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아카데미(2)
* * *
늘 그랬다.
귀족 놈들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치안 유지라는 일은 어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많았다. 물론, 지금의 더비는 옛날 무법자의 도시라고 불릴 때보다는 많이 나아져서 일하기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가족들을 데려와서 평생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위험한 도시에 소중한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이곳은 입으로 담기도 어려운 온갖 범죄의 온상이었다.
리투아 제국의 법은 사형도 바로 집행할 정도로 꽤 엄했지만, 근처에 있는 아르메 제국으로 도망가버리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리투아 제국은 도망친 일개 범죄자를 찾기 위해 그 정도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물론, 수배령은 내리긴 했지만, 이곳은 ‘마법’이란 이름의 기적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모습을 바꾸길 원한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그 소원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골치 아파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해를 본 주민들에게 보상해야 하는데, 윗대가리들은 보상금을 주기 싫어했고, 가해자들은 도망쳐버려서 소재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되면 중간에 낀 치안 유지대의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게 되었다.
힘이 든다고 해서 눈물로 지새우는 피해자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양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용병 일을 하기 위해 양심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털과 구멍이 송송 났을 뿐 양심 자체가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적어도 아이들과 아내에게는 멋진 아빠로 보이고 싶었으니까. 손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마음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아, 귀족이 마음만 먹는다면 일이 좀 더 편해질 텐데.”
용병은 유피테르의 반응이 약하자, 좀 더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그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놀고먹는 귀족들은 이 말을 가장 싫어했었다.
그는 귀족들이 제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여러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귀족 중에는 조디… 뭐라고 하는 최강의 마법사도 있었고, 보유하고 있는 자금도 충분했다. 그걸 활용한다면 포션 부족이나 시설 노후화 등의 간단한 문제는 바로 해결할 수 있었다.
“역시, 귀족 나리. 언제 잘릴지 모르는 용병 따위와는 말을 섞지도 않네?”
주변에서 같이 술을 마시고 있던 동료들이 그를 말렸지만, 용병은 거침없었다. 아직 8시 정도로 그렇게 술에 취할 시간은 아니었다. 용병의 주량을 생각한다면 지금 마신 것은 오우거가 쥐 한 마리를 잡아먹은 정도일 뿐이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어이, 파론 씨 그만둬. 상대는 아무리 봐도….”
“그래, 저 사람은 잘못도 없잖아.”
파론. 그게 중년 용병의 이름이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동료들과 주민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오랜 기간 근무하기도 했고 누구보다 이 더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와 술을 마시고 있던 친구들, 동료들은 계속해서 그를 말렸다. 여행자는 아무리 봐도 귀족이라고 생각되었고, 이 제국은 귀족과 평민의 거리감이 엄청났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화를 입게 되는 건 파론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고작 이런 일로 더비의 친근한 아저씨인 그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놔, 놓으라고! 이 용기 없는 자식들아. 어이 거기 너. 내 말이 안 들려? 귀가 먹은 거야 뭐야?”
파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피테르에게 시비를 걸었다. 지금 파론에게 눈에 보이는 것 따위는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의해서 강제로 감정이 지배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저 여행자를 괴롭히고 싶다는 가학심이 끌어 올랐다.
아니, 저 여행자가 비굴해진 모습을 꼭 보고만 싶었다. 로브를 쓴 귀족같이 보이는 자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의 목소리가 그를 유혹했다.
화를 내라. 넌 그럴 자격이 있다. 더 분노해라.
“설마 저를 부르시는 건가요. 무언가 용건이라도 있으시면 공손하게 하셔야지요. 약해 보인답니다. 용병이 그런 식으로 보이시면 안 되겠죠?”
그의 말투 속에는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 수 있을 만큼 가시가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이미 선을 넘었지만, 한 번쯤은 봐주겠다는 그런 의미가 담긴 경고. 이 이상 선을 넘는다면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유피테르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다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 있었지만, 사람 사는 분위기가 제대로 났으니까. 경계 수준과 치안도 나쁘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사 먹었던 간식들도 새로운 맛이었다.
몇몇 교육해야 할 대상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얼음성에서도 쳐내야 할 자들이 꽤 많았으니까.
“그래, 너. 비실비실하게 생겨서는 말이야. 귀족이냐? 어. 귀족이면 귀족답게 황도에서나 지내라고. 왜 여기저기 다니는 거야 귀찮게.”
사실, 귀족이라고 해서 전부 포악하거나, 영지민들을 수탈하거나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자들이 더 많았다. 정확히는 영지민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이익을 불리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 방법이 조용하고 뒷맛이 깔끔했으니.
게다가 카르멘이 끝까지 조심했을 정도로 황실은 무능하지 않았다. 황실의 무력과 정보력은 귀족들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리투아 제국 초대 황제의 유언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으니까. 현 황제는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혁을 원하는 자였다.
유피테르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왜 시비를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람에게 좋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신분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귀족에 대한 반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경계 도시인만큼 아르테미스에서 꽤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을 텐데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 인성에 문제 있는 거야? 주변에서 말리는 거 안 보이나. 그쯤이면 그만하고 술이나 먹으시지?”
유피테르의 그 말은 파론의 화를 터트리게 할 기폭제가 되었다.
“아앙? 어르신이 이야기하는데 어린놈의 자식이 꼬박꼬박 말대답을 해? 귀족이면 다야? 그래 인성에 문제가 있다. 어쩔래?”
“이봐 파론. 그 말은 너무 심하다고. 귀족님께 얼른 사과드려.”
“야, 빨리 말려. 말리라고. 파론. 집에 있는 애들을 생각해. 게다가 네 집도 대출이 엄청나게 남았잖아.”
이미 주변은 여행자가 귀족이라는 의견으로 단합이 되었다. 유피테르의 외모도 그렇지만, 평민이라면 험악하게 생긴 파론의 외모에 굽히고 들어갔을 것이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다면 저렇게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주민들은 경험으로 파론이 생긴 것과는 다르게 호탕하고 정이 깊다는 것을 알았지만, 새로운 여행객이 그걸 알 리가 있겠는가?
“후. 진짜 개인주의구나. 자식들이 당신의 뭘 보고 자라겠어? 모범이 되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귀족이었다면, 그 말 때문에 당신들을 한 방에 죽였을 수도 있다고?”
유피테르는 웃으면서 은근히 파론을 비꼬았다. 술에 취해있더라도, 아니 오히려 술에 취해있다면 더욱 화를 참을 수 없는 말이었다. ‘인성’과 ‘자식’을 건들었으니 말이다. 특히, 자식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역린이었다.
파론은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참을 수 없는 화가 깊은 사골처럼 진하게 우러나왔다. 파론은 그저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화가 많이 나면 표현하지도 못한다는 말을 실시간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론에게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바로 귀족이었다면 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재수 없는 여행자가 귀족은 아니라는 말과 같았으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지만, 적어도 이 도시에서만큼은 그가 위였다.
헬하운드도 화산 지형에선 2배로 강해진다는 말처럼 말이다.
“이 자식이!”
유피테르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자 파론은 울컥해서 들고 있던 맥주잔을 그대로 던졌다. 맥주잔은 회전하며 빠르게 유피테르를 향했다. 평소 마나를 검에 넣어 사용하기 위해, 꾸준하게 몸을 단련시켰던 파론의 힘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속도, 방향, 리듬. 그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맞기만 해도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이 날 거 같은 기세에 펍 안의 모든 이들은 눈을 의심했다. 평소에는 절대로 저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싸움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직접 맥주잔을 잘 알지도 못한 손님에게 날린다?
그 행동은 정 많은 곰이라는 별명과 너무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쏟아져버린 소금을 다시 주워서 사용할 수 없듯, 주변에서 파론을 말리던 사람들도 이미 손을 떠나 날아가는 맥주잔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걱정스러움 반, 흥미진진한 반으로 맥주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피테르가 힘차게 날아오는 맥주잔을 너무나도 가볍게 잡아들며 웃었기 때문에. 그 행동에는 단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었다. 이 정도의 위협은 어린아이가 깨무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처럼.
‘웃어?’
던진 팔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어서, 엄청난 회전력을 갖게 된 맥주잔은 던진 파론조차 알 수 없는 궤적을 그렸다. 여행자가 그걸 너무나도 쉽게 잡아내자, 파론은 술이 확 깼다.
자신을 비웃은 저 자가 보기보다 실력자라는 걸 직감했다. 단순히 이쁘게 생긴 멀대가 아니었다.
파론이 느끼기에 저 여행자는 마나를 사용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수 완력으로 잔을 잡아낸 것 같지는 않았다. 로브로 가려져 있지만, 저 체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게다가 미소 짓는 얼굴마저 꼴도 보기 싫었다.
“외지인한테 이런 대접이라니. 이게 더비의 방식이구나. 조금 놀랐네. 그럼 이제 내 차례라고 봐도 되는 거지? 그치? 정당방위잖아.”
유피테르는 맥주잔을 화려하게 돌려 바에 있던 주인장에게 돌려준 후,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했다. 구경꾼, 말리는 사람, 심지어 주인장까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유피테르는 고작 맥주잔 하나 던진 거로 이상한 용병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뭐, 펍에서 소소한 일로 시비가 붙고 싸움으로 이어지는 건 충분히 있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아무리 새장 속에 새와 같았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상식은 있었다.
이 정도로는 그를 위협할 수 없었다. 에키드나, 던전 수호자들도 쉽게 박살을 내버린 그에게 있어 맥주잔은 잡아달라고 말하는 모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저 상대하기 귀찮을 뿐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는 것과 공격받은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공격받았을 때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녀’의 앞도 아니었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피테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