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3화 (63/265)

델포이 아카데미(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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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 아카데미는 어디까지나 세컨드 서클을 달성한 ‘마도사’를 양성하기 위한 곳이었지, 저런 궤변을 들을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모의전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해도 선이란 게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강의가 계속된다면 저는 더는 듣지 않겠습니다. 마나를 부정하는 교수가 주는 학점 따위 필요 없습니다.”

신성 모독이라고 말했던 남자 아카데미 생은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전공 책을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자연스럽게 강의실의 문 쪽으로 향했다.

강의실에 있던 모두는 저 아카데미 생이 나가버린다면 뒤따라가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가 문고리를 잡은 후 가만히 서 있었기에. 당당한 발걸음으로 문까지 도달했지만, 그 이후로는 미동도 없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고작 퍼스트 서클에 도달한 주제에 세계의 이치를 안다고 자부하는 어리석은 학생 씨.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볼 용기가 없는 자들은 세컨드 서클에 절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제게 뭘 하신 거죠? 교수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만. 빨리 풀어주시죠. 이딴 강의에서 1초라도 더 낭비하지 않고 나가고 싶으니까요.”

그는 고개만 살짝 돌려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뜻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화가 났다. 교수라고 해서 무조건 상급자가 아니었으니까. 마법이 있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기에 당연히 유피테르가 무언가를 한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는 올해 주목할 만한 인재라는 평가를 받은 신입생은 없었고, 그는 실력 면에도 충분한 자신이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의 마나 감지에는 누군가가 마법을 쓰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가장 우월한 실력을 지녔을 게 분명할 저 망할 교수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걸요? 내 강의는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이왕 들었으니 끝까지 들어보는 걸 추천할게요.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 뭐죠?”

“마이야르입니다.”

계단식 강의실이어서 그와 유피테르의 거리는 꽤 멀었다. 그럼에도 유피테르는 그의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들었고, 웃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마이야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똥 씹은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하고서는 나가는 걸 포기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마법을 풀 수 없었기에. 애초에 이게 무슨 마법인지조차 짐작이 가지를 않았다.

“마이야르. 당신은 크레이타 출신인데 너무 티가 나네요. 신성 기관에는 왜 가지를 않았나요?”

“그, 그걸 어떻게….”

애초에 성국 출신인데 티가 날 정도로 흥분했기에 유피테르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교수였기에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마이야르의 가녀린 마음이 부서질지도 몰랐으니까. 그에게 자라나는 새싹을 밟는 취미는 없었다.

“뭐, 성국에 인맥이 조금 있어서라고 대답해두죠.”

유피테르는 강의 초반부터 이어진 자신의 발언이 꽤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면서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중에서는 성국의 지도자인 교황 역시 속해있었다. 현재의 교황은 결코 유피테르보다 위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위, 마나 그리고 마법까지 그 무엇을 보더라도 말이다.

‘그녀’의 뜻을 잇고 있는 유피테르는 그럴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티아나입니다. 교수님의 말은 꽤 신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네요. 하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나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저희는 그걸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마나를 버리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죠?”

마이야르로 인한 소란 속에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질문했다. 말할 기회를 뺏긴 마이야르가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여자 아카데미 생은 학구열을 불태우며 안경 너머로 유피테르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학구열 이상의 열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나가 만악의 근원인 건 맞습니다. 다만….”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유피테르를 주목했다. 그가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따라서 강의의 질이 바뀔 수도 있었으니까. 또, 이 뒷부분에 합리적인 설명이 나올 거라고 그가 자신 있게 말했으니까.

마치, 불에 심각하게 타버린 스테이크 같은 성격을 보여주던 마이야르 역시 잠깐 참고서 강의에 집중하고 있을 정도였다.

“…인간의 부덕함이 그걸 몇십 배로 만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기사 왕국의 친구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검이 결국 살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때, 진정한 기사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전 마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유피테르는 목이 타는지 비치되어 있던 물을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나 마도사가 보여주듯 마법은 공격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죠. 친구를 무기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나를 제멋대로 단정합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결국, 인간이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유피테르는 마나의 어두운 면도 보듬을 줄 알아야 마도사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는지 아까 전보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카데미 생들이 많아졌다.

비록 유피테르가 아까 전의 문제 발언에 대해 어떠한 해명도 하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지금의 발언과 연관을 지으며 알아서 이해하는 듯했다. 친한 학생들끼리 무언인가 속닥이는 게 그의 눈에 보였으니까.

“일단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 강의이니만큼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기보다 어떤 식으로 강의가 진행될지 맛보기만 보여주었습니다. 아직까지 할 말이 많은 학생들도 보이는군요.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제 연구실로 찾아와도 좋습니다.”

그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듯한 표정인 마이야르를 쳐다보며 강의의 끝을 알렸다. 그리고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아카데미 생들 역시 한 번씩 눈을 맞춰 주었다.

전공 책과 필기구 등의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학생들은 수업을 빠르게 끝내줘 밝게 웃었다.

아직 아침 10시 정도여서 연속 강의가 없는 학생들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는 시간이 많을수록 마법 훈련이나 과제를 더 많이 할 수 있었으니까. 또, 친구들과 놀 수도 있었다.

명문이라고 소문난 델포이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 사람이었다.

“아, 마지막으로 제 강의를 철회하지 않는 아카데미 생들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려고 합니다. 제 강의는 기초 필수 강의이지만 상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십시오. 혹시, 친구 중에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와도 좋습니다. 이상입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은 몬스터 대군의 퍼레이드를 연상시키는 강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카데미 생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유피테르가 간단하게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세바스찬이 했던 교육의 효과였다.

그가 배정된 자신의 연구실로 향하려고 하자, 한 여자 아카데미 생이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전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은 듯했다. 벚꽃 빛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그다음으로는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피테르 교수님? 첫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상담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피테르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거짓을 말하고 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나 역시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했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의 마나 감지를 피하는 희대의 천재일지도 몰랐다. 마나는 사용자의 감정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그런 인재는 아카데미에 있을 리 없었다.

‘사람을 먼저 의심하고 보는 건 나쁜 버릇인가. 고작 학생일 뿐인데. 하지만 이 마나의 향은….’

아르테미스 가문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다. 얼음성 내부에서 그의 편은 극히 소수였으니까. 어머니 아리엘과 동생 카테리나, 담당 집사 세바스찬을 제외하고는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었다.

음식에 독을 넣는 일은 기본이고 깊은 잠을 자는 도중 찾아오는 암살자는 쉴새 없이 그를 괴롭혔으니까. 지금은 사라져버린 얼음성의 결계는 가문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효과가 없었다.

아니, 카르멘이 일부로 효과를 약하게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얼마든지요,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니 제 연구실로 가죠.”

유피테르는 거절당할까 걱정하는 그녀에게 싱긋 웃어주며 안심시켜주고서 연구실로 향했다. 델포이의 교수들이 받는 특전은 기숙사가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실험해볼 수 있는 연구실도 주어졌다.

연구실은 가장 높은 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피테르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수들의 연구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 같은 주제를 연구하거나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유피테르는 학장이 알려준 연구실 번호를 찾아 헤맸다. 연구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았고 그 역시 처음 오는 공간이었기에 단번에 찾을 수는 없었다. 유피테르는 번호를 티아나에게 알려주었고, 그녀는 교수의 요청에 같이 강의실을 찾았다.

“교수님 이곳이에요!”

“들어가도록 하죠. 찾는 걸 도와줘서 고마워요. 티아나.”

유피테르는 마나 인증으로 연구실의 문의 잠금을 해제했고, 티아나와 함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인식해 환한 불빛이 켜졌다. 눈이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방 안을 좀 더 잘 볼 수 있는 밝기였다.

“그래서, 무슨 내용을 상담하고 싶은 거죠? 초보 교수한테 처음부터 상담이라니 궁금하군요,”

유피테르는 티아나에게 의자를 권한 후, 자신도 맞은 편에 앉았다. 연구실에 그가 좋아하는 티 세트가 없다는 게 불만이었지만, 간단한 물 정도는 있었기에 그거라도 꺼내와 티아나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저는 교수님을 알고 있어요. 아르테미스 가문의 대공자. 마나를 느낄 수 없는 신의 저주를 받은 아이. 그리고 동시에 달의 몰락을 해결한 실력자 맞으시죠?”

상담 내용을 말하라고 했지만, 이 정도로 스트레이트 하게 물어볼 줄 몰랐던 유피테르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처음에 느꼈던 티아나의 인상과 지금의 발언은 전혀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그에게도 충분히 상처를 주었던 기억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낯선 사이에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둘 다 맞습니다만. 그래서 용건은요?”

당연히 그의 말투는 딱딱해질 수밖에 없었다. 첫 대화부터 타인의 상처를 후벼 파는 사람에게 좋은 태도를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친함의 정도를 떠나 그건 기본적인 예의였다. 물론, 뒤에 칭찬을 더했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그게, 제가 급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네요. 사실, 저도 비슷한 고민이어서요. 이렇게 교수로 오셨다는 건. 아픈 와중에서도 마나를 사용할 방법을 찾으셨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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