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61화 (61/265)
  • 델포이 아카데미(12)

    * * *

    “아침 운동은 이쯤에서 그만하도록 할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울리기도 전, 이미 유피테르는 눈을 뜨고 있었다. 심지어, 운동까지 한 뒤 샤워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자기 관리를 하는 습관이 만들 수 있었던 건 세바스찬의 덕이 컸다.

    원래 아침잠이 적어 일찍 일어나긴 했지만, 운동까지 하는 습관은 분명하게 세바스찬이 강조했던 교육의 결과였으니까. 유피테르에게 가장 소중한 ‘그녀’ 역시 이 습관을 훌륭하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러면서 아침 운동을 늘 잊지 말고 꼬박꼬박하라고 덧붙였다.

    그 후, 유피테르는 방 안에 있던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랜만에 입어보는 정장은 뭔가 어색했다. 이상하게도 학생들 앞에 서는 건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피티아 학장은 자신에게 딱히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 눈치였다.

    어젯밤 에메리아와 헤어진 후 교수 전용 기숙사로 가고 있을 때 피티아가 연락을 해왔다.

    “아리엘의 아들. 아니지, 유피테르 특별 교수. 자네가 맡을 과목이 정해졌네.”

    “마나의 이해인가요?”

    유피테르는 크리스틴, 이졸데 그리고 에메리아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리며 물어보았다. 현직 교수와 아카데미 생들의 정보력이 얼마나 맞는지 궁금했으니까.

    “에메리아 교수가 알려준 건가. 맞네. 마나의 이해를 맡아주면 되네. 아직 오리엔테이션 기간이니 그렇게 힘들진 않을 거야.”

    놀랍게도 그녀들이 알려준 정보는 정확했다. 생각보다 높은 적중률에 만족하며 그는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인내심을 보여주듯 피티아는 하나하나 설명해주었고 강의에 대한 그의 생각도 인정해주었다.

    델포이 아카데미가 제공한 방은 쾌적했다. 교수의 특권으로 방을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게 가장 만족스러웠다. 또, 아늑한 욕조도 있었고, 연구를 할 수 있는 서재 방이 따로 있었다. 침실과 연구실 그리고 거실까지 딸린 비교적 큰 방이었다.

    혼자서 살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사치스러울 정도였다. 귀족 출신의 교수들의 입맛도 충족시킬 수 있어 보였다.

    최고의 재능을 지닌 유망주를 키워내기 위해 선발된 올스타 교수진이었기에,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듯싶었다. 이 정도라면 다른 아카데미로의 이탈을 방지할 수 있었다. 학생의 이탈만큼 교육자의 이탈도 아카데미에 큰 타격이었으니까.

    “이제 톨로스로 가볼까.”

    유피테르는 교수용 기숙사에서 벗어나 강의가 이루어질 톨로스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해서 준비한 자료들을 가지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갔다. 드워프의 손길이 닿아서 도로도 정비가 잘 되어있었고, 산간에 위치해 공기도 맑았다.

    톨로스는 그야말로 신전 같은 분위기였다. 진리를 위해 공부하는 상아탑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왔던 학문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유피테르는 톨로스의 앞에 서서 마나와 마법을 발전시킨 위대한 자들에게 잠시 존경의 묵념을 한 뒤, 교수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교수들이 강의 전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휴식처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 ‘차’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가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장의 컬렉션으로 채워 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게 누구야. 새로 오신 유피테르 교수 아니신가? 환영해. 이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에 온걸.”

    유피테르가 휴식처에 문을 여는 순간. 호감형의 남성이 격하게 반겨주었다. 처음 부분만 듣고 또 시비가 걸리나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축하 폭죽을 터트리거나, 신입에게 못된 장난을 치는 그런 식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게 대해주는 반응이 신선했다. 낯선 곳에서 자신을 받는 격렬한 환영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적어도 시비가 걸리지는 않았군. 다행이야.’

    유피테르는 여행하는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시비가 걸렸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한 학기 동안 있어야 할 곳에서 환영받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얼음성에서 출발할 때에는 상상도 못 했었다.

    정말로 교수가 되어버렸으니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어리석은 행동은 이곳에 추천을 해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마나의 이해 담당 교수로 부임하게 된 유피테르입니다.”

    “반가워. 알폰스야. 아르메 제국 출신 평민이라 성은 없어. 혹시, 뭐 평민에 대한 차별 의식 같은 건 아니지? 리투아의 대단한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알폰스는 괜히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랭킹 제도가 더 중요해서 신분 의식이 옅었지만, 교수들의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델포이가 위치한 아르메 제국은 이름뿐인 귀족제도였지만, 이곳에는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교수들 역시 능력으로 평가받았지만, 기저에 깔린 귀족 선호 사상이 쉽게 없어질 리 만무했다.

    “귀족 의식이라니 설마요. 오히려 제 가문은 지나치게 능력주의여서 문제인걸요. 귀족의 이름만 믿고 날뛰다가는 그날로 가문에서 제명될지도 모른다구요. 하하.”

    “그건 정말로 신선한 발언인걸. 신분 차별에 관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리투아 제국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어이. 이봐. 고우스 이 친구 농담 한번 재밌게 하네.”

    “난 이 논문을 내일까지 작성해야 하니까 제발 말 좀 걸지 말아줄래?”

    고우스라고 불린 남성은 왠지 유령 같은 분위기였다. 검은색 사각형의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잠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종이와 펜을 들고서 미친 사람처럼 허공에 손가락질하며 마법식을 계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비둬 내비둬. 쟨 고우스라는 교수인데. 이번에 교수 계약 연장받으려면 학회지에 논문을 써야 하거든. 평소에는 저렇게 신경질적이지는 않은데. 뭐 지금은 건드리지 말자구. 아. 넌 강의 언제 들어가?”

    “조금 남았어요. 시작까지 한 30분 정도 남았네요.”

    “30분이면 식사도 풀코스로 받을 수 있는 긴 시간이야. 알아두라고 유피테르 후배. 아카데미 생들만 힘든 게 아니야. 교수도 생각보다 바쁜 몸이라고. 시간은 미스릴이야. 미스릴.”

    유피테르는 대화의 분위기에 적당히 맞춰서 어깨를 으쓱했다. 알폰스는 그런 유피테르를 후배라고 살갑게 부르며 교수가 바쁘다는 점을 굉장히 어필했다. 신임 교수를 겁주려는 의도인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대화를 델포이의 아카데미 생들이 들었다면 아마 기가 찬다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었다.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는 알폰스라는 교수는 과제를 무한 생산하는 몬스터로 유명했기에.

    알폰스는 마법의 역사와 고대 언어 등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가 고대 마법을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어 학계 권위자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었다. 특히, 주전공인 마법의 역사의 경우 재미없는 내용을 유쾌하게 풀어준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딱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우는 ‘과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이후에도 알폰스는 유피테르에게 교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실전 압축형 교육‧지도법을 손수 전수해주었다. 확실히 말솜씨가 뛰어나 별다른 이야기가 아닌데도 매력적으로 들렸다.

    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알폰스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이제는 정말로 가봐야겠네요. 첫 강의부터 늦으면 좋은 교수가 될 수 없다고, 메리 누나가 그랬거든요.”

    강의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다가와. 유피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폰스에게 인사했다. 파론 역시 강의 시간이 다가왔는지 앉아있던 곳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알폰스는 유피테르에게 에메리아와는 많이 친해졌냐고 물어보더니, 신임 교수 환영회 겸 술자리를 갖자고 권했다. 유피테르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많은 듯했다.

    “그래, 꼭 살아서 만나자. 근래에 아래 델포이에 맛있는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던데, 거기서 술 한잔하자고. 에메리아한테도 전해 놓을게.”

    “새로운 모임은 언제나 환영이죠.”

    유피테르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강의해야 할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폰스는 방향이 다른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제 그들이 있던 휴게실에는 적막 속에서 논문에 힘쓰는 고우스만 남아있었다.

    델포이에 소속되어있는 모든 학생의 이론 강의가 이곳 톨로스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톨로스는 20층이라는 보기 힘든 높이로 되어있었다. 유피테르가 향한 건 그중에서도 3층이었다. 알폰스의 경우에는 더 높이 올라가는 듯했다.

    톨로스에는 드워프의 기술력과 여러 마법사가 합작한 간이 텔레포트 장치가 있었다. 이 덕에 아카데미 생들과 교수들은 원하는 위치에 걷지 않고도 갈 수 있었다. 건강을 위해 계단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층은 너무 먼 곳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한 유피테르는 작은 부분에도 관심을 가진 설비에 감탄했다. 전면에는 강의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마법 확성기가 설치되어있었고, 내용을 적을 수 있는 칠판에도 마법 처리가 되어있었다.

    이 칠판은 교수가 적은 내용을 저장해서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었고, 마음대로 일부분을 지울 수도 있으며 확대할 수도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자동으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백업하는 기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칠판 계의 혁신이었다. 별을 다섯 개 주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출석을 직접 부르며 확인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얼마든지 마법으로 속이는 게 가능했기에 학생 하나하나의 마나 패턴을 기억하는 아티팩트를 설치해놓았다.

    아카데미 생들은 가지고 있는 델포이 카드나 고유 마나 패턴을 인식시켜 강의에 출석했다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긴급한 경우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가 강의실에 들어와 구경하고 있자 미리 자리를 잡으려고 일찍 온 아카데미 생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유피테르였기에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티를 내지 않고 흘끗 쳐다보는 그들은 저 교수가 모의전의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은발과 은안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강의가 시작되기 바로 전. 계단형의 강의실은 아카데미 생들로 가득했다. 1학년의 필수 강의였기 때문에. 또, 강의를 빼먹는다는 연약한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은 이곳에서 적응할 수 없었다.

    수재 중의 수재들만 모였고, 호시탐탐 랭크를 올릴 기회를 노리는 샛별들이 있는 곳이었으니까.

    “반갑습니다. 마나의 이해 강의를 담당할 유피테르입니다. 모의전에서 저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강의가 처음이라 이해해주시면 고마울 거에요.”

    유피테르는 강의실 전면부에 서서 아카데미 생들에게 인사했다. 다른 교수들은 어떨지 몰랐지만 적어도 한 학기 동안 함께할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교육이란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니까.

    그가 모의전에서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여준 사람임을 인정하자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우선 강의에 앞서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군요. 여러분은 마나와 마법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유피테르는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지는 것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공부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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