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아카데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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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피테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결판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파론을 조롱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험상궂은 용병은 몇 번이고 시비를 걸었으니까. 한 번은 봐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어떠한 강력한 마법보다 파론의 심장에 제대로 박혀 들어갔다. 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깎아내리며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파론이 가지고 있는 단 하나의 자존심.
그것은 더비에 작은 부분이나마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든지 전쟁이 날 수 있는 상황에서 주민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치안 유지대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파론과 유피테르의 싸움을 펍안의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별거아닌 시비에서 이어진 간단한 주먹다짐이었지만, 언제라도 전투로 바뀔 수 있었으니까. 여유로워 보이는 여행자와 다르게 파론은 진심으로 보였다.
여행자와의 싸움은 중년이 되어버린 파론의 몸에는 큰 무리를 주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손에 잡힐 듯해서 쉬지 않고 마나로 몸을 자극했기에 반동이 오고 있었다. 몸이 점점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느끼며 파론은 유피테르를 욕했다.
“어린놈의 자식이, 가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티를 내는구나.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치더냐? 나이를 코볼트처럼 무시하라고? 아, 떠돌아다니는 걸 보니 어머니가 없을 수도 있겠군.”
파론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펍 안이 조용해졌다. 이전과는 소리 없는 공포감이 그곳을 지배했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살기가 유피테르에게서 흘러나왔으니까.
“넌, 절대로 언급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그러니 지금부터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아르테미스의 이름으로 널 단죄할 것이다. 자비를 바라지마라.”
아르테미스.
그 단어가 주는 두려움은 어마어마했다. 더비 시를 지배하고 있는 시장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진정한 이 지역의 지배자였으니까. 몇십 년 전 전쟁이 발생했을 때 보여준 아르테미스 가문의 마법사들이 보여준 힘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 가문에 속해있는 마법사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같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무서운 마법사들이 아군이었기에 주민들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아르… 테미스? 귀족, 그것도 공작 가문이 여길 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지배당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지 깨달은 파론이 중얼거렸다. 아르테미스 가문은 공포의 이름이라는 걸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라도 사과할 마음이 들었나?”
유피테르는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를 내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이었다. 아니, 그 누구라도 가족을 욕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달의 몰락 이후 얼음성에서 가족과 있던 시간은 그에게 가족이란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유피테르가 평범한 귀족이 아닌 아르테미스 가문이라는 걸 안 주인장은 머리를 쥐어뜯었고, 구경하던 펍 안의 일반 주민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싸움을 웃고 떠들 수 있는 안줏거리로 삼기에는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지진이 나기 전에 작은 동물부터 빠르게 알아채는 것과 같았다.
파론과 같은 소속인 용병들은 상황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막고자 자리에 남았다. 이대로 파론이 죽는다면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몇십 년을 함께한 동료였지 않은가.
“귀족님. 저놈이 뭘 몰라서 그런 겁니다.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면 안 되시겠습니까?”
“저 녀석이 소속되어 있는 용병단의 부단장 스콜스입니다. 용병단 내에서 강하게 처벌할 테니. 자비를 베풀어 주십쇼. 아르테미스 님.”
용병 동료 한 명과 자신을 부단장이라고 밝힌 스콜스는 유피테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귀족이 평민을 지키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맞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상황일 경우였다.
지금처럼 평민이 귀족을 그것도 귀족의 가문 전체를 욕보인 상황에서 살아남기란 어려웠다. 같은 평민끼리라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는데, 파론은 그 선으로 줄넘기를 한 셈이니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도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였다.
이쯤 되자 파론도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자신이 죽게 되면 가족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맞벌이가 아니어서, 벌어오는 돈이 없게 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아직 한창 성장해야 하는 아이들은 굶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아내는 힘들게 자리 잡은 이곳에서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만 했다. 아이들을 키우고 생활할 돈이 부족하니까.
그뿐만 아니라 더비에서 자신의 가족들은 쫓겨날 게 분명했다. 귀족의 가문을 모욕한 자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은 없었다. 너무나도 무서운 귀족 가문의 화를 같이 짊어줄 착한 사람은 동화에서나 나올 이야기였다.
“귀족님. 저에게는 토끼 같은 자식과….”
“여우 같은 아내가 있다고 말하려는 거면 너무 상투적이어서 실망이 큰걸? 조금 더 머리를 써봐. 그리고 가족이 소중하다면 다른 가족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 아닐까? 공평하지가 않잖아. 네 말은.”
유피테르는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놓는 파론의 말을 단칼에 쳐냈다. 화가 나긴 했지만, 감정에 휘둘리는 모습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파론의 목을 베어버렸을 것이니까.
그는 빼앗은 검을 돌리며 파론이라고 불린 용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착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좀 해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르테미스 가문은 적이 순식간에 늘어난 상황이었고, 더비는 아르테미스 영지 중에서도 중요한 곳이었다. 가족을 욕한 파론이라는 자가 부단장이 직접 나서서 용서를 구할 정도로 평소에는 인망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유피테르는 단순한 아르테미스 공작 가문의 일원이 아닌 ‘가주’로서 판단해야 했다. 적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주는 것과 가문의 모욕을 없애는 것 중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니, 어린놈아?”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용서를 구하던 파론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렸기 때문에. 그는 무언가의 계시를 받은 사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서서 유피테르에게 삿대질했다.
“파론. 자네 정말로 돌았나? 평소에는 그러지 않은 사람이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거야?”
“원로로 대접해주니까. 정말로 뭐라도 되는 줄 아나 파론? 자네가 성실해서 그동안 데리고 있던 것일 뿐이다. 부단장의 권한으로 오늘부로 자네는 우리 용병단에서 퇴출이다.”
파론이 그야말로 날뛰는 것을 보고는 동료들은 말리기를 포기했다. 부단장 스콜스는 감히 귀족에게 덤빈 그를 용병단에서 제외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파론의 생사여탈권을 유피테르에게로 넘긴 것이다.
펍 안에 남은 그 누구도 파론을 도와주거나 구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귀족이 무섭기도 했고 파론의 태도를 보면 절대로 도와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옹호해주는 마지막 편이 사라졌음에도 파론은 웃었다. 심지어 내일부터 백수로 살아가야 하는데도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친 듯이 웃는 모습에 동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과 함께 겁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에서는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광기가 느껴졌으니까. 마치, 마족처럼.
“죽여달라고 간청을 하는군. 후회하지 마라. 네가 자초한 일이야.”
유피테르는 파론에게 천천히 다가가서는 빼앗은 검을 높게 들고서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예술이었다. 속도감 넘치는 검에 파론의 목이 날아갈 게 뻔해 모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파론은 오랜 기간 같이 근무한 동료였으니까.
놀랍게도 파론의 목은 날아가지 않았다. 손에 느낌이 확실히 왔지만, 잘린 것은 파론의 왼팔뿐이었다. 평소 검을 잘 관리했던 거로 보이는 만큼 날카로운 날이 실수할 리가 없었다.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쳐야 할 게 분명할 파론은 아직까지도 웃고 있었다. 깔끔한 실력으로 팔을 잘라 아픔도 느끼지 못하나?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할 정도로 크고 괴기스러웠다.
그는 남은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난 하등한 너희들과는 다르게 신탁을 받았다. 어리석은 인간들을 청소하라는 진정한 신의 목소리를 말이야.”
조금 전까지 제대로 마나를 사용하지도 못했던 파론의 주위에서 강력한 마나가 꿈틀거렸다. 퍼스트 서클에 도달하지 못해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던 게 다였던 그의 마나에 명확한 ‘특징’이 나타났다.
그에게 깃든 힘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어둠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은 강화 마법이 곳곳에 설치되어있던 펍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 여파로 지붕이 녹듯이 사라져버려 차가운 밤바람이 유피테르의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파론은 그 어두운 기운을 가지고 잘린 왼팔을 복구했다. 어둠을 잔뜩 머금은 마나가 팔을 대신해 그의 명령을 따랐다. 파론은 그렇게 만들어진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피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고선 생각대로 잘 움직이는 팔과 손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힘만 있다면 자신이 꿈꿔왔던 복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재능이 없다고 자신을 업신여긴 용병들 귀족들에게 말이다.
하찮은 재능으로 성실하지 않은 멍청이들에게 굽신굽신하는 삶은 너무나도 지겨웠다. 착하게 살아온 대가가 고작 이것뿐이라면, 이딴 삶에 미련은 없었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세계가 그릇되어 있는 것이었다.
시대를 호령하는 진정한 악이 되어 그릇된 정의를 박살 내줄 테니까.
“재미있네? 그 힘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을 것 같은데. 어둠 속성이라…. 누구한테 그 힘을 받았는지 대답을 좀 해주실까?”
“웃을 때가 아닐 텐데? 어린 귀족아. 신이 준 이 힘의 첫 제물을 너로 해주마. 영광인 줄 알아라. 감히 나를 버린 빌어먹을 용병단 자식들은 그다음이야. 후후.”
파론은 정 많은 곰의 칭호를 완전히 버려버린 건지 웃음조차 악당 같았다. 파론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는 고양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마나는 그들이 약속했던 것과 같았다.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당연히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봐야지 않는가?
파론은 어둠으로 만들어진 손을 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검에서는 보기만 해도 불길한 마나가 흘러나왔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부정한 기운에 주변에 있던 용병들은 이미 제정신이 유지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나마 스콜스라고 이름을 밝힌 용병단 부단장 정도가 간신히 버티고 서서 이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파론은 힘들어하는 스콜스를 보며 비웃더니, 엄청나게 높게 도약해 유피테르를 내려찍었다.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고개가 아플 정도의 높이와 굉음을 남길 정도의 속도가 추가되자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탈바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