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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포기한 대공자-52화 (52/265)
  • 델포이 아카데미(3)

    * * *

    귀족이라는 것만 들키지 않는다면 이미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미 정의는 유피테르에게 있었으니까.

    순간적으로 끌어 올려진 마나가 파론에게로 향했다. 한 사람에게만 부담을 주는 정확한 마나 지배력에 파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건 너무나도 위험한 느낌이었다. 파론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파론을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주인장이 내온 요리였다.

    “주문하신 닭튀김과 맥주 나왔습니다. 이 튀김은 저희 더비에서는 치킨이라고 부릅니다.”

    주인장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닭튀김과 맥주를 유피테르의 앞에 내려놓았다. 요리사가 갓 만든 따끈따끈한 튀김은 바삭바삭한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살얼음이 동동 띄어진 맥주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기분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는 펍에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로 인한 싸움은 늘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주인장은 펍 안의 곳곳에 강화 마법을 사용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아는 마법사를 통해서 지인 할인을 받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싸움이 벌어질 거라면 그걸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싸움을 안주로 술을 더 팔고, 수리비는 청구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런 확신은 사업 성공으로 이어졌다. 펍을 찾은 손님들은 처음에는 싸움을 싫어하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구경거리로 정착되었으니까.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며 펍으로 몰려드는 손님들로 인한 매출은 강화 마법 비용을 채우고도 남았다.

    이 신비한 여행객과 파론의 시비로 오늘 장사도 성공적이라는 것을 주인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더 젓는 방법을 모르는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눈치를 줘 심각해지기 전에는 막지 말라고 했다.

    정 많은 곰 파론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이 사실은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고 주민들의 이목이 펍으로 쏠리는 건 당연했다. 파론은 늘 싸움을 말리거나 제재를 가하는 치안을 지키는 용병대의 중견이었으니까 말이다.

    “치킨이라고 했나. 차가운 맥주에 정말 잘 어울리는걸? 특히, 남녀노소 빠질 만한 맛이야. 사업을 확장해 볼 생각 없나 주인장?”

    유피테르는 먹음직스러운 치킨을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한 튀김옷에 숨겨져 있던 육즙이 입 안 가득 넘쳤다. 몇 개를 먹다 보니 느끼함이 있었지만, 시원한 맥주는 그것을 깨끗하게 없애주었다.

    이건 돈이 된다. 먹는 순간 유피테르는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음성 복구 비용이 꽤 부족했는데 치킨을 통해서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주로 인정받은 그에게는 충분한 권한이 있었다.

    시비를 걸던 용병을 혼내주려고 했지만, 일단 이것부터 다 먹고 나서 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맛이었다.

    “나쁘지 않군요. 비율은요?”

    주인장 역시 장사를 하루 이틀 한 사람이 아니라 노련했다. 여행자의 말에는 신뢰를 주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의심하기 전에 먼저 정산 비율을 확인했다. 장사꾼이란 밑지는 법이 없었다.

    “5대 5로 하는 건 어떤가?”

    유피테르는 협상의 정석대로 거래를 시도했다.

    “7대 3. 그 이하로는 뭘 해보려고 한들 의미가 없을 겁니다.”

    주인장은 쉽게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갑(甲)은 그였으니까. 유피테르는 사업상의 파트너에 불과했다.

    “6대 4 나도 이 정도 이상은 포기할 수가 없는걸.”

    “그건 조금 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전 이곳의 가게만 운영해도 행복합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얼굴에서 웃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걸? 지금이라면 황실에도 진상할 수 있는 권리를 줄게.”

    유피테르가 새롭게 내민 카드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더비에서 황실과 수도란 별 처럼 많은 소문이 도는 곳이지만 동시에 별처럼 멀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제국 변방 개척 도시임에도 더비의 주민들은 수도의 소문에 오히려 민감한 편이었다. 도시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황도의 이야기는 충분히 화젯거리가 되었다.

    “고작 여행자가 황실에 연결시켜줄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겁니까. 너무 사기의 냄새가 짙은 것 아닙니까?”

    “기회란 건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지, 한 번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중에 가서 후회해도 난 모른다?”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유피테르의 말은 정확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지나치게 파트너를 의심해서 사업 확장에 실패한다면 장사꾼의 역량을 의심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진짜는 모두가 알아보는 법이니까.

    “아앙…. 거기 여행자. 분위기는 한껏 잡아놓고 설마 쫀 거냐?”

    주인장이 유피테르의 제안에 고민하고 있을 때, 용병 파론이 불같이 화를 냈다. 사실, 순간적으로 바뀐 존재감에 숨을 참은 건 그였다. 치안대의 일원으로 근무하며 위험한 범죄자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쫄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을 속이려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큰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밥 먹을 때에는 몬스터도 안 건드린다는데 말이지. 교육이 덜 된 게 사실인가 보군.”

    한 번은 참아줬지만 두 번은 그럴 수 없었다. 힘의 차이를 보여주었는데도 덤비는 어리석은 자에게 친절할 만큼 유피테르는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나를 내뿜으며 파론을 위협했다.

    “흥, 그래서 어쩔 거지? 일어서서 분위기 잡으니까 뭐라도 된 것 같지, 어린 귀족 놈아?”

    파론은 유피테르가 내뿜은 마나에 공포감을 느꼈지만, 기세를 잃지는 않았다. 선공을 때린 건 두말할 필요 없이 그였으니까. 앞으로도 더비의 치안을 유지하는 용병으로 계속 있기 위해선 적어도 여기선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되었다.

    생각보다 강한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싸움은 기세에서 밀리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헤라클레스 식 강화법 ― 메르카르트

    “어디 큰소리칠 실력은 있는지 볼까. 엄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었다는 건 충분히 강하다는 증거 아니겠어?”

    유피테르는 마나로 육체를 강화해 파론의 뒤를 잡았다. 던전에서 리치도 압도했던 바로 그 마법이었다. 헤라클레스의 마법식을 유피테르가 재해석한 특제 강화법은 이번에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헤, 헤라클레스 가문이냐. 역시 귀족이었구나!”

    파론은 예상지 못한 속도로 움직이는 그를 느끼지도 못했다. 다만, 시동어를 듣고 그가 헤라클레스 가문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등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자 몸이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방어 자세의 기본.

    그건 항상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 드는 것이었다. 평생을 함께한 검이 있다면 어느 공격이라도 죽지 않고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퍼스트 서클을 각성하지도 못한 그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매일같이 훈련했다.

    재능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고, 아버지가 물려준 검과 함께 꾸준하게 노력했다. 재능이 없는 제로 서클이라도 마나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쯤은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소문으로만 들었던 헤라클레스의 그것과는 레벨이 달랐지만.

    이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이었으며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였다. 그래서 파론은 그 검에 루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명검이 아니더라도 소중한 검에 이름을 붙여주는 건 절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가족 같은 강아지나 고양이나 항상 타는 말에게도 평범하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허리춤을 쳐다보아도 검집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을 뿐, 루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파론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어디다 풀어두었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술을 마실 때도 루인은 왼쪽 허리춤이라는 지정된 자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용병의 마음가짐은 자신의 무기를 아무렇게나 풀어놓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아, 혹시 이걸 찾아?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언제 알아차리나 궁금했어.”

    그 말에 떠오르는 게 있어 파론은 유피테르를 쳐다보았다. 여행자의 손에는 자신의 애검 루인이 놓여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편이었던 루인이 빌어먹을 귀족의 손에서 빙그르르 돌아가고 있었다.

    “그, 그. 그걸 어째서 네가 갖고 있지! 비겁하게 무기를 빼앗는 거냐. 어린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그런 식으로 싸우다니.”

    “비겁은 가만히 있던 사람한테 맥주잔을 던진 것을 뜻하는 단어가 아닐까? 안 그래 여러분?”

    이미 펍 내의 분위기는 유피테르 쪽으로 절찬리에 기울고 있는 중이었다. 파론이 더비에 있어 중요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오늘 같은 상황에서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잘못한 게 누구인지 뻔히 보였으니까.

    파론은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 펍 안의 사람들에게 살짝 배신감을 느꼈다. 이곳에는 그가 속해있는 용병단의 동료들이 있었으며, 일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를 해주던 주민들도 있었다.

    게다가 이 펍은 파론과 용병단이 주 고객이라고 할 정도로 자주 오는 곳이었다. 단골손님인데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주인장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이 펍에서 쓴 돈은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애검 ‘루인’을 뺏어간 여행자부터, 자신을 범죄자처럼 쳐다보는 펍안 사람들의 눈빛까지 그야말로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자식이. 그 검을 어서 내놔! 정말로 피를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평민이라고 무시하는 거냐?”

    “태도가 많이 불량하시네. 그런 태도로 주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겠어? 이런 사람이 한 도시의 치안을 책임진다니. 그러니 아직까지도 용병에 머무르는 것 아닐까.”

    유피테르는 검을 빼앗으려는 파론의 공격을 손쉽게 피하면서 계속 놀렸다. 냉정하지 못한 파론의 움직임은 직선적일 뿐이어서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파론은 근무 기간은 길었지만, 딱히 재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용병대가 아닌 치안 유지대 내에서는 그럴듯한 직책 하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바로 이 점을 유피테르가 정확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용병대는 치안 유지대의 지원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제, 젠장.”

    유피테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파론은 화를 주체할 수 없었다. 유피테르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거리감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소중한 애검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결코 그 간격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 간격도 완벽하게 넘지 못하다니, 좀도둑만 잡으셨나 봐. 언제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아르메 제국과의 경계에 있는 용병이 고작 여행자 하나 잡지 못하다니. 이런 식으로 선량한 사람을 겁박하고도 이기지 못하면 걱정될 수밖에 없지? 아아. 더비는 정말로 안전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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