빛 속으로 사라졌다. 유피테르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책장으로 다가가 책 하나를 꺼냈다.

    “그럼, 정보를 모아올 동안 이거라도 읽고 있을까.”

    책 표지에 델포이의 역사라고 적혀 있었다. 카테리나와의 점심 약속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있으므로 학장이 말했던 아티팩트를 조사하려고 마음먹었다. 이곳에 있다는 아티팩트가 혹시라도 그가 찾는 열쇠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기적이 쉽게 일어날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마음에 든 책을 찾은 그는 자리에 앉아서 집중했다. 그가 보여주는 집중력은 정말로 놀라울 정도였다. 엄청나게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제대로 읽고 있는 것 맞냐고 물어볼 것만 같았다.

    “오라버니.”

    일반인들이 본다면 기겁할 정도의 두께를 가진 책을 다 읽어갈 때쯤 누군가가 책에 집중하고 있는 유피테르의 이름을 불렀다. 집중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이 불린 걸 깨달은 그는 책에서 눈을 떼고서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의 앞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사람은 여동생 카테리나였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 와있던 게 아니었다. 옆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었다.

    “리나. 혹시 기다리게 했니? 미안해.”

    “아니에요. 저희는 방금 왔는걸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책에 열중하는 모습 오랜만에 봤네요. 뭐 궁금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아, 잠깐 신경이 쓰이는 게 있어서. 옆에 친구분을 소개해 주겠니?”

    유피테르는 여동생에게 사과하며 시계를 흘끗 보았다. 시계는 아직 약속 시각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테리나에게 함께 온 여자 아카데미 생을 소개해달라고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클리오나 브레닐스라고 합니다. 델포이 학생회 부회장으로 카리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유피테르 교수님.”

    클리오나의 말투는 마치 군대식 교육을 받은 것처럼 딱딱했다. 본능적으로 뿜어내는 마나와 말투를 보고, 유피테르는 그녀의 출신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서 평범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잘 부탁해요. 델포이 특별 교수인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입니다.”

    “카리나의 오라버니시니 말을 편하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에, 리오나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 리오나. 사적인 자리에서는 날 너무 어렵게 대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단다.”

    훈훈한 자기소개의 시간이 끝나고 카테리나가 이끄는 일행은 아래 델포이로 향했다. 유피테르는 남은 강의가 없었고, 학생회의 업무는 카테리나가 의욕적으로 끝내 놓은 상태였으므로 그야말로 쉬는 시간이었으니까.

    카테리나 일행은 톨로스에서 빠져나와 파에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아카데미에서 인기가 넘치는 학생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유피테르가 함께 있는 걸 누군가 보고 소문을 퍼트렸는지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그녀들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그에게 농담을 건네며 파에톤이 오기를 기다렸다.

    “역시 오라버니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전부 오라버니를 보러 온 거라구요.”

    “와아. 카리나가 말한 대로 엄청 아름다우시네요. 이 정도면 남자가 보더라도 반할지도 몰라요.”

    아름답다는 표현은 남자와는 잘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를 표현이었다. 그러나 유피테르는 예외였다. 흩날리는 긴 은발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반드시 끌었을 정도였고, 깊이 있는 은색의 눈동자는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으니까.

    “비행기는 그만 태우렴. 내 외모는 그냥 평범하다는 걸 안단다.”

    “카리나, 혹시 네 오라버니는…?”

    “응, 맞아. 리오나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일 거야. 어린 시절부터 항상 저런 느낌을 유지하셨으니까 말이야.”

    클리오나는 자신의 외모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한 유피테르에 한 번 놀랐고, 늘 있던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테리나를 보며 두 번 놀랐다. 이 남매는 모두 신이 직접 조각한 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그래도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었는데 오라버니 쪽은… 말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학생회에서도 늘 자랑했고, 만나기 전에 주의를 해줬는데도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일행이 파에톤에 타서 아래 델포이로 향할 때까지 뜨거운 시선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일행 중 그 누구도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팬들을 대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파에톤은 아래 델포이에 도착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조금 빠르게 움직일까요? 아무 말 말고 따라와 주세요.”

    카테리나는 그렇게 말하며 마나로 몸을 강화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클리오나 역시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문제없이 따라갔다. 유피테르는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두 명의 소녀들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훨씬 빠르게 움직여 카테리나를 쫓았다.

    카테리나가 움직임을 멈춘 건 상점이나 음식점이 아닌 벽 앞이었다. 뜬금없는 여동생의 행동에도 유피테르는 말없이 기다렸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벽 쪽으로 다가가 특이한 리듬을 가지고 두드렸다.

    벽이 갈라지며 공간이 생겼고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는 주저 없이 그 안으로 향했다. 유피테르 역시 신기한 일에도 딱히 놀라운 표정을 짓지 않으며 뒤를 따랐다.

    “이곳에 오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카리나. 리오나 그리고 유피테르 교수님?”

    그 공간에서 일행을 맞이해준 건 놀랍게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엘프였다. 그녀는 전설 그대로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황족과는 다른 느낌의 로얄 블론드의 긴 머리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포세이돈 일족보다 맑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긴 느낌의 두 귀가 엘프의 정체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엘프? 인간과 더는 만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스스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전 엘프 중에서도 별종이랍니다. 유피테르 교수님. 은방울꽃의 숲 델포이 점에 오신 걸 환영해요. 여주인인 유알라냐에요. 애정을 담아서 라냐라고 불러주세요.”

    유알라냐라고 이름을 밝힌 엘프는 전설과는 다르게 인간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륙 전쟁 시기 이종족으로 박해당한 엘프와 드워프의 이야기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라냐. 약속대로 오라버니를 데리고 왔답니다.”

    그랬다. 유피테르를 부른 존재는 다름 아닌 엘프였다. 카테리나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장의 맛집을 소개해주고 싶어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아니었다.

    “카리나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잠시 이분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줄 수 있나요. 몇 분이면 되니까요.”

    유알라냐는 카테리나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유피테르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른 방에서 있어 줄 수 있냐고 요청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럼 저 방으로 갈까. 리오나?”

    “잠깐만 카리나 기다려줘. 라냐 님 혹시 그때 주셨던 차 있어요? 그거 다시 마시고 싶은데.”

    “저쪽 방에 들어가면 찻잔에 있을 거예요. 찻잎을 우리는 방법부터 어떤 물을 사용해야 하는지 전부 거기에 있는 종이에 쓰여 있으니 그대로 하면 비슷한 맛이 날 거예요.”

    학생회의 두 소녀는 배가 고팠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나는 맛있기로 소문난 엘프의 차를 마실 수 있냐고 물었고, 유알라냐는 웃으며 차가 있는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그 와중에도 절대로 똑같은 맛이 난다고는 말하지 않는 게 엘프의 자존심인 것 같아 유피테르는 피식 웃었다. 카테리나와 클리오나는 유피테르에게 조금 이따 보자고 인사하며 다른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나를 부른 용무를 들어볼까?”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생회의 소녀들이 사라지자, 유피테르는 전설 속의 엘프를 향해서 편하게 말했다. 둘만이 남은 공간에서 유피테르는 지배자의 면모를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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