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56화 (56/265)

델포이 아카데미(7)

* * *

“이곳이 파르나소스 산인가. 풍경이 듣던 것 이상인걸.”

아르메 제국 경계선을 지나 파르나소스 산 정상에서 델포이 아카데미를 내려다본 유피테르는 찬란한 광경에 감탄했다. 단순히 아카데미라고 보기에는 거대했고, 세분화되어 있었으니까.

그가 기억하기로 파르나소스 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델포이 아카데미는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흔히 위 델포이, 아래 델포이라고 불러왔다. 딱히 이유는 없었으나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었다.

위 델포이에는 이론 공부와 실전 경험을 위한 건물들이 보였다. 이곳의 교육은 ‘톨로스’와 ‘김나지움’이라고 불리는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톨로스’는 이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고, ‘김나지움’은 실기 수업 또는 대련을 할 수 있는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래 델포이의 경우 문화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도시 자체가 교육을 위해 조성돼있기에 시장, 기숙사, 델포이 극장 등이 있었다. 생활하기 위한 필수품부터 사회에 나가 마법사로 활동할 때 필요한 문화 상식까지 기를 수 있었다.

기숙사와 도서관의 경우 아래 델포이에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위 델포이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딱히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위에 있는 걸 유피테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빨리 내가 있는 곳까지 오렴. 아리엘의 아들. 계속 기다려줄 수는 없단다.”

“바로 출발하지요.”

산 정상에서 델포이 곳곳을 구경하던 유피테르에게 마법으로 통신이 왔다. 들어본 적이 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은 델포이의 학장 피티아의 것이었다. 그는 빠르게 대답하고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첫인상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리엘의 아들이란 말이지? 이름이 유피테르였나? 딸내미와 비교하면 많이 약한 거 같은데? 그 애는 꽤 괜찮은 소재였는데 말이지. 너는 좀 애매하네? 잘 모르겠어. 강한 건지 약한 건지.”

누가 봐도 학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검은색 고깔모자에 안경을 쓴 여성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유피테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성격을 보여주듯 업무 거리가 잔뜩 쌓여 있는 책상은 지저분하지 않고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유피테르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저런 타입의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까. 명령만 내리는 보스가 아닌 조직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리더였으니까.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엄청난 업무량에도 학장은 전혀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에 대해 질문했다.

“자네가 델포이의 교수로 꼭 근무해야 할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을 때는? 그리고 그걸 어떤 식으로 극복했는가?”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하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교수로서 자네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질문 중에는 인성을 물어보는 것도 있었고 특정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압박 가득한 면접이었다.

“세컨드 서클? 아르테미스니 얼음 속성의 마니인가? 네 여동생처럼?”

“일단은 그렇게 되겠네요. 여동생보다는 강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애도 인정했구요.”

유피테르는 그녀의 질문에 하나하나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기 위한 것이지, 아르테미스의 가주로 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추천서를 써준 어머니께 면목이 없었다.

“네 여동생 카테리나 보다 강하다고? 그 애는 이곳에 있던 모든 기록을 절찬리에 부수고 있는 최연소 학생회장인데?”

흥미로운 말을 들었다는 듯 처음으로 피티아가 고개를 들어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그녀의 매서운 눈빛이 유피테르를 훑었다.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폭군’ 카테리나 아르테미스.

델포이 전체 랭킹 1위. 리투아 제국 4대 공작가 중 최고의 재능을 지닌 마법사. 아르테미스의 얼음 공주. 조기 졸업 대기자. 델포이 학생회장. 랭킹전에서 손속을 두지 않는 폭군.

카테리나를 지칭하는 칭호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가 델포이 아카데미에 남긴 족적은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조차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 그녀보다 연약해 보이는 유피테르가 더 강하다고 하니 호기심이 드는 게 당연했다.

“모의전을 치러야 한다고 하셨는데. 꼭 필요하다면 동생이란 하죠. 리나도 좋아할 테니.”

“그 말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학생보다 약하다면 교수로서 가치가 없다. 학장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시잖아요?”

유피테르는 델포이의 일원이라면 공포에 젖을 피티아의 눈빛을 받아넘겼다. 그의 태도는 엄청나게 당돌했다. 델포이의 실질적인 왕이나 다름없는 학장의 앞에서 아직 교수도 아닌데도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배짱은 나쁘지 않군. 썩어도 준치라는 건 이런 거겠네.”

생각 외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피티아는 유피테르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학생회장인 카테리나도 첫 대면에서 잠깐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유피테르는 전혀 그러지 않았으니까. 학장실의 모든 마나가 그를 적대하고 있는데도 끄떡없었다.

‘달의 몰락’을 실질적으로 해결한 마법사라고 들었긴 하지만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유피테르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나름의 평가가 끝난 후 피티아는 이어서 말했다.

“그럼. 네 여동생과 모의전을 해서 그 결과로 단기 교수로 할지 평가하도록 하지.”

“역시 승리해야 교수로 부임할 수 있는 건가요? 이기는 건 쉽긴 한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지.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니까. 승리가 조건일 수도 있고 다른 게 조건일지도 모르지. 그건 그날의 재미로 남겨두지. 날짜는 언제가 좋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상관없습니다.”

피티아는 은근히 유피테르를 떠보았지만, 그는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당장 모의전을 치러도 문제없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피티아는 그런 태도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만심인지 자존심인지는 어차피 결과가 알려줄 테니.

“그럼, 일단 나가서 쉬고 있어. 학생회장은 내용을 이야기해주고 준비시킬 테니. 그동안 델포이 구경이라도 하고 있으면 적당하겠네.”

“알겠습니다.”

최소한 교수로 추천해 준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었다는 생각에, 유피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티아가 그것을 보고서는 옅게 웃더니 다음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에메리아 교수에게 필요한 설명을 듣도록 하세요.”

유피테르는 인사를 하고 학장실을 나왔다.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푸른 머리가 인상적인 한 여성이었다. 단아한 정장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유피테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반갑게 인사했다.

“에메리아 포세이돈이야. 내가 누나 같은데 말을 놔도 괜찮지? 이름은 뭐라고 하니?”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피테르는 선배를 말끝에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교수로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교수직을 얻는 게 확정이 되었다면 이 사람은 직속 선배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다는 게 걸렸다.

“음. 조금 딱딱한 아이구나. 그 아이의 오빠답네.”

에메리아의 지나치게 친근한 태도에 오히려 유피테르가 당황했다. 저 푸르른 머리카락과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으로 리투아 제국 4대 공작가 출신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기에.

리투아의 4대 공작가는 서로 견제를 하면서도 친했지만, 적어도 유피테르의 기억에는 에메리아라는 사람의 정보가 들어있지 않았다. 꽤 사람을 잘 기억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그녀의 얼굴이나 머리카락의 색은 떠오르지 않았다.

때문에 왜 이렇게 친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카테리나와 아는 사이십니까?”

“내가 그 애의 담당 교수였던 적이 있거든. 델포이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알아?”

“이곳에 입학하려고 준비한 적이 있어 대충은 압니다만….”

그가 실종되기 전 파르테논 아카데미와 델포이 아카데미 중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기본적인 제도는 알고 있었다. 입학하려는 곳의 정보를 모를 학부모와 학생이 어디 있는가?

“대충 알아서는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다구. 그렇게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라구 이곳은. 자칫 잘못하면 학생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에메리아는 두려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후, 유피테르를 이끌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둘이 처음으로 간 곳은 위 델포이의 기숙사였다. 산 정상에서 보았던 톨로스와 김나지움은 얼음성만큼이나 빼어난 건축물이었다.

“이곳이 톨로스와 김나지움. 아카데미 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지옥 같은 곳일까? 그래도 건물은 이쁘지? 드워프가 만들었다고 소문이 자자해.”

“드워프요…? 인간과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는 거로 아는데요?”

드워프. 엘프 이 두 종족 역시 잊혀진 시대에는 엄청난 세를 자랑했던 자들이었다. 무기와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엄청난 재능을 가진 드워프와 빼어난 미모와 날렵한 신체 능력을 가진 엘프는 현재에는 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나마 드워프의 일부가 아르메 제국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 뿐이었다. 엘프의 경우에는 완전히 소문조차 없었다. 기본적으로 세아니아 대륙은 남쪽의 인간과 북쪽의 마족이 대립하고 있는 구도였다.

“글쎄, 하지만 이런 장식이나 완성도는 현재의 인간이 낼 수는 없는 거잖아?”

에메리아는 톨로스와 김나지움 곳곳에 있는 동상이나 장식들을 보라고 손짓했다. 유피테르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확실히, 인간이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건축 양식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뛰게 했다.

“그건 그렇네요. 저 옆에 있는 건 기숙사랑 도서관?”

“정확해. 네가 교수가 된다면 저쪽에 있는 교수 전용 기숙사를 받을 거야. 1인 1실이고. 꽤 좋다고 장담할 수 있어.”

기숙사는 꽤 멀리 떨어져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특히, 교수 전용으로 보이는 기숙사의 경우에는 정원도 딸려 있다고 에메리아는 신이 나서 말했다. 유피테르는 델포이의 시설이 만족스러워져서 모의전에서 반드시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한 학기 동안 지내며 마족을 감시해보는 건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음, 다음으로는 어디가 좋을까? 아래 델포이로 바로 내려가려면…. 아, 그래 저것도 설명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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