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59화 (59/265)
  • 델포이 아카데미(10)

    * * *

    아직 모의전의 여운이 남은 듯 눈시울이 붉어진 학장 피티아가 무대 위로 나타나 유피테르를 축하해주었다. 그녀에게 있어 유피테르의 수준은 감동 그 이상이었다. 조금은 정체되어가는 델포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피티아 학장님. 교수로 가는 시험은 합격입니까?”

    “그렇지. 100점 만점에 10000점이야. 자네를 단기가 아니라 특별 교수로 초빙하고 싶은데. 어떤가?”

    다가온 피티아 학장에게 유피테르는 시험에 합격한 거냐고 물었다. 피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운 직위로 그를 초빙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특별 교수란 당연히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의 사전에는 교수, 단기 교수, 명예 교수 정도밖에 없었기에.

    “무슨 차이가 있죠? 특별 교수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넌 들어봤니?”

    “아, 아니요. 저도 들어본 적 없네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카테리나에게 물어봤지만, 그녀 역시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런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준 건 처음 말을 꺼냈던 학장이었다.

    “특별 교수란 그야말로 특이 케이스를 의미하네. 아카데미에 속해있는 교수이지만, 늘 강의를 열 필요도 없네. 단지 아카데미 생들과 교수의 발전을 위해 있는 자리이지. 이 경우에는 마블링도 포함할 것이고.”

    특별 교수는 정말로 특이한 자리였다. 특별 교수가 갑(甲)이 되고 델포이 아카데미가 을(乙)이 되었으니까. 대부분의 교수나 학생과는 완전히 달랐다. 특별 교수는 될 수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학장이 인정해야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기도 했다.

    처음에 단기 교수로만 채용하려던 그녀는 유피테르가 가진 힘을 보고서 반해버렸다. 저 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델포이의 유망주들 중 세컨드 서클의 벽을 부술 인재를 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그녀가 부임한 이후로 세컨드 서클의 마도사를 배출하지는 못했으니까.

    “특별한 자리인 것 같은데. 저로 괜찮을까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데.”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넌 네가 할 일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렴. 이번 학기는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좀 보여줘야 하니까 강의를 하나 정도 맡고 마블링도 담담해 줄 수 있니?”

    “어차피, 그럴 생각으로 왔으니까요. 어떤 강의를 가르치면 될까요?”

    “그건 조율을 해봐야 나올 것 같아. 정해지면 통신 마법으로 메시지를 남기도록 하지.”

    그 후, 피티아는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지만, 일단은 합격이라는 사실에 유피테르는 순수하게 기뻤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세계에 조금씩 이름을 남기고 있었으니까.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유피테르는 카테리나와 인사하고서 콜로세움 밖으로 조심스럽게 나왔다.

    콜로세움 여기저기에 모여있는 갤러리들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애초에 강함을 동경하는 자들이 모인 델포이였기에 수준이 다른 유피테르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온갖 마법을 사용해 그를 찾아다녔다.

    엄청난 경기에 환호성에 가득 찬 갤러리들이 유피테르를 쫓았지만, 마나 방출을 극도로 줄여 들키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수준은 델포이 전체가 마음먹고 덤비더라도 이길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야호, 유피테르 배고프지 않아?”

    순간적으로 나타난 인기척에 놀랐지만 발랄하게 다가온 건 바로 에메리아였다. 콜로세움을 나오고 마법을 풀어서 알아챈 것일까? 아니면 학장이나 다른 정보통에게 위치를 알았을 수도 있었다.

    “아, 확실히 배가 고프네요. 뭔갈 먹으려면 아래 델포이로 내려가야 하나요?”

    “파에톤을 타고 가면 금방이야. 곧 열차 시각이 다되어 가는데. 마침 네가 보이더라고 같이 먹으러 가지 않을래?”

    에메리아의 제안을 거절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유피테르는 긍정의 의사를 내비친 뒤, 그녀의 안내에 따라 파에톤에 탑승했다. 파에톤은 톨로스와 김나지움처럼 드워프가 만들었는지 외부와 내부 모두 섬세한 장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나 엔진을 사용한 파에톤은 놀랍게도 이용 요금이 무료였다. 유피테르와 에메리아가 탄 파에톤은 힘차게 아래 델포이 지역으로 향해 달려갔다.

    “메리 누나가 추천하는 식당이란 게 설마 여기에요?”

    유피테르는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기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선호했다. 델포이 아카데미로 오는 여행 중에도 다양한 도시의 명물들을 섭렵하며 온 게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이었다.

    결국, 치킨이라는 닭튀김을 제휴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고.

    “설마, 좀 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도 있어. 델포이 아카데미의 부지는 상상 이상이니까. 참고로 위쪽에도 간식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들도 있고, 기숙사 부지에는 식당도 있단다.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그들이 있는 곳은 아카데미 생들이 자주 찾는 음식점이었다. 워낙 바쁜 날에는 김나지움이나 도서관에서 벗어날 수 없어 기숙사 식당을 이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학기 초에는 여유가 있었기에 보통 아래 델포이에서 느긋하게 먹었다.

    당연히 학생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식사하고 있는 한 명의 교수와 유피테르에게로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에메리아 역시 푸른색으로 된 반 묶음 머리와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인이었고, 유피테르는 다시 언급하기 입이 아플 정도로 미형이었다.

    심지어 조금 전 있었던 모의전에서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했고. 아카데미 생들에게 이 둘의 조합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꺄악! 누나래 누나. 역시 연하남이 역시 최고지. 요새 소설들 봐봐 연하남이 대세잖아. 안 그래? 누나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 얼마나 좋니?”

    “너… 너? 설마 연하남파였어? 배신자였네. 난 연상남판데. 우리 이제 절교하자. 너랑은 겸상하는 게 수치야. 다른 곳으로 가줄래?”

    “아니 고작 그런 문제로 싸우는 거야? 밀린 과제나 생각하시지. 학기 초에 미리미리 해놔야 밤 안 샐 텐데.”

    “과제 먹는데 밥하는 이야기 하지 마라. 체한다.”

    유피테르와 에메리아의 미묘한 분위기를 보고 근처에 있던 두 명의 학생들은 바로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그 곁에 있던 두 명의 남학생들은 과제 이야기를 하며 슬픈 현실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과제는 마족들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아카데미 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맛은 보장이 되나요? 게다가 벌써부터 과제를 한다구요? 이제 학기가 막 시작했는데.”

    “학생과 과제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해야 하는 사이야. 물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짝사랑이지만 말이지.”

    에메리아의 말은 지극히 옳았다. 델포이의 과제량은 현직으로 활동 중인 유명한 마법사들도 치를 떨 정도였다. 과제는 단순히 이론을 연구하고 작성하는 리포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몬스터를 토벌하고 증표를 가져오라고 하는 등의 실전적 성향의 퀘스트도 있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과제가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내일의 내가 어떻게든 할거야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더는 손을 델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나는 게 과제의 특징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카데미 생들은 미리미리 과제를 끝내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다. 단지 현실이 마음먹은 대로 변할 생각이 없었을 뿐.

    “게다가 세컨드 서클이 되려면 이 정도는 참아야지. 바깥세상이 험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에메리아는 웃으며 그렇게 덧붙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델포이의 시설과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유피테르는 그걸 보며 델포이의 탁월함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델포이 아카데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양한 교육을 통해 세컨드 서클을 각성한 마도사들을 키워내는 것이었다. 세컨드 서클은 꿈의 경지였다. 애초에 퍼스트 서클도 누구에게는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재능을 지닌 사람만이 ‘마법’이라는 신의 은총을 제대로 누릴 수 있었다.

    유피테르 역시 그 의견에 공감했다. 재능은 쉽게 개화하지 않는 법이라는 걸 누구보다 몸으로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었으니까. 어중간한 노력은 오히려 모두에게 상처만 준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 저기요! 에, 에메리아 교수님.”

    유피테르와 에메리아가 밥을 먹으며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도중 한 여학생이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평소부터 인기가 폭발했던 에메리아와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렀던 유피테르의 관계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학생들 중 연하남이 좋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학생이었다.

    다가온 학생의 수준은 꽤 높았다.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의 기운에 비교하기는 일렀지만, 고작 학생 수준에서 이 정도로 완벽하게 마나를 갈무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델포이는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넌 내 강의를 듣는 크리스틴이잖니? 늘 대단한 성적을 내서 기억하고 있단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거니? 아니면 혹시 러브레터?”

    에메리아는 수줍게 다가온 아카데미 생의 얼굴이 기억에 남았는지 곧바로 아는 체를 했다. 서글서글한 태도는 학생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유피테르는 그걸 보고 머릿속 한편에 넣어두었다. 공식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누구에게는 당연한 말과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깨달음을 줄 수 있었다.

    에메리아의 교수로서의 태도는 충분히 기준이 될 법했다. 델포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그녀가 가진 인기가 보통이 아닌 걸 확인할 수 있었기에. 그저 지나갈 뿐인데도 학생들이 먼저 반갑게 인사해왔다.

    교수와 학생은 그리 편한 관계가 아닌 걸 유피테르 역시 알고 있었다. 조금 전에도 과제가 넘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학생들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는가. 꿈이 학자가 아니라면, 과제의 어머니인 교수와 친하게 지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크리스틴.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그’ 크리스틴인가요. 누나?”

    사실, 크리스틴은 에메리아아와 유피테르에게 다가가 질문하는 게 두려웠다. 교수님이 가지고 있던 좋은 이미지를 뭉그러트릴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에메리아 팬클럽 회원으로서 낯선 남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이성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교수에게 이름이 각인된 게 과연 괜찮은 일일까? 괜히 나서서 과제가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우등생인 그녀에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과제는 무서웠다.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 두 사람이 정말로 커플이라면 이는 모두에게 알려야 할 중대 사항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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