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아카데미(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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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얼음의 세계
얼음의 세계. 빙결 지옥보다 훨씬 더 윗선에 있는 마법이었다. 사용자를 둘러싼 모든 세계를 얼려버리는 것. 유구하게 흐르는 시간마저도 이 마법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와 대치하던 파론 역시 이 마법의 희생자였다. 심지어 유피테르가 펼친 얼음 나비의 결계조차 얼어붙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이 마법은 그 공간에 있던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들었다.
“끝났나.”
결계가 깨지며 유리 조각처럼 밤바람에 휘날렸다. 잠시 후 얼어붙은 흑색의 까마귀들과 이미 사람의 형태가 아니게 되어버린 파론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족과 계약했던 파론은 깨지지 않는 영원한 얼음상이 되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마법이라는 건가. 흉악한 범죄자 리퍼, 드라큘도 이런 짓을 하지는 못했다고.”
스콜스는 유피테르가 펼친 마법에 공포감을 느꼈다. 부단장이라는 직위만큼 그는 다양한 마법사를 만났고, 지명 수배된 범죄자도 많이 잡았다. 그 과정에서 상상도 못 할 마법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유피테르가 펼친 마법은 급이 달랐다.
그사이 유피테르는 파론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어둠 속성의 마나는 그가 죽인 ‘티폰’의 것과 유사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파멸의 어둠이야말로 티폰이 티폰임을 증명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마족들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티폰의 힘은 강력했다. 물론 ‘그녀’와 유피테르의 앞에서는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신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는 ‘리벨리온’을 자칭하기에 충분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많았지만, 정보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왜 마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티폰의 기운을 받은 자가 나타났는가? 심지어 이 용병은 그들에게 힘을 직접 받았다고 표현했다.
마왕 티폰은 분명히 죽었다. 그날 ‘그녀’와 유피테르 그리고 에키드나가 직접 확인했으니까. 종을 초월한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세 명의 마나 감지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것을 속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신뿐이었다.
티폰을 압도한 힘을 보고서 에키드나는 ‘그녀’의 힘을 이은 유피테르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마왕은 마족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는데 그걸 손쉽게 제압하고 죽였으니까. 티폰 역시 에키드나처럼 고대의 마족 중 한 명이었다.
동시에 그의 힘에 홀려 스토커처럼 따라다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유피테르에 대한 집착은 티폰을 잃은 그 날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에키드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상태를 지닌 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동반자가 마왕 티폰이었다. 티폰이 죽고 나서는 대공의 업무도 내팽개치고, 인간들과 무언가를 준비하며 유피테르에 대한 사랑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키드나에게 뭐라고 할 마족들은 없었다. 그녀는 마계를 주름잡는 7명의 대공 중 하나였으니까.
“스콜스 있나! 있으면 대답해보게!”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어버린 펍에 한 남자가 무장한 마법사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그 남자가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마크는 용병단 단장의 것이 분명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스콜스를 찾아다녔다.
그라면 갑작스럽게 발생한 강력한 마법을 설명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에. 접경 지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경우는 테러일 확률이 높아 비번인데도 빠르게 챙겨입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헨리 단장님 여깁니다.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동료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모닥불을 피운 스콜스는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것을 발견한 헨리 단장은 거침없이 뛰어갔다. 모닥불 가까이에서 냉기를 녹이고 있던 동료들에게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얼음 동상으로 시선이 향했다.
“저건 뭔가 스콜스 부단장. 우리 더비에 저런 동상은 없었을 텐데? 아니 잠깐. 저 얼굴은….”
“맞습니다. 파론입니다 단장님. 정말 무시무시한 일이 있었습니다.”
스콜스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친절한 곰’ 파론은 능력은 부족했으나 성실한 자의 표본이었다. 험상궂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더비 주민들의 일에 열심이어서 호감도가 높았다.
부족한 일 처리로 귀족이나 간부들에게 호통을 듣기도 했지만, 그건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잘못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었으니까.
그들의 눈에 비친 얼음 동상은 기괴했다. 파론임을 알 수 있는 얼굴을 제외하고는 인간처럼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스콜스는 헨리에게 차분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파론이 유피테르라는 귀족에게 시비를 튼 일부터 불길한 어둠의 마나를 사용하고서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일 등을 필요한 부분만 요약해서 보고했다.
“이분이 이 사태를 정리하신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님이십니다.”
잘 알지도 않지만, 어찌 되었든 초면은 아니기에 스콜스가 유피테르를 단장에게 소개했다.
“유피테르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정식 후계자네. 도시에서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군.”
“만드라고라 용병단 단장 헨리입니다. 아닙니다. 저희 단원은 충분히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오셨다고 미리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혹, 시찰이셨습니까.”
헨리는 용병단 단장이라는 직급과는 다르게 꽤나 쾌활한 성격이었다. 고위 귀족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고 속사포로 말을 하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 와중에도 예의는 잃지 않는 모습에서 많은 귀족과 일을 해본 경험이 엿보였다.
“시찰까지는 아니고, 그냥 여행 중이었는데 말이지. 업무를 방해했다니 미안하군. 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예, 얼마든지 명령하십시오.”
아르테미스 공작가의 공식 후계자의 말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헨리는 ‘달의 몰락’ 사건을 알고 있었지만, 그 가문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력한 마법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에서 헨리는 유피테르의 말에 자연스럽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신분에서 나온 것이 아닌. 위엄을 보여주었기에 용병단의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 파론이라는 용병이 쓴 어둠의 마나가 마음에 걸려서, 크레이타에 연락 넣어서 텔레포트 게이트로 얼음 동상 좀 보내줄래? 편지는 써놓을 거니까 보내기만 하면 문제없어.”
“크레이타라면…. 성국이군요. 그 녀석들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사용하게 해줄까요? 신도가 아니면 그 땅에 발조차 디딜 수도 없을 텐데요. 저희가 보내는 걸 받을 리가 없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따로 연락해놓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진상 조사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인데, 유피테르 님께서 대신해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번 일은 단순한 펍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더비의 일부분이 날아갈 정도의 사건이었다. 때문에 용병대 단장으로서 치안 유지대 대장에게 사건 보고서를 올려야 했다. 용병단 단장이라고 해봤자 업무를 위탁받은 것에 불과했으니까.
검은 마나의 정체를 예상할 수도 없었던 헨리에게 그 제안은 가뭄에 단비 같은 말이었다. 특히, 공작 가문 자제의 직인이 찍힌 편지라면 치안 유지대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제국에 속한 치안 유지대가 용병단보다 훨씬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딱히 대항할 수단이 없었는데 후계자가 직접 명령을 내려준다면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소집한 용병단 단원들에게 상황을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사건 청취를 위해 유피테르와 스콜스를 기지로 안내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 파론이 말이요 단장. 그 파론이 마법을 사용했다니까요? 뭔가 칙칙한 검은색의 마나가 파론을 둘러쌓더니 몬스터처럼 변해버려 엄청난 힘을 사용하더라구요.”
“그게 마족의 계약이다. 마족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검은 마나는 마족의 기본적인 형태니까. 계약을 통해서 반마족으로 변하는 사례가 보고된 적이 많으니까. 저 동상을 보내면 성국이 정확히 답변해줄 거다.”
“그, 그래요. 저 반마족? 이라는 형태가 되어서 엄청난 마법을 쏘아대는데 아르테미스의 후계자님께서 손쉽게 막아내셨다니까요. 와 그걸 보고. 역시 공작 가문의 후계자시다. 이 말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주로 스콜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유피테르가 덧붙이는 식이었다.
조사가 끝나고 유피테르는 성녀 프레이야에게 직접 편지를 쓰고나서 아르테미스 가문의 인장으로 단단히 봉해 헨리에게 넘겨주었다. 헨리는 그 편지를 소중히 품에 넣고 확실히 명령을 처리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혹시 이 시간에 하는 맛집 있어? 지금은 무너진 펍의 맥주랑 치킨은 정말 맛있더라. 주인장한테 혹시 지점 낼 생각 있으면 아르테미스 가문에 내 이름 대고 투자 상담받으라고 해.”
저녁을 만족스럽게 먹지 못했던 유피테르는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 생각되는 헨리와 스콜스에게 맛집을 물었다.
“이 정도의 소란이 있어서 연 곳은 없을 겁니다. 혹시, 어느 여관을 잡으셨습니까?”
“아, 푸른 소나무인가 하는 곳이었는데. 시설이 제일 괜찮더라고. 이름이 대체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곳이라면. 지금 시간에도 간단한 식사를 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주인의 요리 맛이 기가 막히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고마워. 그럼 돌아갈게.”
헨리가 유피테르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해주었다. 유피테르는 더 볼 일이 없으면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말하고는 용병단 건물에서 유유히 떠났다.
“재밌는 분이시네. 아르테미스 가문의 후계자님은 전혀 귀족 같지 않은데. 저런 귀족이라면 같이 일하고 싶을 정도야.”
“저분이야말로 진짜 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장님.”
그리고 남겨진 둘 역시 유피테르의 매력에 빠져버린 듯, 유피테르를 칭송했다. 그 후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할 건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주인장에게 보상할 방안 등 해야 할 일이 넘쳐났으니까.
“돌아가면 딸들한테 욕 좀 먹겠는걸.”
“어차피 늘 이런 식이지 않습니까. 인제 그만 익숙해지는 게 어떠세요?”
이런 식으로 여러 도시를 지나오는 여행을 계속한 끝에 유피테르는 아르메 제국에서 특별히 교육 도시로 조성한 파르나소스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가 새로 일할 곳이 바로 저곳에 있는 델포이 아카데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