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도 포기한 대공자-54화 (54/265)

델포이 아카데미(5)

* * *

거대한 산마저 단칼에 자를 수 있을 것 같은 내려 베기가 유피테르의 머리에 그대로 직격했다. 그 안에 실려있던 어두운 기운은 공간 자체가 베어진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베어버린 것뿐임에도 유피테르가 있던 자리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바뀌었다.

‘정말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수도.’

그 위력을 보고서 스콜스는 파론이 가지게 된 힘이 보통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기억하던 원래 파론의 경지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이미 죽었겠군. 나를 상대로 만난 게 잘못이었다. 어린 귀족 놈.”

파론은 폐허가 되어버린 펍 안을 둘러보며 우쭐했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힘만 있으면 자기를 무시했던 모든 자를 원하는 대로 벌할 수 있었다.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면 안 되지. 고작 이 정도의 마나로 신탁이니 뭐니 말하면 성국 아저씨들이 잡아가. 그 사람들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성녀가 와서 검으로 베어버린다고.”

파론의 확신과는 다르게 유피테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공격을 당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한 손에는 닭 다리 튀김을 다른 손에는 맥주를 들고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나온 요리를 아깝게 놓칠 생각이 없었다.

“진짜 맛있네. 치킨이라는 이 튀김 정말 환상적이야.”

“아니, 거짓말이야. 이럴 수는 없어! 난 신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어. 그들이, 그들이 내게 힘을 약속했다고! 끝을 모르는 무한한 힘을 말이다.”

파론은 그런 유피테르의 모습을 보며 현실을 부정했다. 그들이 약속한 힘은 고작 여리여리한 귀족 하나를 없애지도 못할 힘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약해 보이는 귀족 하나 잡지 못한다면 그의 복수는 시작하기도 전에 결말을 볼 테니까.

“아니. 이게 맞아.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누가 그 힘을 줬는지 대충 예상이 가는데. 이런 장난을 치다니, 아직 혼이 덜 났나 보구나.”

“너 따위가 신과 같은 힘을 지닌 그들을 안다고? 그런 허풍을 떨어봤자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곧 내 손에 죽을 테니.”

“자꾸, 신. 신하지 말라니까? 듣는 신이 기분이 나쁠 수도 있잖아? 아, 내 소개를 안 했네. 내 이름은 유피테르. 유피테르 아르테미스야.”

유피테르는 파론이 노려보는 것을 무시하고 로브를 내려 담담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귀족이라면 자신의 이름과 가문 명을 밝히는 것이 자랑스러울 텐데, 그에게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대공자시라고?”

전투를 지켜보던 스콜스는 유피테르의 오만하지 않은 모습에 놀랐다. 그가 지금까지 부단장으로 만나왔던 여러 귀족은 신분에 대한 의식이 확고했다. 단장 역시 귀족을 응대할 때는 최대한 조심하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공작 가문의 대공자가 저렇게 소탈하다니. 권위 의식이라는 게 희박한 사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로브가 벗겨진 후 드러난 유피테르의 모습은 같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스콜스는 리투아 제국의 몇 대 미녀라고 소문난 자들도 멀찍이서 보았지만, 감히 저 귀족과 비교하기에는 실례가 될 것 같을 정도였다.

“유피테르…. 아. 유명했던 마나도 못 쓰는 아르테미스의 대공자인가? 돌아왔다는 사실은 들었지. 그래. 아르테미스 그것도 대공자라면 신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데 아주 만족스러운 첫 번째 제물이 될만하지.”

파론은 그렇게 선언한 뒤. 어둠의 검에 마나를 가득 불어넣고 다시 한번 유피테르에게로 쇄도했다. 그 움직임에는 어둠의 마나에 대한 믿음만이 가득했다. 그가 보내는 신뢰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어둠의 마나는 무한히 그를 축복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는 게 어떨까? 신이 기분 나쁘다고 하잖아. 귀족 사칭보다 신을 사칭하는 게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으려나. 그 모습을 보니 제대로 이야기도 안 될 거 같긴 하니. 빠르게 끝내줄게.”

파론에 맞서 유피테르도 마나를 충분히 끌어 올렸다. 유피테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했다. 방어에 전념할 수도 있었고 더 강한 공격으로 맞받아칠 수도 있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냐에 따라서 전투의 흐름이 바뀔 수 있었다. 마법사들 사이의 전투에서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으니까. 아르테미스 마법사단이 극한의 상황을 만들어 훈련하는 것도 이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유피테르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는 듯, 고민하지 않고 바로 시동어를 읊으며 얼음 속성의 마법을 사용했다.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빙결 지옥

유피테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마나가 온 세상을 얼릴 듯한 기세로 냉기를 퍼부었다. 어디서부터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부터 달려오는 파론과 그가 내뿜는 어둠의 마나 조차 꽁꽁 얼려버렸다.

어둠의 검으로 찌르기를 시도하려고 했던 불쌍한 파론은 중간 지점에서 얼음 동상이 된 채로 죽어있었다. 신에게 받았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었지만, 실시간 냉동실에 들어간 용병에게서 어둠 속성 마나의 기운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파론을 얼린 마나의 기세는 도통 멈출 줄을 몰랐다. 도저히 원래 상태를 알아볼 수 없는 펍의 잔해는 모두 얼어붙었으며, 얼마나 단단하게 얼었는지 망치 대신 못을 박는 데 써도 될 정도였다.

“그만, 그만해주십시오. 유피테르 님.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쇄도하는 마나의 기운이 용병단 동료들에게로 향하자, 스콜스는 유피테르에게 간청했다. 파론을 제외한 동료들은 죄가 없었으니까. 퍼스트 서클인 그가 보기에 저 얼음 마법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아, 맞아. 저들은 죄가 없지.”

유피테르는 스콜스의 애원을 들어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취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마나는 파론의 영혼이 이곳에 없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대량 살상 마법인 빙결 지옥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유피테르가 마법을 해제하는 것을 본 스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동료들에게로 달려가서 상태를 확인했다. 지독한 살기가 느껴지는 어둠의 마나와 보기만 해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았던 얼음 속성의 마나의 충돌에도 동료들은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그 순간.

파론 식 어둠 마법 ― 칠흑의 검

파론이 얼음을 부수고 튀어나와 유피테르에게로 향하며 검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중 가장 사악해 보이는 어둠의 기운이 담긴 검은 유피테르의 심장을 향했다.

“이건 좀 위험했네?”

시동어도 없이 펼쳐진 방어막에 어둠의 검은 막혔다. 유피테르는 싱긋 웃으며 검을 내지른 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음 마법을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닌 듯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었다. 파론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듯 보이는 칠흑의 마나가 강제로 육체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크르르르…. 죽인….”

“아니, 사람 말을 해야 알아듣지. 그래도 시동어는 잘 말하던데 말야. 일단은 증거를 좀 확보해야겠네.”

유피테르 식 특제 마법 ― 얼음 나비의 꿈

마법이 결계처럼 넓게 펼쳐져 유피테르와 파론을 가두었다. 어둠 마법은 심각한 독과도 같았다. 닿기만 해도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했으니까. 푸르게 빛나는 나비들이 결계 속에서 유유히 날아다녔다.

파론은 결계가 펼쳐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결계에 갇히면 뭐하나 좋을 것 없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귀족의 마법을 돌파해냈으니까 말이다.

“덤벼봐. 마족의 개.”

“감히 그분들을 모욕하다니.”

그랬다. 어둠 마법과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종족은 마족밖에 없었다. 마족은 계약을 통해 마나를 넘겨줄 수 있었다. 계약자의 원래 상태가 어떻든 전혀 문제가 없었다. 칠흑의 마나란 그 모든 법칙을 녹여버리는 독이었으니까.

파론 식 어둠 마법 ― 검은 개의 행진

개라고 불렸던 탓일까. 파론의 다음 공격은 엄청난 수의 흑색의 개들을 소환해 무작정 돌격시키는 거였다. 마치, 아르테미스의 마법사들이 얼음 화살이나 창을 날리는 것과 비슷했다.

마족에게 받은 거로 추정되는 무한한 마나가 그 검은 개들의 바탕이 되어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수가 모였다. 결계 밖에서 동료들을 구출하던 스콜스는 파론의 마법을 입을 벌리고 볼 뿐이었다.

그건 부단장에게도 불가능한 영역이었으니까.

“해, 해치웠나.”

“설마? 마족의 힘을 받고도 이렇게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니 정말 실망이라고.”

유피테르 식 얼음 마법 ― 얼음 창

유피테르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개들의 수와 비슷할 정도로 많은 얼음의 창을 만들어 그대로 격돌시켰다. 상대방이 힘 대결을 원하는데 도망칠 리 없었다. 힘으로 압살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기도 했고.

상대방을 중독시키는 어둠의 마나와 모든 걸 얼려버리는 얼음의 마나가 그대로 충돌했다. 특성에 맞게 결계 곳곳에 땅이 얼어붙었고 어둠 마법에 의해 땅이 죽어가고 있었다. 두 마법사들의 대결에 고통받는 건 오직 땅과 조금 남은 펍의 잔해들이었다.

“좀 하는 걸 어린 놈. 신들의 마법에 이 정도로 대응할 수 있을 줄이야.”

이만큼이나 마나를 썼는데도 파론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그저 잘린 팔을 만들어주던 검은 기운이 온몸으로 조금씩 퍼져나갔을 뿐. 그 때문에 조금 무서운 외관이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프레이야에게 같이 여행하자고 했으면 한 방이었을 텐데. 귀찮네. 어중간하게 마족이 돼서는 말이야.”

유피테르는 성녀와 함께 여행했으면 편했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성녀는 세아니아 대륙에서 지니고 있는 위치도 높았지만, 마족을 상대하는데 신성 마법만큼 뛰어난 효과를 보이는 건 없었기에. 물론 그도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귀찮았다.

지금 파론의 상태는 어중간한 마족이었다. 마족가 계약을 한다고 전부 반마족이 되는 건 아니었다. 카르멘의 경우처럼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파론은 어둠의 마나를 받아들여 반마족의 상태가 되었다.

“빨리 죽어라. 귀족 놈!”

파론 식 어둠 마법 ― 밤까마귀

검은 개의 형태로 모였던 어둠의 마나가 이번에는 까마귀의 형태로 모였다. 흉측한 몰골의 까마귀들이 까악―하고 울부짖으며 유피테르를 노려보았다. 붉은 안광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계속 같은 패턴이면 안 되지 않을까?”

유피테르는 같은 패턴에 두 번 연속으로 당하는 그런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가 볼 때 파론은 제어하지 못하는 힘을 가진 갓난아기 수준이었다. 상상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어떠한 식으로 마법을 써야 할지 잘 모르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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